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엘리소 비르살라제 & 마리아 주앙 피르스
대모들의 내한
김태형과 원재연이 말하는 ‘나의 스승’
피아니스트 엘리소 비르살라제(1942~)와 마리아 주앙 피르스(1944~)가 내한한다. 피아노 음악계를 지탱해오고 있는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이들의 내한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만년을 보내고 있는 두 피아니스트의 다음 내한을 기약하기 힘들어 이들의 공연 소식은 더욱 반갑고 귀하다. 비르살라제는 2017년 75세가 되어서야 처음 한국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당시 그가 선보인 슈만의 환상소곡집, 슈베르트·프로코피예프의 소나타는 ‘피아노 성찬’으로 불리며 ‘성스럽고 경건한 첫 내한 공연’이라는 평가받았다. 조지아의 트빌리시에서 태어나 할머니(아나스타샤 비르살라제)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트빌리시 음악원과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겐리히 네이가우스와 야코프 자크를 사사한 그녀는 모교에서 러시아 피아니즘을 후학들에게 넘겨주고 있다.
피르스 역시 이번 내한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독주회로 한국을 찾는 건 이번이 처음. 2013년 17년 만에 두 번째 한국을 찾았던 그녀는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런던 심포니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려주었다. 1989년 이후 도이치 그라모폰(DG)의 전속 아티스트로 활약하며 발매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음반은 오늘날까지 회자하는 명반 중 하나로, ‘모차르트’는 그를 수식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불우한 이들을 위해 직접 재단을 설치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그의 행보는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인상을 안겨주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연이은 연주 일정으로 이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배양한 피아니스트 김태형과 원재연이 두 노장과의 추억과 배움의 시간을 들려주었다.
김태형의 멘토 비르살라제
세월도 막을 수 없는 그 음악의 힘
김태형(1985~)은 지난 7월 연주를 위해 방문한 독일에서 비르살라제와 재회했다. 코로나 이후 수년 만에 만나는 스승이 쇠약해지진 않았을까 염려도 되었지만, ‘여전한’ 그의 열정을 보고 금방 안심했다고. 독일에서 트리오 가온 리사이틀을 앞둔 김태형을 이메일로 만나 비르살라제와 함께 한 시간을 들어 보았다.
몇 개월 전 SNS에 비르살라제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공유했습니다. 무척 반가운 두 장의 사진이었는데요, 스승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나요?
오랜만에 레슨을 받았어요. 7월 중순 독일에서 독주회가 있었고, 프로그램 중 일부였던 슈만의 ‘카니발’과 슈베르트의 ‘악흥의 순간’을 레슨 받았어요.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고 나서부터는 동료들이나 실내악에서 의견을 공유하며 음악적 세계를 넓혀가는 시간이 많은데, 이런 기회를 통해 스승의 의견을 듣는 건 엄청난 기회에요.
펜데믹 이후 스승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민감한 부분이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가장 큰 변화인 것 같아요. 다행히 선생님은 독일과 러시아 여권을 갖고 계시고, 뮌헨을 거점으로 연주 활동을 하시기에 제한이 있지는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스승은 80대를 향하는데요. 이제는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작품들이 점점 늘어나 고민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당시 저녁을 먹으며 말씀하시기를 “얼마 전에 이스라엘에서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을 하루 만에 연주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오랜만에 뵈었기에 쇠약해지시지 않았나 걱정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안도감이 들었어요. ‘여전하시구나!’
니콜라이 루간스키, 일리야 라쉬콥스키 같은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들이 콘서트 피아니스트와 후학 양성의 길을 함께 걷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졸업 때 우수한 학생이 자연스레 교수의 어시스턴트가 됩니다. 연주자의 삶을 살지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지를 졸업과 동시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본인의 예술성도 채워나가는 분위기입니다. 어느 정도 교육관이 확립되었을 때, 본인의 ‘클래스’를 만들어 발전시켜나가는 게 러시아만의 방식인 것 같습니다.
스승은 설명하기보다 연주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무엇인가요?
결국 선생님이 가르치고 싶으신 건 음색이었어요. 작곡가가 원하는 음색을 위해 몇 십 년을 갈고 닦은 그 하나의 소리를 말이죠. 가슴이 찌릿하면서 움직이게 되는 그 음색 때문에 선생님과 공부하고 싶었거든요.
그중에서도 가장 강조하셨던 것이 있다면?
늘 강조하시는 건 템포(Pulse). 그래서 너무 자유로운 해석은 원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정형화된 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어요. 이러한 맥락에서 특히 쇼팽을 마음대로 연주하는 걸 정말 정말 싫어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생각나는 스승의 어록이 있나요?
많죠. 누구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친구에게 “슈베르트 소나타는 길어서 지겹다지만, 네 연주는 짧은데도 지겹다”라고 지적하신 적도 있고, 누구의 연주는 “빈 깡통이 요란한 연주”라고도 이야기하시기도 했어요.(웃음)
말년을 보내고 계신 스승이 제자에게 충고한 피아니스트로의 삶은 무엇이었나요?
계속 지금 하는 것을 하는 거죠. “예술이란, 긴 시련을 참아 만들어지는, 피아니스트가 일생에 걸쳐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선생님뿐만 아니라, 거장들의 삶을 보면, 끊임없이 한 음 한 음을 위해서 노력하고 시간을 들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깊어져 있겠죠?
스승은 이번 내한에서 모차르트의 환상곡과 쇼팽의 왈츠 등을 엮어 선보입니다. 피아니스트로서 모차르트와 쇼팽의 작품을 나란히 배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어떻게 이런 프로그램을 하시는지! 모차르트의 작품은 피아니스트의 실력을 탄로 나게 해서 보통 ‘벌거벗고 들어가는 기분’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아마 선생님은 피아노 음악의 정수만을 보여주고 싶으신 게 아닐까요. 이번 내한 무대에 오르는 ‘리종에서 잠들고-주제에 의한 9개의 변주곡’ K264는 잘 연주되지 않기에 새로운 작품을 만나보는 기쁨도 있을 겁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엘리소 비르살라제 피아노 독주회
11월 24일 오후 8시 금호아트홀 연세
모차르트 환상곡 c단조 K396, ‘리종에서 잠들고-주제에 의한 9개의 변주곡’
K264, 쇼팽 왈츠 B150 Op.posth, 발라드 2·3번, 야상곡 7번 Op.27/1 외
원재연의 멘토 주앙 피르스
나눌 때 비로소 보이는 음악
피르스의 오랜 팬이었던 원재연(1988~)은 2018년 피르스의 매니저에게 직접 ‘꼭 한 번 레슨을 받고 싶다’라는 내용과 함께 연주 영상을 메일로 보내고, 카사 데 벨가이스의 마스터클래스에 초청받아 가르침을 받는다. 그 만남 이후 피르스는 여전히 ‘멘토’로 꾸준히 음악적 조언을 해주고 있다. 11월 베를린 필하모니에서의 독주회 준비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는 원재연에게 피르스와의 추억을 회상해달라고 부탁했다.
‘카사 데 벨가이스(Casa de Belgais)’는 마약에 빠져 있는 불우한 어린이들을 예술을 통해 돕기 위해 1999년에 피르스가 직접 설립한 문화예술센터라고 들었어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차로 2시간가량 가다 보면 산과 들판으로 둘러싸인 집이 나오는데 그곳이 카사 데 벨가이스입니다. 이 공간은 예술 센터 겸 숙소로, 마스터클래스, 하우스콘서트 형식의 다양한 공연이 열려요. 아침마다 산책하며 곳곳에 있는 올리브 나무와 광활한 자연을 만끽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후에는 마스터클래스에 참여하고, 저녁이면 예술에 대한 열띤 토론으로 밤을 보내며 열흘 동안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시간이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고요.
스승은 이 외에도 학대와 폭력에 시달리는 아동을 위한 프로젝트, 불우 청소년 교육 사업을 추진하는 등 음악 외에 헌신적인 봉사 활동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평소에 선생님은 “경험과 경력 위주가 아닌 예술을 통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이 나의 예술관”이라고 강조하곤 하세요. 특히 ‘공유하는 삶’, 가진 것을 베풀고, 재능을 나눠주는 삶이 선생님의 지향점이라고 하셨습니다.
공연 때도 드레스가 아닌 평소 당신이 입으시던 옷을 입고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면 소탈한 음악가이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번은 며칠 뒤에 있을 공연에서 연주할 곡을 학생들에게 들려주신 적도 있어요. 한편으로는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는 게 조심스러울 수 있지만, 선생님은 오히려 자신의 연주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시더라고요. 선생님의 소탈한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가르침의 자세는 어떠하신가요?
‘마디는 감옥이다’라고 이야기하시곤 했습니다. 악보에 있는 것보다 작곡가의 삶과 소리에 영혼이 담겨 있다고 믿으시는 분이거든요. 그래서 철학적이고 해학적인 해석을 요구하시는 게 늘 어려웠지만, 선생님 또한 빌헬름 켐프와 클라우디오 아라우 등에게 배운 음악적 유산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스승은 이번 내한에서 슈베르트와 드뷔시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모차르트에 정통한 그녀의 초기 고전주의 연주를 듣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그녀의 어떤 연주 스타일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감상하면 좋을지 팁을 알려 알려주세요.
선생님은 오히려 자신은 “모차르트에 정통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며 “영혼을 어루만지는 연주가 제일 좋은 연주”라고 하셨어요. 고정관념을 지우고 진실한 음악에 마음을 연다면 최고의 공연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저 또한 선생님의 레퍼토리 중 슈베르트를 가장 좋아하기에 기대되는 공연입니다.
만년을 보내고 계신 스승이 제자에게 충고한 피아니스트로의 삶은 무엇이었나요?
선생님께 어떻게 하면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는지 질문한 적이 있어요. 이에 “재연, 너의 재능은 뛰어나고 환상적이지만, 커리어를 만든다는 뜻은 인생의 고통이야, 커리어보단 너의 음악으로 가까운 주변 사람들의 내면을 어루만지는 것부터 시작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 앞으로 가져가야 방향을 제시해주신 것 같았습니다.
글 임원빈 기자 사진 금호아트홀·인아츠프로덕션
PERFORMANCE INFORMATION
마리아 주앙 피르스 피아노 독주회
11월 22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1월 24일 오후 8시 울산 현대예술관 대공연장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D664·D960, 드뷔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