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공연수첩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3년 4월 29일 3:03 오후

choice 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Editor's Note

 
맨발의 바이올리니스트
잉고 메츠마허/서울시향
(협연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
3월 10·11일 롯데콘서트홀
코파친스카야가 맨발로 무대를 향해 성큼성큼 들어온다. 한 손으로 바이올린을 높이 들어 올린 채 하얀 드레스를 펄럭이며 들어오는 그녀와 객석을 번갈아 보니, 첫 내한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과 연주자에게 보내는 낯선 시선이 교차하며 약간의 긴장감이 무대에 감돈다. 2020년 코로나로 내한이 취소되면서 이번이 첫 한국 방문이다.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1977~)의 이름을 여러 음반을 통해 접한 관객이라면, 그가 범상치 않은 해석과 테크닉으로 유럽 무대를 휘어잡고 있는 것을 알 것이다. 베를린 필하모닉·NDR 엘프필하모니·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상주음악가로 활약한 그는 지휘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테오도르 쿠렌치스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피아니스트 파질 세이와 브람스·야나체크 등을 음반으로 담았다. 독특한 음악관을 보여주는 음악가들 사이에서 그녀만의 거친 해석과 응집된 에너지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번 내한에서는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했다. 코파친스카야가 “가능한 한 견해나 의견 없이 나의 본능과 내가 발견한 길을 따르려고 노력한다”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음악은 악보가 아닌 그녀의 자유로운 의식에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느슨한 1악장을 지나고 마치 산조를 연주하는 전통악기 연주자처럼 그녀의 정신은 더욱 음악으로 불려 갔다. 2악장에서는 칼로 베는 듯한 바이올린의 음향과 오케스트라와의 호흡이 절묘하게 맞물려갔다. 음악에 몰입할수록 코파친스카야는 발을 구르고 점프하기도 했다. 협연자 위치를 지휘자 옆으로 지정하지 않았다면, 악기가 손에 없었다면, 그녀는 뛰어다니며 무대를 누볐을 것이다. 4악장에 이르자 즉흥연주라고 해도 믿을 만큼 주술적인 연주를 선보인다. 그는, 악보의 엄격함에서 벗어나 음악이 건네는 에너지를 온전히 무대에 쏟아내고 있었다. 정확한 악보를 읽기보다 뉘앙스를 명확히 짚어내기에 또렷한 연주력을 기대한 몇몇 이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 있었겠다. 하지만, 마지막 악장이 끝나고 관객이 보낸 열렬한 박수를 생각할 때, 그녀의 매력은 충분했던 것 같다. 
글 임원빈 기자 사진 서울시향


능란한 연주자의 리드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 
피아노 독주회
2월 28일 롯데콘서트홀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은 머리 위로 손뼉을 치며, 그를 보내줄 마음이 없음을 강하게 표출했다. 으레 자주 보이는 모습이 아니냐 싶겠지만, 공연 시작 전 관객들이 조용히 나누는 대화들을 지나치다 보면, 그가 국내에 두꺼운 팬층을 소유한 피아니스트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두 시간 만에 그는 어떻게 모든 관객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버린 것일까?
1부에서는 바흐의 파르티타 6번 BWV830과 시마노프스키 마주르카 Op.50의 네 곡(제3·7·5·4번)을 연주했다. 두 작품 모두 춤을 기저로 두는 작품으로, 춤 박자의 스텝을 꾸준히 밟으며 움직이는 리듬감을 놓쳐서는 안 되는 곡이다. 이런 장르의 특징과 안데르제프스키 특유의 음색이 더해지니 아주 특별해졌다. 롯데콘서트홀의 긴 잔향에 안데르제프스키의 타건 방식도 잔향이 매우 길어, 이날의 공연은 평소보다도 더욱 긴 잔향을 가지게 됐다. 촉촉한 음색 속에서 옮기는 발걸음은 무거울 법한데, 노련한 신사가 리드하는 스텝은 엉기는 법이 없다. 긴 잔향에 따라붙는 ‘지저분하다’는 형용사는 그의 연주 사전에 등록되지 않은 단어였다.
인터미션 이후 2부는 베베른의 변주곡 Op.27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1번 Op.110을 끊지 않고 연주했는데, 각 작곡가와 작품의 특징을 잘 살렸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기품있게 춤을 추던 1부의 신사는 단호하게 변해 엄격하고 규격에 맞는 변주곡을 연주했다. 잔잔한 베토벤 소나타의 1악장이 바로 연결되자 지나간 음악은 더욱 단단했다는 기억이 남았다. 베토벤을 마지막에 배치한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첫 곡부터 이어진 그의 강점이 모두 드러났으며, 3악장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나란히 춤을 추다가 쉬지 않고 절정까지 달렸으니, 어느 관객이 그를 보내주고 싶었겠는가.  
글 이의정 기자 사진 인아츠프로덕션

왜 아름다워야 하는가
파리 오페라 발레 ‘지젤’
3월 8~11일 LG아트센터 서울 LG시그니처홀
30년 만에 한국을 찾는 ‘발레의 종가’ 파리 오페라 발레가 선보인 것은 극강의 아름다움이었다(10일 관람). 인간의 몸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도록 구성된 발레 동작에서 종종 느끼던 관음적 전시의 불편함을 잊을 만큼 아름답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이토록 강한 설득력을 가진 가치였던가! 연인에게 버림받았기에 밤마다 청년들을 유혹해 죽게 만든다는 유령 ‘윌리’의 춤에 나도 어느새 홀린 게 분명하다. 
오로지 마임과 춤, 음악으로 구성된 작품이지만 서사 전달력이 여느 장르 못지않다. 발레의 예술적 가치가 동시대에서도 빛바래진 않을 만큼 완전하다. 오히려 이들은 그 아름다움으로 질문한다. 바로 인간에게 ‘몸’이 있다는 자각. 우리는 질량을 가졌고, 중력 내에서 움직인다. 고도로 발전된 기술 때문에 종종 스스로를 모든 물질적 제약에서 벗어나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라고 인식하진 않는가. 인간으로서의 유한성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아름다움이라는 삶의 균형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알브레히트 역을 맡았던 폴 마르크(에투알) 대신 안드레아 사리(쉬제)가 올랐고, 지젤 역의 레오노르 볼라크(에투알)가 선보인 연기는 놀라웠다. 연인의 배신을 깨닫고 미쳐가는 장면에서는, 객석을 향해 정면으로 서서 표정만으로 그 감정을 충분히 전달할 만큼 몰입력 있었다. 지젤의 마음을 독백하듯 어디선가 들려오는 행복했던 시절의 노래들, 잘못됨을 인지한 순간 타블로 비방처럼 멈춘 군무 연출까지…. 무대 전체에 세련된 감각도 돋보였다. 
스타 무용수 위고 마르샹(에투알)의 캐스팅(11일)이 불발된 점은 아쉬웠지만, 그를 대신한 기욤 디옵(쉬제)이 공연 이후 발레단 역사상 최초 아프리카계 에투알로 지명되며 화제를 모았다. 파리 오페라 발레의 최초 아시아인 에투알 박세은의 모국에서 이러한 발표를 감행한 데에는 모종의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글 허서현 기자 사진 LG아트센터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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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테 질베르(지젤 역)·기욤 디옵(알브레히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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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AL Music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바이올린 독주회
무대 위의 마술사, 그 사나이
3월 8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머리를 묶은 사나이는 바로 연주에 들어갔다. 크리스티안 테츨라프(1966~)는 주지의 사실로서 독일 음반비평가상, 프랑스 디아파종 상을 수상한 바 있는 독일의 명성 높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2019년 서울시향 ‘올해의 음악가’로 한국에도 탄탄한 팬층이 있는 연주자다. 현을 긋기도 전에 이미 그를 환영하는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첫 곡은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Op.27-1. 홀 전체를 울리는 음량에 이미 객석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테츨라프는 57세 동갑의 악기 제작자 피터 그라이너가 만들었다는 현대 악기로 정밀하고 군더더기 없는 연주를 들려주었고, 주법과 소리에 늘어짐이 없었다. 갑자기 등장하는 폭발적인 스케일에서는 오히려 흥분을 덜어내고 차분하게 연주했는데, 청중의 예상을 살짝 비켜나가는 데서 오는 쾌감이 있었다. 내공이 깊지 않은 연주자들은 종종 완전히 새로운 악상을 시도해 오히려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테츨라프는 프레이즈의 호흡을 잠깐 다른 곳에서 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관객을 환기시켰고, 같은 곡에서도 새로움이 느껴졌다.
이어서 그의 바흐를 들을 시간이 왔다.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담은 그의 음반은 ‘그라모폰’ ‘더 가디언’도 강력히 추천한 바 있다(그의 또 다른 음반 ‘베토벤·시벨리우스 협주곡’ 추천만큼 흥분된 어조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이번에 연주한 소나타 3번 BWV1005의 첫인상은 밝고 현대적인 느낌이었다. 테츨라프는 바흐의 무반주 작품에 대해 “깊은 어두움과 밝음이 조화된,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곡”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대로 어두움과 밝음이 반씩 섞인 노래였다. 푸가에서는 정석대로 주선율을 중시하면서도 노래를 놓치지 않았다. 약간 빠른 템포는 ‘음을 잡고 노는’ 경지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알레그로 아사이’에서는 연주의 핵심인 활 테크닉을 잘 볼 수 있었다. 정확한 각도와 강도로, 허투루 쓰이는 부분 없이 명료한 소리를 내는 것이다. 끝부분의 스케일은 억지로 마디를 세지 않고 마술처럼, 흘러가는 대로 해석하는 듯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바흐의 무거움을 덜어내 분방한 느낌까지 주었다.  
인터미션 후 쿠르탁의 ‘사인, 게임, 그리고 메시지’에서 발췌한 여섯 곡을 연주했다. ‘바흐에 대한 오마주’에서는 훌륭한 고음 스케일을 보여주었고, ‘타마스 블룸을 추모하며’의 화음과 변덕스러운 선율은 테츨라프와 잘 맞았다. 마지막 곡인 ‘반음계적 싸움’으로 갈수록 그가 가진 현대음악에 대한 해석이 빛을 발했다. 무언가를 읊조리는 느낌인데 정확한 뜻을 해석할 수 없는 ‘버려진 느낌’을 주었다. 이는 ‘사인, 게임, 그리고 메시지’ 중 한 곡인 ‘롤랑 모저에 대한 오마주’를 떠올리게 했는데, 목소리와 함께 연주하는 이 작품의 바이올린처럼, 테츨라프의 연주는 ‘모호’하지만 한편 ‘정확’했다.
마지막으로 연주한 버르토크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Sz 117에서는 근본에 조용히 웅크린 바흐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날 연주에 등장한 작곡가들의 편린을 가져온 테츨라프의 근원에 바흐가 있다는 사실이 명료히 드러났다. 관객에게는 앙코르로 세 조각의 바흐가 더 주어졌다. 소나타 2번의 ‘안단테’, 파르티타 3번의 ‘가보트’, 파르티타 2번의 ‘사라방드’까지. 그가 밝음과 어두움의 예로 들었던 바로 그 곡들이었다.
글 양경원(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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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AL Music  

세종솔로이스츠와 조이스 디도나토 ‘오버스토리 서곡’
고전의 감동, 오늘의 공감이 공존한 시간
3월 1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으로부터 얻는 감흥은 고양돼야 하기에, 삶의 문화와 감각이 변화함에 따라 공연도 변화해야 한다. 조이스 디도나토와 세종솔로이스츠의 공연은 이러한 의무에 하나의 답을 제시했다. ‘고전’이라고 불리는 18세기 후반부터 바로 지금 작곡된 작품까지 펼쳐놓으며, 변하지 않는 공연의 보편적 가치를 제시하면서 작품이 품고 있는 각 시대의 고유한 의미를 전달했다.
1부는 세종솔로이스츠가 현악 앙상블의 고전을 선보였다. 첫 곡은 우리가 아는 하이든의 동생, 미하엘 하이든(1737~1806)의 ‘노투르노’ 중 아다지오로, 마치 하나의 악기가 연주하듯 각 성부의 통일된 음향으로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관객들을 소리 예술의 세계로 인도했다. 
이어지는 곡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독주 바이올린의 민첩함과 현악 앙상블의 엄숙함, 그리고 낭만적인 열정과 서정적인 감성이 공존하며 이야기를 펼쳤다. 독주를 맡은 스티븐 김은 탁월한 보잉으로 세밀화를 그리듯 각 장면을 선명하게 표현했으며, 앙상블은 민첩한 장면 전환으로 호응했다. 활의 압력을 섬세하게 제어하여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는 듯 처절한 감성을 노래하기도 하고, 화려하게 춤을 추기도 하는 등 생동감 있는 향연을 펼쳤다. 
1부의 마지막 곡은 베베른의 ‘느린 악장’으로, 빠르기와 강약을 파도에 휩쓸리듯 유연하게 조절하며 현악 앙상블의 풍부한 음향의 움직임을 들려주었고, 폭넓은 표현의 스펙트럼으로 스산함 속에 피어난 사랑의 따스함을 전했다.
2부는 작곡가 토드 마코버(1953~)의 ‘오버스토리 서곡’의 아시아 초연이다. 마코버는 현대의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작곡가로, 이 작품은 나무를 연구하는 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오늘날의 환경 문제를 공유한다. 
가사에 집중해 구성했다는 것이 우선 귀에 들어왔다. 예를 들면 ‘underground(지하)’는 낮은음으로, ‘light(빛)’는 높은음으로, 중요한 단어, ‘tree(나무)’와 ‘breathe(숨)’는 길게 연주하는 것이다. 바로크 시대의 몬테베르디가 추구했던 방향이며, 고대 그리스의 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과거 지향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마코버는 음향의 현대성에 표현의 보편성을 결합했다. 더 나아가 연주자가 활을 휘젓고, 바람에 흔들리듯 몸을 흔들며, 독창자와 지휘자가 연관된 몸짓을 하는 등 동작이 지시된 음악극을 지향했다. 
이들의 무대는 같은 공간에 함께하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공연으로서 큰 감흥을 주었고,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콜레뇨(활의 나무 부분으로 현을 두드리는 주법), 술폰티첼로(브릿지 가까이에 활을 두어 연주하는 주법), 전자음악 등으로 만드는 소음이 자연적으로 들린 것도 인상적이었다. 사실 자연의 소리는 아날로그적이며, 모두가 공존하는 숲의 소리는 곧 소음이다. 숲의 소중함을 노래하는 이 작품에서 소음이 자연스러운 이유이다. 하지만 제한된 조명으로 무대를 충분히 극적으로 만들지 못한 것과, 과학적인 가사의 이성적인 이해와 음악의 감성적인 감흥이 다소 충돌을 일으킨 것은 아쉬운 점이다. 과학적인 내용에 대한 음악적 수사법이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에 대한 고민이 더욱 필요할 것 같다.
조이스 디도나토와 세종솔로이스츠는 뛰어난 고전음악 연주뿐 아니라 무대의 동시대적 구현으로써 우리 시대 인류의 확장된 감각을 자극하는, 즉 무대 전체를 ‘구성’(compose)하여 감흥을 고양하는 공연을 펼쳤다. 이는 클래식 음악이 맞닥뜨린 위기를 진단하고 공감의 무대를 고민하는 음악가에게 해법의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세종솔로이스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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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ater

연극 ‘분장실’
브라보! 하찮지만 소중한 인생이여
3월 4일~5월 14일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2관

실제로 분장실은 극장에서 매력적인 곳이다. 배우가 극중 인물인 가상의 존재로 변신했다가 공연이 끝나면 현실로 회귀하는 곳. 실재와 허구가 공존하는 곳. 연극 ‘분장실’(시미즈 쿠니오 원작, 윤서현 각색·연출)은 이 공간의 특징을 연극으로, 인간의 삶으로 확장하는 작품이다. 
공연은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 중 ‘니나’의 대사로 시작한다. 아름답던 시절을 떠올리는 대사라 분위기가 사뭇 처연하다. 그런데 갑자기 대사를 더듬고 몇 번을 반복한다. 니나를 연기하는 배우 C(황순미 분)가 무대가 아닌 분장실에서 대사를 혼자 연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주히 분장하고 의상을 챙기는 A(송옥숙 분)와 B(서영희 분)도 함께 있다. C의 대사 연습에 훈수를 두는 두 사람은 C가 무대로 나간 뒤에도 한참 동안 수다를 떤다. A는 남자나 꼬마 같은 단역만 연기했고, B는 제대로 무대에 서 본 적도 없지만, 그럼에도 니나가 되고 싶었던 배우였다. 두 사람이 무대에 오르지 못해도 분장실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미련 때문일 것이다.
원작이 체호프의 연극을 중요 모티프로 삼으면서 전쟁·배우·연극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이번 공연은 한국적 분위기에 맞게 번안하면서 몇 가지의 변화를 꾀했다. 대사들이 훨씬 편한 우리의 일상어가 되었고, 전쟁은 우리의 현대사로 연결되었다. 가장 젊은 배우 D(함은정 분)가 분장실에 머물게 된 이유도 사고로 바뀌었으며, A와 B의 얼굴과 목에 있던 선명한 상흔들은 깔끔히 지우고 대사 속에만 남겨 두었다. 그럼에도 체호프의 ‘세 자매’로 끝나는 엔딩은 원작 그대로 유지했는데, 이것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우리네 인생으로 작품의 주제가 확장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인생이지만 모두 소중하다는 인생 예찬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원작의 주제를 견지하면서도 대사의 위트, 인물의 희극성을 돋보이게 한 번안은 작품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냈다. 자신이 살던 시대의 감수성이 강하게 남은 A, 애교와 사랑이 넘쳐나는 B. 두 사람의 ‘티키타카’는 오래된 부부로, 둘도 없는 절친으로 보이게 했다. 니나를 연기하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 더 외로운 C도 분장실에서만큼은 자신을 내려놓기도 하며, C에게 ‘니나를 내놓으라’ 요구하는 D도 그 모습이 밉지 않고 귀여운 것은 현실에 적합한 번안이 되기 위해 애쓴 결과이다.  
배우들도 큰 몫을 했다. 무대 연기가 오랜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송옥숙이 극의 중심을 잡았고, 서영희는 애교와 사랑스러움을 실체로 만들어냈다. 황순미의 폭넓은 연기는 분장실의 배우를 실감하게 했고, 니나가 되고 싶었던 함은정은 나이보다 한층 깊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네 배우의 앙상블을 보면서 연극은 진정 배우의 예술이라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옛날의 체호프도, 원작자인 시미즈도 그걸 강조하기 위해 희곡을 썼을지도 모른다.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회차도 궁금해진다. 앙상블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어떤 질감의 공연을 만들어낼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좋은 배우들로 구성되어 있는 공연이기 때문이다. 
완성도 높은 섬세한 만듦새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의상이다. 의상의 모양새나 질감이 작품에 적극적으로 스며들었다기보다는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처럼 겉돌았다. 작품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의상은 배우들에게 직접적인 날개가 되었을 터, 제작사의 현실적 고민과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피에이치이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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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AL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가짜를 알아보려면 진짜가 필요하다
~5월 28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이 작품을 볼 계획이 있는 분들에게 귀띔을 먼저 해야겠다. 작품을 재미있게 보려면 극을 이끌어가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보르티게른’ 위작 사건이 18세기 영국에서 있었던 실화라는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학교에서는 퇴학당하고, 직장에서는 쩔쩔매던 소년이 ‘셰익스피어 덕후’인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사인과 편지 그리고 희곡을 위조해 아버지를 속였다. 여기까지는 아이들 장난으로 그럴 만하다. 하지만 이 조잡한 ‘가짜’가 ‘진짜’처럼 퍼져 나가는 과정이나 허술한 거짓말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의 맹목을 보고 있자면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싶을 수 있으니 말이다.
모든 ‘가짜’의 욕망은 ‘진짜’와 같아지는 것이다. 그만큼 가짜는 절실하게 진짜를 추구한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위작 사건에는 진짜에 대한 욕망이 없다. 이 사건이 역사 속 다른 위작 사건과 다른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셰익스피어가 아닌, 아버지를 의식해 만든 위작이 애초부터 진짜와 비슷할 리 없다. 여기서부터 위작의 문제는 그것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의 허위의식으로 넘어간다. 가짜임을 자백해도 소용없다. 본인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사회에서 진짜와 가짜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다.
안타까운 것은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역시 같은 함정에 빠졌다는 점이다(김연미(대본·가사), 남궁유진(음악), 김은영(연출), 박윤솔(음악감독), 김수용·원종환·이경수(윌리엄 사무엘 아일랜드), 주민진·김지철·황휘(H), 임규형·황순종·김지웅(윌리엄 헨리 아일랜드)). 가짜가 진짜를 의식해야 하듯, 작품 속 허구는 실화의 본질을 의식해야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소년이 아버지를 의식하듯, 엉뚱한 상대를 의식하고 있다. 위작의 진위를 가리는 재판극, 부자간의 가족극, 내면의 거짓과 대화하는 심리극 그리고 갑작스러운 성장극까지.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창작 뮤지컬 서사의 클리셰를 다 모아놓은 것을 보면 이 작품은 소재가 품은 이야기보다 장르의 관습을 더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 위작 사건의 거짓말보다 이 작품의 서사가 더 허술해진 것 역시 이 때문이다.
결국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도 창작 뮤지컬의 고질적인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창작 뮤지컬의 눈은 재미있는 소재를 찾아내는 일에 참 밝다. 하지만 이런 소재가 이야기답게 제대로 만들어진 사례가 많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소재에 담겨있는 이야기를 캐내기 위해 고심하기보다 보기 쉽고 만들기 쉬운, 익숙한 선택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극 중 가상의 인물 ‘H’가 갑자기 내면의 자아가 되어버린 것도 이러한 선택의 대표적인 사례다. 드라마틱하게 쫀쫀하기보다 개성 없이 무난한 음악은 그 맥락의 결과이며, 이야기도 드라마도 아닌 어정쩡한 연출적 접근 역시 그 연장선상의 패착일 것이다.  
그래도 이 작품에 반짝이는 부분이 있으니 그건 바로 제목이다.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이라니! 아버지(윌리엄 사무엘 아일랜드)와 아들(윌리엄 헨리 아일랜드)과 셰익스피어(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위조품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은 재치가 반짝거린다. 이 은유적인 한 줄 요약을 이야기답게 풀어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작품은 제목이 다했다.
글 정수연(뮤지컬평론가) 사진 연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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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CE

국립무용단 ‘더 룸’
기억들로 요동치고 무너지는 방
3월 2~4일 국립극장 달오름

공간이 주인공인 경우가 있다. 카페의 한 테이블에 머물다 간 남녀 네 쌍을 그린 영화 ‘더 테이블’(2016)이 그러하다. 공간을 고정하고 나면 그곳에서 움직이다 사라진 인간들의 흔적이 부각된다. 김설진의 ‘더 룸’ 역시 마찬가지다. ‘방’에 깃든 기억을 통해 공간(space)을 장소(place)로 바꾼다. 
국립무용단과 안무가 김설진이 협업한 ‘더 룸’은 2018년 초연된 작품이다. 무용 공연의 움직임 관습에서 벗어나 현실 연기를 펼친 무용수들과 조각 케이크처럼 무대 위에 덩그러니 놓였던 방 구조물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5년 만에 돌아온 ‘더 룸’은 초연 출연진이 모두 출연할 것을 조건으로 성사되었다. 무용수들과 대화를 나누며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녹여내 구성한 작품이므로, 그들 없이는 온전한 작품이 될 수 없다는 이유이다. 레퍼토리를 물려가며 입고 벗는 데 익숙한 국립 단체 단원들이건만, 이 작품은 그들의 몸에서 좀처럼 떼어낼 수 없다.  
‘더 룸’은 영화적이다. 섬세한 공간 배치인 미장센과 장면과 장면의 관계인 몽타주가 팽팽하게 작동하고, 느린 동작과 정지화면이 인상적인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편집자 주_‘살아 있는 그림’이라는 개념으로, 특정한 신체적·물리적 순간을 퍼포먼스화한 것)을 구성한다. 피나 바우슈(1940~2009)가 춤에 몽타주를 적용하여 장면과 장면을 연결했다면 김설진(1981~)은 장면과 장면을 중첩한다.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기대고, 책을 읽고, 양말을 벗는 일상적인 장면을 겹쳐놓으니 초현실적이다.  
초현실성은 김설진이 활동했던 벨기에 피핑 톰 무용단의 대표적인 스타일이다. 현실적인 공간이 행위를 익숙하고도 낯설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 룸’은 김설진의 안무 궤적을 드러낸다. 방은 인물의 내면이다.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는 안락하고 고풍스러운 방이지만 마냥 평화롭지 않다. 
방은 자주 요동치고 무너진다. 인물들은 떨어진 액자를 걸고 아픈 기억을 옷장·자물쇠 달린 방으로 밀어 넣지만, 액자는 다시 떨어지고 기억은 소파 틈으로, 침대 밑으로 배어 나온다. 방은 여덟 명의 무용수와 ‘제9의 무용수’처럼 움직이는데, 때론 놀이동산 귀신의 집이나 해리포터 영화처럼 과도하다. 
인물들-아이를 잃고 슬픔에 잠긴 여성,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와 껍질만 부여잡은 여자, 무심한 남편과 분노로 굳어버린 아내,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 뜨겁게 타오르다 식은 연인-은 나이와 젠더가 교차된 전형들이다. 음악 선곡도 직설적이어서 연인이 춤출 땐 ‘I’m in The Mood for Love’가, 삼각관계에선 ‘You Don’t Know What Love is’가 흐른다. 전형은 힘이 세고, 호소력을 지닌다. 하지만 서사가 예측 가능하게 전개되다 보니 스릴러에서 시작해 주말드라마로 끝맺은 듯하다.   
김설진은 뛰어난 댄서임에도 움직임의 구조와 형식보단 인간의 심리와 경험에 천착하는 휴머니스트이고 ‘더 룸’은 무용수가 아닌 인간을 조명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감탄을 자아내는 무용수가 있으니 단원 박소영과 최호종이다. 최호종이 박소영을 한시도 내려놓지 않은 채 와인을 잔에 부어 마시는 나른하고 관능적인 듀엣도 대단하고, 물리법칙과 해부학 따윈 개의치 않고 펄떡거리는 최호종의 솔로도 무시무시하다. 이들이 안무가로 나란히 설 국립무용단 ‘넥스트 스텝 III’(4월 20~22일, 국립극장 달오름)이 기대되는 이유다.
글 정옥희(무용평론가) 사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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