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위트레흐트 콩쿠르 9.22~29
축제로 진화하는 관객 친화의 장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전하는 생생한 현장 이야기
제12회 리스트 피아노 콩쿠르가 ‘리스트 위트레흐트’로 이름을 바꾸고. 9월 22일부터 29일까지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열렸다. 탈락을 거듭하는 서바이벌형 대회보다 다양한 형식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페스티벌형 대회를 지향했다.
김민규·박연민(한국), 빅토리아 바스카코바·비탈리 스타리코프(러시아), 구로키 유키네(일본), 마티아스 노바크(체코), 탐타 마그라제(조지아), 카젱 웡(홍콩), 데릭 왕(미국), 레오나르도 피에르도 메니코(이탈리아) 등 10명의 준결선 진출자가 악기와 장르를 달리하며 4개씩 총 40개의 리사이틀을 소화했다. 올해의 특징은 ‘슈베르트 에디션’으로 탄생 225주년을 맞은 작곡가를 부각했다. 10명의 피아니스트는 ‘올 리스트 피아노 리사이틀’(야마하 피아노), ‘체임버 뮤직 리사이틀’(마너), ‘가곡 리사이틀’(스타인웨이), ‘올 슈베르트 피아노 리사이틀’(파지올리) 등 각 라운드를 모두 소화했다(괄호는 연주한 피아노). 그 결과로 3명의 결선 진출자를 뽑는 방식이었다. 최종 3인(박연민·구로키 유키네·데릭 왕)은 크리스티안 레이프가 지휘하는 네덜란드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리스트가 피아노 협주곡 버전으로 편곡한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S366을 공연하며 순위를 가리는 여정이었다. 최후까지 남은 3인의 준결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열을 가릴 수 없었던 준결선
먼저 박연민(1990~). ‘체임버 리사이틀’에서 리스트의 ‘잊힌 로망스’는 비 오는 초가을 풍경과 어울렸다. 첼로의 음 끝에 물방울같이 피아노 음이 맺혔다. 슈베르트 피아노 4중주인 아다지오와 론도 콘체르탄테에서는 또랑또랑한 음색이 빛났다. 현악기들과 같은 톤으로 노래하는 피아노의 여유속 전원적인 분위기가 근사했다. 발랄한 론도 콘체르탄테는 청정 대기를 떠올리게 했다. ‘올 리스트 리사이틀’은 박연민이 보여준 최고의 무대였다.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 중 왈츠는 반짝이며 미끄러지는 음색으로 출발해 활기 띤 풍성함으로 대조시켰다. 메피스토 왈츠 4번은 통통 튀는 탄력이 돋보였고 ‘파우스트 교향곡’ 중 그레첸 테마에서는 서정적이고 평화로운 연주를 풋풋하게 펼쳤다. 피날레의 음색이 영롱했다. ‘토텐탄츠’에서는 저음 건반을 누르며 어둑어둑한 선율을 만들기 시작했다. 노도 같은 물결, 뚜렷한 입체적 울림이 도발적으로 귀를 자극했다. 여백을 가져가며 가벼운 종소리 같은 고음으로 대조를 꾀했다. 저역의 강렬함과 신비한 생명력의 고음이 교차한 피날레는 마음을 움직였다. 청중은 전원 기립박수로 커튼콜을 청했다. ‘가곡 리사이틀’에서는 구노 ‘툴레의 왕’의 섬세하고 튀지 않는 반주, 리스트 ‘바닷가소년’의 아름답게 띄우는 은은한 음색이 돋보였다. 위촉곡인 마틸데 반테나르(1993~)의 ‘방랑자의 밤노래’에서 종처럼 울리는 피아노는 간질이듯 부는 미풍 같았다.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를 들으면서 새삼 감동했다. 박연민의 반주는 조심스럽게 아름다운 노래의 테두리를 장식했다. 다음으로 구로키 유키네(1999~). ‘올 슈베르트 리사이틀’에서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중 ‘방랑’ 연주는 동양적인 정갈함이 느껴졌다. ‘물 위에서 노래함’에서는 단순한 간명함이 느껴졌다. ‘체임버 뮤직 리사이틀’에서 구로키는 슈베르트 ‘송어’ 를 연주했다. 4악장과 5악장에서 송어의 주제 선율을 현악이 연주하자 피아노가 또렷하게 새기며 진행했다. 현악보다 빠르게 곡을 견인했고 발랄해지는 부분에서도 피아노의 템포는 매우 빨랐다. 5악장은 정감 있는 분위기 속에서 밝게 약동 하는 연주였다. ‘올 리스트 리사이틀’에서 강렬하고 두터웠던 2개의 폴로네즈에서는 객수(客愁)가 우러났다. ‘순례의 해’ 중 ‘혼례’는 따스하고 밝은 빛을 발했다. 발라드 1번에서는 서정적인 전개에 기교가 감돌았다. 행진곡풍을 지나 별이 쏟아지듯 고음이 아름다웠다. 발라드 2번은 어둡다가 밝고 씩씩해지는 부분을 작은 체구임에도 힘 있게 해석했다. 데릭 왕(2000~)의 준결선은 어땠을까. ‘올 리스트 리사이틀’은 ‘4개의 메피스토 왈츠’로 시작했다. 열정적인 그는 밝은 태도를 지닌 에너자이저 타입이었다. 기세가 대단했지만 섬세함은 아쉬웠다.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 중 왈츠는 고음부의 타건이 인상적인 맑고 정직한 연주였다. ‘파우스트 교향곡’ 중 ‘그레첸’은 서정적이었지만 건조했다. 고즈넉하고 여유롭고 몽환적이기도 했다. ‘토텐탄츠’는 강렬한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홀 전체에 ‘진노의 날’ 주제가 가득했다. ‘가곡 리사이틀’은 반테나르 ‘방랑자의 밤노래’로 시작했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물레 잣는 그레첸’에서 물레는 매끄럽게 돌지 못했다. ‘옛 툴레에 왕이 있었다’ S278의 극적인 해석이 제일 어울렸고, ‘정상에는 안식이 있도다’ S306에서는 정치한 아름다움을 풍겼지만, 몽환적이어야 할 피날레에서 단조로웠다. ‘올 슈베르트 리사이틀’에서 ‘백조의 노래’ 연주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리스트 편곡 슈베르트 가곡의 심원함을 일깨워줬다.
슈베르트의 순수성에 손을 들어주다
29일 후 흐로테잘(그랜드홀)에서 열린 결선은 준결선보다 변별력이 크지 못했다. 리스트가 편곡한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은 결국 피아니스트의 어려움을 관현악이 덜어준 모양새의 작품이었으니까. 첫 순서로 나온 데릭 왕은 리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적인 마성과 공격성을 부각시켰다. 두 번째 구로키 유키네는 이와 대조적으로 리스트 음악에서 그레첸이나 ‘아베 마리아’를 연상시키는 슈베르트적 순수성을 끌어내 견지했다. 악보를 충실히 재현하는 것보다 그만의 설득력 있는 연주였다. 인터미션 후 마지막 연주자였던 박연민은 이와는 또 대조적으로 디테일에 신경 쓰는 입체적인 연주를 펼쳤다. 팬데믹 기간에 연기에 이어 취소까지 됐었던 이번 대회는 관객 친화적인 축제형 콩쿠르로 진화하고 있었다. 다음 리스트 위트레흐트는 2026년 열린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리스트 위트레흐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