AFTER THE COMPETITION
사랑에 빠질 자신감
설득력 있는 연주를 위하여
피아니스트 박재홍
해외 유수 콩쿠르의 한국인 우승자 소식이 들려올 때면, 대중은 그가 얼마나 조명을 받을 수 있을까 궁금해한다. 금방 사그라지는 것은 아닐지 말이다. 그러나 작년 부소니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박재홍(1999~)의 분주한 일정을 볼 때면, 콩쿠르는 연주자에게 추진력을 붙여주는 것이 분명하다.
국내에서 20일 동안 4개의 공연에서 모두 다른 작품을 연주하면서도, 그는 작품 하나하나의 배경·해석·관련 서적까지 공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아가 다양한 인터뷰 요청에도 성실하게 답변하는, 그야말로 정성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보이는 젊은 피아니스트이다.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로 음악을 이야기하며 음악감상, 체스, 독서를 취미로 하는 잔잔한 사람. 자신이 경험한 것을 자세한 감정으로 풀어주는 피아니스트 박재홍과 대화를 나눴다.
작년 이맘때, 부소니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년 동안 스스로 변한 점이 있을까?
여러 콩쿠르를 참가하고, 실패를 겪으면서 콩쿠르가 무엇인지 피부로 배웠다. 너무 많은 것들이 경연장에서 연주하는 순간에 얽혀있다. 그 상을 통해 ‘내가 더 좋은 피아니스트가 됐구나’라고 느끼지 않았다. 내 주변에 변한 건 콩쿠르 이후 열린 수많은 기회의 문이었다. 이번 볼차노 페스티벌에 초대돼, 부소니 콩쿠르 때와 같은 장소에 섰더니 여러 생각이 들더라. 얼떨떨했다. 이런 게 콩쿠르의 의미구나 싶었다.
볼차노 페스티벌! 그렇지 않아도 이번 여름 페스티벌에 관해 묻고 싶었다. 8월에 이탈리아 볼차노 페스티벌과 오스트리아 그라페네크 페스티벌 등 유럽 투어가 있었다.
큰 도전이었다. 총 아홉 연주에서 여섯 번의 독주와 세 번의 협연을 했다. 새로운 레퍼토리를 계속하는 것이 시간상으로 부담이더라. 걱정도 정말 많이 했다. 그런데 오케스트라와 단원들과 30분 정도 이야기했을 때, 음악의 힘이 발현되는 것을 느꼈다. 다들 소위 말하는 ‘음악에 미친 사람’이라, 몇 마디를 하니 몇 십 년 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 같았다.(웃음) 함께 무대에 오른 유러피언 유니언 유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협연자를 위해 모든 걸 바치겠다는 자세를 보여주었고, 덕분에 본 무대 걱정을 안 하게 됐다. 리허설에선 연주를 끝내고 눈물도 났다. 볼차노에서 그라페네크로 넘어갈 때 차 안에서 7시간 정도 축제를 같이한 지휘자 자난드레아 노세다와 대화했는데, 사람과 사람으로 가까워지는 느낌도 받았다. 음악을 함께 만드는 데에 친밀감이 있고 없고가 매우 중요하더라.
경험도, 일화도 많았던 기간으로 보인다. 무대가 있던 날에도 새로운 일이 생겼나?
물론. 야외무대로 유명한 그라페네크다 보니, 나도 꼭 야외무대에 서보고 싶었다. 아침부터 계속 휴대폰을 붙잡고 날씨를 확인했고, 분명 맑은 날씨였는데, 오후 5시부터 저녁 때 비가 온다고 뜨지 않겠는가! 결국 야외 공연은 취소되고 실내로 바뀌었는데, 문제는 마이크와 같은 음향 장비를 모두 뒤늦게 옮겨야 했다. 7시 30분 공연에 6시 리허설이었는데, 7시 10분까지 리허설이 지체됐고, 리허설은 결국 7분밖에 하지 못했다. 13분 뒤에 공연이 시작된다는 사실에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다.
기대한 공연이 갑자기 변동돼 더 긴장됐을 것 같다.
대기실에 초조하게 앉아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부흐빈더(그라페네크 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루돌프 부흐빈더가 맡고 있다)가 들어왔다. 내게 “피아노 공연은 야외보다 실내가 더 좋으니 떨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페스티벌을 즐기러 온 행복한 사람들과 행복한 기억을 남겼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거장이 좋은 말씀을 전해주니 큰 위안이 됐다. 그날 공연이 내겐 볼차노보다 아쉬웠지만,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그날 연주가 더 좋았고, 부흐빈더도 좋은 연주라고 말해줬다.
넓혀가는 해석의 지평
연주 기회가 늘어나면서 본인 소리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을 것 같다. 자신의 연주 스타일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을까?
오히려 연주 스타일이 계속 바뀌길 바라고 있다. 볼차노에서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연주를 관람한 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콜로프가 연주하는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를 듣고 눈물이 났다. 이전까지 항상 작곡가의 대변인이 되는 연주를 선호하였는데, 소콜로프는 악보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해석을 많이 가미하더라. 순간 ‘연주자가 설득할 수 있는 해석을 제시하면 작곡가가 과연 싫어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악보의 기본을 지키면서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연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음악 앞에서 항상 진중하고 많은 공부를 하는 것이 눈에 띈다. 이전에 직접 쓴 글에서 ‘음악적 자양분’에 관해 설명(본지 22년 1월호)하기도 하였다.
악보 외부에 있는 지식이 연주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다. E.T.A. 호프만 원작을 읽은 후의 슈만의 ‘크라이슬레이아나’나, 셰익스피어 ‘템페스트’를 읽은 후의 베토벤의 ‘템페스트’는 그전과 달라진다. 소위 말하는 ‘절대음악’에도 이런 것이 적용된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본 순간 느낀 강렬한 감정이 쇼팽 프렐류드를 칠 때 반영될 수도 있다. ‘감정 자양분’이라고나 할까? 감정과 사상이 주는 무의식적 상호작용이 존재함을 느낀다.
살뜰하게 준비한 무대
9월 말 독주회에서는 슈만·스크랴빈·프랑크를 연주한다. 프로그램을 어떻게 짜게 됐나?
슈만은 내가 너무 깊이 빠져있어서, 스크랴빈과 프랑크는 올해 기념 해를 맞이한 작곡가라서 골랐다. ‘아라베스크’나 ‘크라이슬레리아나’는 슈만을 사랑하게 된 이유이다. ‘아라베스크’의 마지막 코다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웃음) ‘크라이슬레리아나’는 머리 페라이어가 연주하는 것을 들어보고 빠져들었다. 스크랴빈의 피아노 소나타 3번은 과도기의 격정을 보여준다. 만족스럽지 못한 결혼 생활의 우울함과 불안이 표현돼 짙은 감정 호소를 느낄 수 있다. 프랑크의 ‘프렐류드, 코랄과 푸가’는 종교적 색채가 강해 경건해진다. 이렇게 독주회 프로그램을 짜니 완전한 느낌이 들었다.
좋아하는 작곡가가 계속 바뀐다고 들었다. 지금은 누구인가?
마음 속 첫째, 둘째 자리의 베토벤과 바흐는 불변이다. 셋째 자리싸움이 항상 치열한데, 지금은 슈만과 브람스다. 사람들이 ‘그냥 현재 연주하는 작곡가를 좋아하는 것 아니냐’라고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어떤 작품을 연주하든 그 작품을 가장 사랑할 자신이 있다는 의미이다.
10월 초에는 정명훈/경기필과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한다.
한국의 피아니스트라면 정명훈 지휘자와 연주하고 싶다는 꿈이 있을 것이다. 그게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게 아직 잘 믿기지 않는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지휘자이기에 이번 공연에서도 많은 배움을 얻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차이콥스키의 협주곡도 묵직하게 가슴을 강타하는 매력, 1악장·3악장에서 등장하는 우크라이나 민속 주제가 흥미롭다. 아주 어릴 때는 그저 신나는 곡이라 생각했는데, 훨씬 깊고 심오한 곡이다.
올해 남은 하반기 계획이 있다면?
일단 건강하기.(웃음) 남은 기간에 계속 해외에 나가야 하는데, 해이해지지 않고 계속 겸손한 마음으로 좋은 연주를 이어 나가고 싶다.
글 이의정 기자 사진 마스트미디어
Performance information
마포아트센터 재개관기념 M소나타 시리즈 03-박재홍 리사이틀
9월 29일 오후 8시 마포아트센터 아트홀 맥
슈만 ‘아라베스크’ ‘크라이슬레리아나’ 외
경기필하모닉 마스터피스 시리즈 Ⅳ
10월 9일 오후 5시경기아트센터 대극장
10월 10일 오후 5시 롯데콘서트홀
정명훈(지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교향곡 6번 ‘비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