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슬픔의 삼각형’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3년 5월 31일 4:37 오후

CINESSAY
영화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
출연 챨비 딘 크릭, 해리스 디킨슨, 돌리 드 레온
TRIANGL
OF SADNESS

‘슬픔의 삼각형’
참을 수 없는 삼각의 가벼움

사람들은 숫자 ‘3’이 안정적이고 완전하다고 말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오전과 오후와 저녁, 삼세판, 가위바위보,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삼위일체, 동방박사 세 사람, 우주의 구성을 시간·공간·물질로 구분하는 물리학, 그리고 물체의 상태인 고체·액체·기체 등. 우리의 일상에서 ‘3’은 더하거나 뺄 것 없는 안정적 구조를 가진 숫자로 널리 쓰인다.
밑면이 바닥에 착 붙은 피라미드 모양의 정삼각형은 절대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안정감을 준다. 가장 평이한 것들을 쌓아 가장 특별한 것을 꼭대기에 올리는 피라미드 구조는 먹이사슬부터 계급, 계층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생태계 혹은 인간세계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구조이기도 하다.

삼각형의 계급
인플루언서이자 모델 커플인 칼(해리스 디킨슨)과 야야(챨비 딘 크릭)는 협찬을 받아 상류층을 위한 초호화 크루즈에 승선한다. 다양한 사연을 지닌 여러 계층의 부자들과 유유자적한 휴가를 즐기던 중, 폭파 사고로 크루즈가 전복돼 여덟 명만이 살아남아 무인도에서 표류하게 되고, 생존 능력이 권력이 되는 정글 속에서 모든 관계는 뒤집힌다.
루벤 외스틀룬드(1974~) 감독의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관객을 가장 안정적인 구조처럼 보였던 피라미드 형태의 정삼각형이 가장 뾰족한 면이 바닥에 닿은 역삼각형이 되는 순간으로 초대해 멀미를 느끼게 한다. 안정적인 삼각형이 가장 위태로운 삼각형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이 흔들리고 변한다.
영화는 남성 모델들이 상반신을 벗은 채 오디션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면접관은 노골적으로 남성 모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지만 누구도 이에 반발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조기 팬티를 입은 남성 모델들 위로 흰색 페인트를 뿌리는 장면이 이어진다. 영화 속 대사처럼 실제 모델 업계는 남성이 차별받는 구조다. 여성은 ‘모델’로, 남성은 ‘남성 모델’로 불리며, 소득 역시 남성이 여성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낮다.
자본주의 그 자체를 상징하는 패션 업계에서 모델은 가장 날것의 육체가 경쟁력인 사람들이다. 주인공 칼은 아직 대접받지 못하는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남성 모델이지만, 야야는 패션쇼의 피날레를 장식할 만큼 영향력 있는 모델이자 인플루언서이다. 야야가 모델로 참여한 패션쇼에서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칼은 영향력 있는 누군가의 자리를 위해 뒷자리로 쫓겨나고 만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슬픔의 삼각형’은 스트레스 또는 노화로 인해 눈썹 사이에 생기는 깊은 주름을 의미한다. 칼은 왠지 주눅 들고, 슬퍼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다. 오디션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칼에게 슬픔의 삼각형을 지우라고 말한다. 더치페이에 대한 모델 커플의 논쟁은 돈과 관련된 모든 계급 갈등의 프롤로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얼굴도 모공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면 추해지는 것처럼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감독은 가장 화려하고 부유할 것 같은 패션 업계 종사자들 사이의 계급과 그 갈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관객에게 영화의 주제를 환기한다. 이후에 더 끔찍한 경험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의 삼각형
칸 영화제에서 두 번의 황금종려상을 받은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에게 2017년 첫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영화 ‘더 스퀘어’는 미술계의 위선과 모순을 폭로했다. 이번에는 패션 업계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영화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와 계급에 대해 이야기한다. 비료나 무기를 팔아 각자의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최상류층만 탑승하는 크루즈에 칼과 야야는 ‘#협찬’으로 승선한다. 이들은 크루즈에서의 모든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 해야 한다.
만찬 자리에서 시작된 구토, 변기가 폭발해 오물을 뿌리는 장면은 자본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토악질이다. 비위가 약한 관객이라면 조금 견디기 힘든 장면이기도 하다. 크루즈 선장과 러시아 출신의 비료 회사 사업가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마르크스와 레닌, 레이건과 케네디를 인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 세계를 상징하는 크루즈의 선장은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러시아 출신의 사업가는 자본주의를 신봉한다.
크루즈 위 부자들은 진상인 듯 아닌 듯 살짝 애매한 경계에 있지만, 대부분 사악하거나 무식하다는 단점을 드러낸다. 외스틀룬드 감독은 ‘인간은 평등하다’는 교과서 속 명제가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계속 강조한다. 영화 속 노동자들은 선량한 척하는 부자들의 변덕 때문에 매번 불편한 순간을 참아야 한다. 노동자 사이에도 계급은 존재한다. 부자들을 대면할 수 없는 유색인종 노동자들은 지하에서 자신들을 숨기고 산다.
어디선가 나타난 해적이 크루즈를 습격하면서 수류탄을 만든다던 부부는 자신들이 만든 수류탄에 죽고, 배는 난파된다. 이들이 무인도에 표류하며 영화는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상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크루즈에서 무인도로의 이동은 성 역할이 전복되고, 권력이 이동되는 단계이기도 하다. 어떠한 계기로 인해 노동 계층인 애비게일이 무인도에서의 생활을 주도하게 되고, 그가 칼과 야야 사이에 끼어들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기묘한 삼각관계가 된다.
윌리엄 골딩(1911~1993)의 소설 ‘파리대왕’을 연상시키는 표류 생존기가 된 마지막 에피소드는 ‘슬픔의 삼각형’이라는 제목 그대로 삼각구조가 지닌 완벽함이 아닌, 삼각구조가 드러내는 불평등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밑줄을 죽죽 그어 놓은 책처럼 주제와 표현방식이 분명하지만, 세련된 은유와 숨겨둔 이야기를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다소 절제력이 떨어지고 거친 느낌을 준다.
관객을 웃게 하지만, 웃음 뒤에 감춰진 고민 때문에 마냥 해맑지만은 않은 것이 외스틀룬드 감독 영화의 특징이다. 하지만 ‘슬픔의 삼각형’에서는 풍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래서 혐오를 위한 것인지, 풍자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경계가 모호한 순간, 지루해지기도 한다. 미천한 부자의 몰락과 계급 전복이라는 반전 역시 조금 산만하다.
연인이 연인이 아니고, 무인도가 무인도가 아닌 기묘한 엔딩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이야기를 풍자가 아닌 해프닝으로 무화시킨다. 어쩌면 어떤 변화도 그들에게 찾아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그러니 아무리 자본주의를 풍자해 봐야 우리의 현재는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가장 요란스럽게 이야기하는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본 칼럼의 제목은 밀란 쿤데라(1929~)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변용하여 사용했습니다.

OST

변화무쌍하고 다이내믹한 영화의 분위기처럼 클래식 음악부터 전자음악, 헤비메탈로 이어지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음악들로 가득하다. 애비게일과 야야가 엘리베이터를 발견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프레드 어게인(1993~)의 ‘Marea’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 맴돌 정도로 귀에 감긴다.

트랙 리스트
01 Born Free by M.I.A.
02 The Ocean by Linnea Olson
03 Thank You (Asle Disco Bias Remix Edit) by Asle
04 String Quintet in E Major Op. 11-5 (III. Minuetto) by Budapest Strings, Béla Bánfalvi
05 Lady (Hear Me Tonight) by Modjo
06 New Noise by Refused
07 Marea (We’ve Lost Dancing) by Fred Again
08 Sonnerie de St. Geneviève Du Mont-De Paris by Le Concert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했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했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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