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3년 6월 1일 8:52 오전

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Editor’s Note

박재홍의 성장, 바그너의 확장
마르쿠스 슈텐츠/서울시향(협연 박재홍)
5월 11일 롯데콘서트홀
서울시향의 수석 객원지휘자를 역임한 마르쿠스 슈텐츠가 2년 만에 다시 서울시향의 지휘봉을 잡았다. 2021년 부소니 콩쿠르 우승자 피아니스트 박재홍과 함께였다. 이번 무대에서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바그너(1917~1966) ‘반지’를 헨크 더블리허르(1953~)의 편곡 버전으로 연주했다.
박재홍은 그간 굵직한 무대에 서오면서 활동 반경을 넓혀왔다. 지난해 트럼피터 호칸 하르덴베리에르의 내한이 코로나로 불발되면서 그를 대신해 서울시향과 첫 데뷔를 했다. 지휘자 홍석원, 정명훈 등의 지휘로 국내 주요 오케스트라와도 호흡을 맞췄다. 그에게도 오케스트라와 넓은 무대가 익숙해지는 시점이다.
박재홍은 빠르게 시작한 도입부를 지나 정돈된 음색으로 차분히 음악을 끌어갔다. 하지만 음악이 진행될수록 금관과 목관은 좀처럼 박재홍의 연주에 호응하지 않았다. 박재홍은 살짝 처지는 악기군에 소리를 맞춰갔다. 낭만적인 선율의 표현력은 한결 자유로운 듯했다. 소리가 무대에만 머물렀던 지난해 서울시향과의 무대와는 대조적으로 밀고 당기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드러냈다. 2부의 바그너 작품 때문에 비대해진 현악기군 덕분에 음악의 최절정은 화려했다.
바그너는 ‘니벨룽의 반지’로 ‘무지크드라마(Musikdrama)’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며 오페라와 관현악 작품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성악 파트보다 관현악 부분이 비대하게 강조되어 관현악 그 자체만으로도 감상의 여지가 충분하다. 4부작의 작품을 모두 들으려면 16시간이 걸리지만, 네덜란드 작곡가이자 퍼커셔니스트인 헨크 더블리허르는 70분으로 축약했다. 전주곡의 크레셴도 효과가 미비해 아쉽긴 했지만, 이어지는 곡들에서는 슈텐츠와 서울시향의 노련한 호흡이 돋보였다. 현의 밀도 있는 소리가 작품을 지탱해 냈다. 그리고 그 지탱되는 음들은 겹겹이 이어지는 목금관악기들의 소리를 앞으로 밀어냈고, 밀어냄으로 음악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금관이 부각되는 부분인 만큼, 말끔히 정돈된 관의 음색이 인상적이었다. 파이프오르간 옆에서 솔로를 훌륭히 해낸 수석 단원의 연주도 잊지 못한다. 글 임원빈 기자 사진 서울시향


갈채 속의 현대음악
앙상블 앵테르콩탱포랭 리사이틀
4월 26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인터미션 없이 오직 현대음악만을 열 곡 연속으로 연주.’ 이 문장에 설렌 이들이 이미 이날의 현장을 채웠을 것이다(이 공연은 예술의전당 전관 개관 30주년 특별음악회였다). 1976년부터 이어진 악단의 긴 역사를 풀어낼 수도 있겠지만, 프로그램북을 쭉 읽는 것만으로도 이들이 어떤 방향을 추구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열 곡 중 네 곡은 여성 작곡가 작품이며, 작곡가들의 국적은 6개국이고, 창립자인 피에르 불레즈(1925 ~2016)를 제외하고는 모두 생존한 작곡가이다.” 방한의 인사로써 한국 작곡가의 작품을 세 개나 포함했으니, 다양성과 친절함 어느 한쪽 부족함이 없다.
첫 곡인 불레즈의 ‘파생 1’을 연주하기 위해 강혜선(바이올린)·르노 데자르뎅(첼로)·엠마뉴엘 오펠(플루트)·제롬 콩뜨(클라리넷)·사무엘 파브르(타악기)·디미트리 바실라키스(피아노)가 무대에 올랐다. 수직적 힘을 가진 빠른 아르페지오가 수평적 힘을 가진 글리산도와 합쳐져 음악적 도형을 그리는 듯했으며, 두 목관악기, 두 현악기, 두 건반악기가 각각 팀을 이루는 듯이 움직였다.
이어진 아가타 주벨(1978~)의 솔로 베이스드럼을 위한 ‘모노드럼’은 한 사람의 타악기 주자가 연극적 연주를 펼치는 작품이었다. 말렛(타악기 스틱)으로 공기를 휘젓는 도입부터 쉬이 해석도 할 수 없는 탁구공을 북 위에 뿌리는 퍼포먼스, 그리고 통상적인 베이스드럼 연주 마무리까지. 한 악기와 한 명의 주자로 가능한 모든 요소를 압축해 놓은 합리적인 작품으로, 사무엘 파브르는 이를 매력적으로 성공해 냈다.
홍성지(1973~)의 ‘에스타브로산’은 처음에 제시된 몇 개의 제스처가 곡 전체에 변형되어 반복되는 작품이었다. 다이내믹이 제스처에 포함되기 때문에 동일하게 연주하여 곡의 진행을 매끄럽게 이어가는 것이 중요했는데, 모든 연주자가 이를 훌륭하게 해냈다. 격정적인 성격으로 변하는 둘째 섹션에서도 처음 제스처를 놓치지 않고 들려주어 작품에 계속 집중할 수 있었다.
마지막 작품이었던 스티브 라이히의 ‘박수 음악’은 여섯 명의 연주 이후, 관객과 함께한 앙코르로 더욱 완성도가 올라갔다. 무대 위로 올라오라는 손짓에 하나둘씩 올라가는 관객은 이날의 연주가 얼마나 안락한 기분을 선사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글 이의정 기자 사진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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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슈베르트와 방황하는 베토벤
손정범 피아노 독주회
5월 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몇 해 전, 대학로 예술가의 집 마룻바닥에 앉아 손정범의 연주를 처음 들었다. 그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의 진동은 바닥을 타고 와 피부에 닿을 만큼 강렬했다. 엄청난 힘과 가차 없이 질주하는 속도. 그가 보여준 새로운 베토벤은 ‘감탄’의 개념을 능가하는 ‘경악’이었다.
공연장으로 향하며 간담이 서늘해졌던 그 무더운 여름날이 떠올랐다. 독주회 프로그램으로 오른 세 레퍼토리,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D960과 슈만 ‘아라베스크’,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 중 가장 마지막 작품을 기대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지나친 루바토와 처연한 음색으로 자칫 지루함에 빠지기 쉬운 슈베르트 소나타의 맹점을 손정범은 일관된 해석으로 헤쳐나갔다. 하나의 관점을 중심에 두자, 변덕스러워 분절된 패시지들이 역할을 부여받아 연결됐다. 덕분에 외로워 곧 고독사할 것 같은 슈베르트의 초상 대신, 적어도 며칠은 더 건강하게 생을 보낼 의지가 있는 청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2부 시작은 순식간에 사라진 환상 같은 ‘아라베스크’였다. 마치 인상주의의 작풍을 떠올리게 한 해석이 뒤이은 베토벤 연주를 위한 교두보처럼 느껴졌는데, 이는 손정범의 베토벤 마지막 소나타 연주가 현대음악 연주에서 느낄 법한 관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연주 순서는 두 낭만 시대 작품에서 고전 시대 작품으로 이어졌지만, 손정범의 연주 스타일은 반대로 낭만을 거쳐 인상주의, 현대음악으로 거슬러 올라간 셈이었다. 건반이 나무에 닿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강렬한 트릴은 들리지 않은 채로 작곡을 이어갔던 베토벤의 내면 속 음향의 급진성을 연상케 한다. 미니멀리즘에 낭만적 기승전결을 더한다면 이런 음악일까.
기대했던 폭발적인 비르투오소, 그리고 이날 새롭게 발견한 그만의 설득력 있는 음악 접근 방식까지. 몇 년이 흘러 다시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공연장으로 향할 어느 날 떠오르게 될 인상적인 봄날이었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에투알클래식


희망, 절망 속에서 길을 만드는 힘
뮤지컬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
5.2~7.23 플러스씨어터
지하 1층에 위치한 공연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벽에 붙어 있는 부적과 무구(巫具)에 괜히 등골이 오싹해졌다. 싸늘하다. 분명 유쾌하고 재밌는 극이라고 들었는데, 스릴러 뮤지컬이었던 걸까. 긴장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니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입체적으로 연출한 쿠로이 저택이 극에 대한 궁금증을 한층 더 자아냈다. 곧이어 시작된 ‘선관귀신’의 재치 있는 안내 방송과 함께 극은 그제야 그 유쾌한 본색을 드러냈다.
뮤지컬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연출 김동연, 작곡 김보영)는 일제강점기, 형을 잃고 모든 희망을 상실한 ‘해웅’(이주순 분)이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들어간 폐가 쿠로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특정한 장소에서 죽은 뒤, 그곳을 배회하는 지박령인 ‘옥희’(홍나현 분), 그리고 각각의 소망을 지닌 귀신들을 만나며 소동이 일어난다.
암울한 시대 배경과 귀신이라는 소재는 언뜻 보면 어두운 내용을 연상케 하지만, 팝·국악·보사노바·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1인 2역을 소화하는 배우들의 개성 넘치는 연기 그리고 무대를 십분 활용하는 재치 있는 안무는 공연 내내 객석을 웃음으로 물들였다. 특히, 무대 연출에 공을 많이 들인 흔적이 돋보였다. 귀신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 홀로그램 맵핑 영상과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조명, 입체적인 저택의 구조 등 다채로운 무대 구성은 극의 재미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
이 작품은 ‘2020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되어 지난 2021년 첫선을 보였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였지만, 관객의 환호와 입소문에 힘입어 지난해 제6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작품상·극본상·음악상 3관왕을 거머쥐기도 했다.
‘그냥 막연한 믿음/지금보다 좋아질 거란 상상/내가 가는 길이 맞다는 확신/언젠가 될 거란 희망’이라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극은 팬데믹이라는 어두운 시기를 지나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소리 내어 웃을 수 있는 지금, 다시 한번 저택의 문을 활짝 열고 관객을 맞이한다. ‘믿음, 상상, 확신, 희망’은 이제 막 일상을 되찾아 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단어가 아닐까. ‘지금보다 좋아질 거란 상상’이 필요한 지금, 희망을 찾아 쿠로이 저택에 방문해 보자.
글 홍예원 기자 사진 주식회사 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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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AL MUSIC

구자범/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베토벤 교향곡 ‘합창’을 우리말로 듣다
5월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독일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한스 첸더(1936~2019)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작곡적 재해석’이라는 자기 작품에 대한 설명을 질문으로 마무리했다. “슈베르트의 원전이 갖고 있던 힘과 최초의 충격을 순수하게 되살리는 것이 가능할까?” 이 말은 오늘날 고전음악으로부터 재현하려는 것이 ‘소리’가 아니라 ‘감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이 처음으로 연주되었을 때의 압도하는 감흥을 오늘날에도 재현하고자 하는 것. 만약 조금이라도 성공한다면, 그 작품은 고전의 생명력을 이어가는 ‘주요 작품’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이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에도 적용된다. 200년 전 오스트리아 빈 사람들이 받은 충격을 지금의 한국에도 재현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이 수십 번씩 연주되는 것은 이를 성공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를 의심할 사건이 있었다. 대구에서 종교화합자문위원회가 종교 편향을 이유로 이 작품의 연주를 금지했다. 이 사건은 인류의 걸작이라 칭송받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 아직 한국에서 공감을 얻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프리드리히 실러가 인류의 자유와 형제애의 숭고함을 위해 반영한 당시 유럽의 문화적 토대도 종교로 오해되었다는 뜻이다.
바로 이 시점에 이 작품의 가사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불리었다는 것은 놀랍다! 지휘자 구자범은 시인의 근원적 의도에 접근하여 ‘환희’를 ‘자유’로 바꾸고, 한국의 문화적 토대에서 이해되도록 단어들을 교체했다. 앞서 언급한 지휘자 첸더의 관점에서 원전의 재현이다.
교향곡이 음악극으로 느껴지는 효과도 얻는다. 청각적으로 언어를 이해할 수 없을 때, 감상자는 기악곡의 청취 습관으로 감상한다. 하지만 배역이 있는 우리말 가사를 접한 감상자들은 4악장을 음악극으로 인지하며, 기악을 가사와 상황의 표현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각 장면의 의미를 설명한 것 또한 크게 주효했다. 이로써 기악도 지금까지의 경험과 다르게 수용된다.
또 다른 주안점은 원전을 기초로 한 음악적 해석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극적인 효과가 두드러졌으며, 베이스트롬본과 팀파니의 존재감이 눈에 띄었다. 현악과 목관의 음량이 작아 악기 간 불균형이라는 부작용을 낳았지만, 각 악기군을 상상의 역할로 인지하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즉, 팡파르에 가까운 금관은 하늘의 준엄한 목소리, 강력한 타격을 들려준 팀파니는 하늘의 위엄, 음악을 이끄는 현악은 지상에서 역사를 이어가는 인류, 목가적인 목관은 자연의 소리 등이었다. 극적 진행은 음악적 표현 범위를 넓혀, 감상자가 음악에 몰입하게 했다. 또한 하늘과 인간을 노래한 4악장의 가사와도 은유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아쉽게도 4악장에서 현악과 목관이 어긋나 독창자들이 맞출 수 없게 되었다. 멈추고 다시 연주하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앞선 흐름을 무리 없이 이어갔다. 그리고 독창자를 무대 왼쪽 끝에 배치했는데, 독창자의 노래를 잘 들을 수 없는 관객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은 우리말 가사로 부르는 의미가 저감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 공연은 우리 문화를 토대로 한 한글 번역이 서양의 고전을 우리의 고전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임을 보여주었으며,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작업임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영음예술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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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범(지휘)/오미선(소프라노)·김선정(메조소프라노)·김석철(테너)·공병우(바리톤)/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국립합창단·참콰이어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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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AL MUSIC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8중주 오디세이’
축제에 걸맞은 세대 대통합!
5월 7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12일간의 실내악 여정(4.26~5.7)을 마무리하는 제18회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의 폐막공연은, 축제의 개막공연을 알리기도 했던 알프호른(alphorn)의 ‘팡파레Ⅴ’로 시작됐다. 중후한 관악기 음색으로 공연장에 들어선 관객에게 초대의 느낌을 선사하며, 주의를 환기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번 축제의 주제는 ‘다다익선’이었다. 예술감독 강동석의 말에 따르면 6중주 이상의 큰 규모 앙상블을 다수 감상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폐막공연의 주제 역시 ‘8중주 오디세이’로, 큼직한 규모 때문에 쉽게 만나기는 어려운 8중주 작품 세 곡이 준비됐다.
첫 곡은 요아힘 라프(1822~1882)의 현악 8중주 C장조 Op.176으로, 한수진이 제1바이올린을 맡고, 비올라에 김상진·서수민, 첼로에 강승민·이상은 등이 출연했다. 첫 주제부터 은근히 빠져들 수 있는 낭만적 선율을 만날 수 있었고, 실내악 ‘축제’에도 잘 어울리는 밝은 작품이었다. 앙상블에서는 바이올린 넉 대보다는, 비올라와 첼로 파트가 좀 더 탄탄하고 유기적인 결합을 보여주었다. 특히 첼로의 강승민은 고음부와 저음부를 꽉 잡아주는 대들보가 되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제1바이올린의 한수진은 저음 영역에서 특히 매력적인 음색을 만들었다.
두 번째 곡은 하인리히 호프만(1842~)의 현악, 플루트, 클라리넷, 바순과 호른을 위한 8중주 Op.80으로 8인의 연주자가 살금살금 튜닝하는 시점과 바이올린의 첫 보우부터 행복감이 들었다. 올 축제의 공연 중 ‘숨겨진 보석’이라는 제목을 떠올리게 하는 곡이었다. 데이비드 맥캐럴(바이올린), 심효비(비올라), 박진영(첼로), 윤혜리(플루트), 채재일(클라리넷), 로랑 르페브르(바순)는 1·2악장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빼어난 음색을 들려주었고, 특히 2악장의 8인 모두 합치된 해석은 듣는 이에게 짜릿함을 안겼다. 3·4악장 자체가 가볍게 흘러가는 선율을 가졌는데도, 관악기(특히 플루트)의 섬세하고 맑은 음색은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천진한 여주인공과 함께 노래하는 나뭇가지의 새들처럼 느껴졌다.
2부에는 강동석 예술감독이 제1바이올린을 맡은 멘델스존 현악 8중주 Op.20이 연주됐다. 16세 멘델스존의 천재성과 특유의 서정적 선율, 문학적 감수성이 넘치는 곡이다. 두 개의 현악 4중주가 함께 하는 것 같은 이 편성을, 강동석은 ‘바이올린-비올라-첼로-첼로-비올라-바이올린’ 순서로 무대에 세웠다. 첼로 두 대를 중심으로 거울처럼 선 것인데, 이날의 연주 스타일에는 잘 맞는 배치였다. 특히 가운데 맞붙은 첼리스트 조영창과 문태국은 유니즌으로 한 선율을 연주할 때 기분 좋은 일치감을 선사했다. 문태국의 ‘어른스러운’ 앙상블 타이밍이, 경륜의 첼리스트와 짝을 이루어, 음악감독이 추구하는 ‘여러 세대의 어울림’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앙상블을 감싸주는 강동석의 아름다운 선율이 곡 내내 귀를 사로잡았고, 마치 모두가 하나의 뇌로 움직이는 듯한 협응력을 보여주었다.
앙코르로는 클래식 음악이 아닌 마임이스트 이레네우스 크로즈니(1988~)의 짧은 두 가지 공연이 준비됐다. 웃음으로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좋았지만, 클래식 앙상블의 여운을 길게 가져가고 싶었던 관객이었다면, 공연에 포함된 팝 음악의 편린이 다소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겠다. 글 양경원(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두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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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클로시 페레니 첼로 리사이틀
자애로운 음색, 그 소리의 미소
5월 1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963년 15세의 나이로 카살스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카살스에게 발탁됐다. 거장의 열정적인 지도를 거치며 세계적인 명성의 첼리스트로 발돋움했다. 헝가리 출신 첼리스트 미클로시 페레니(1948~)다. 음반 애호가들에게 귀한 대접을 받는 이 거장은 여러 차례 가졌던 내한 공연을 모두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008년 언드라시 시프(1953~)와 함께 베토벤 첼로 소나타를 선보인 연주에서는 30년 넘게 우정을 유지한 두 대가가 조화와 기품을 펼쳤다. 그 10년 뒤 2018년 서울시향과 협연은 더욱 놀라웠다. 차이콥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와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협연한 페레니는 부드럽게 힘을 빼며 관대하고 아름다운 음색을 들려줬다.
그로부터 5년 뒤인 5월 14일. 미클로시 페레니가 피아니스트 피닌 콜린스와 연주한 베토벤 첼로 작품 시리즈 중 두 번째 공연에 참석했다(이번 공연은 예술의전당 전관 개관 30주년 특별 음악회로, 11일 같은 장소에서 페레니는 베토벤의 소나타 1·3·4번과 ‘마술피리’ 변주곡을 연주했다). 구부정한 노 거장이 천천히 입장했다. 46세의 아일랜드 피아니스트 피닌 콜린스는 상대적으로 젊은 청년처럼 보였다. 노년과 청춘이 교차하는 가운데 첫 곡은 베토벤의 ‘유다스 마카베우스’(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으로, 페레니의 자연스러운 비브라토는 통통 튀는 콜린스의 피아노와 대조를 이뤘다. 빠른 악구에서는 감칠맛 나는 표현이 돋보였다. 여유로운 페레니의 첼로 고음역은 이상하게 애처로움을 자아냈다.
이어진 첼로 소나타 2번에서 페레니는 위로하듯 따스하면서도 쓸쓸한 음색을 들려줬다. 콜린스의 피아노는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웠고, 촉각을 곤두세우며 신중을 기했을 때의 음색이 흘러나왔다.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공감이 가는 연약함이 심금을 울렸다. 섬세하게 시작한 페레니의 첼로는 격렬한 부분에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노래를 들려줬다. 1부 마지막 곡이었던 ‘마술피리’(모차르트) 중 ‘사랑을 느끼는 남자들은’ 주제에 의한 7개의 변주곡에서는 하나하나 또렷하게 노래하며 친숙한 멜로디에 기품을 부여했다.
2부의 호른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첼로 버전)에서는 페레니가 들려주는 노년의 경험과 경륜, 지혜가 콜린스가 발산하는 젊음의 패기와 도전과 어우러졌다. 가라앉은 앙금과 떠오른 쭉정이를 뺀 정수가 그의 노래 속에 들여다보였다.
끝 곡은 첼로 소나타 5번이었다. 적당한 온도가 된 불판처럼 여기서 두 연주자가 발산하는 온기는 작품에 필요한 만큼의 수치에 도달한 듯했다. 특히 느린 악장에서는 기나긴 애수가 하나도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하게 스며들었다.
페레니는 요리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오래된 단골 식당의 셰프처럼 편안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연주를 들려줬다. 이전 내한 때의 경이로움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토록 자연스러운 연주를 무대에서 듣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매너 없이 어수선했던 객석 분위기는 옥의 티였다. 그런데도 진상 고객을 처리하는 베테랑 점원의 미소 같은, 페레니의 프로다운 자애로움이 빛난 연주였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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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AL MUSIC

이지혜·김다솔 듀오 리사이틀
앙상블의 기교가 소나타로 발현될 때
5월 11일 예술의전당 인춘아트홀

5월 11일 저녁, 공연에 참석한 소수의 관객은 살롱 음악회에 함께하는 행운을 누렸다. 무대와 객석 간 거리가 가깝고 단 100석의 객석을 보유한 인춘아트홀은 연주자들에겐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관객들에겐 연주자의 호흡 하나하나까지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바로 그곳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와 피아니스트 김다솔은 베토벤이 쓴 음표 하나하나의 세밀한 뉘앙스까지 전달해 낸 섬세한 연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이번 공연은 예술의전당 기획 ‘베토벤 시리즈’의 일환으로 5월 9~18일 6개 공연 중 하나였다)
아마도 베토벤이 살던 그 시대, 베토벤을 후원한 귀족들이 주최한 수준 높은 살롱 음악회에서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대형 공연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내밀한 즐거움이 더 긴 여운을 남겼다. 이번 공연에서 연주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는 6·8·10번이었다. 유명한 소나타들을 살짝 피해 간 듯한 선곡이지만, 오히려 이 작품들이 이지혜가 지닌 개성을 드러내기에 더 적합해 보였다.
공연 전반부를 연 소나타 6번이 아름다운 ‘노래’ 같았다면 소나타 8번은 일종의 ‘유희’로 다가왔다. 어떤 음이라도 의미 없이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특히 소나타 6번의 느린 악장에서 이지혜의 바이올린 활은 매 순간 적절한 힘과 속도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마치 오페라 무대 프리마돈나의 아리아처럼 노래하듯 연주했다. 또한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제2바이올린 악장으로서, 연주 경험을 쌓은 이지혜의 연주에선 실내악에 대한 탁월한 감각이 엿보였다.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때로는 음악을 리드해가며 조화를 이룬 앙상블이 일품이었다.
잔향이 적고 객석과 매우 가까운 인춘아트홀에선 연주자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기에 두려운 무대이지만, 이지혜에겐 그런 점이 오히려 그를 더 돋보이게 했다. 울림이 이렇게 적은 홀에서도 이처럼 미묘한 비브라토와 다양한 성격의 운궁으로 음을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잘 드러났기 때문이다. 공연 내내 이지혜의 오른팔이 구사하는 운궁법의 섬세함이 돋보였고 왼손가락으로 구사하는 풍부한 비브라토가 다채로운 맛을 더했다.
소나타 8번 연주는 단연 돋보였다. 이지혜와 김다솔은 톡톡 튀는 리듬의 맛을 한껏 살려낸 연주로 관객들에게 음악의 즐거움을 전했다. 민첩한 리듬 표현, 순간순간 위트를 발휘하는 연주는 베토벤 음악에 맛깔스러움을 더했다.
공연 후반부에 연주된 소나타 10번은 베토벤의 소나타 중에선 다소 독특한 곡이다. 베토벤은 이 곡을 연주할 바이올리니스트 피에르 로드의 고전적인 스타일을 감안하여 비교적 고요하고 명상적인 성격으로 소나타 10번을 작곡했다. 그러나 이지혜와 김다솔은 소나타 10번에 대한 고정관념에 묶이지 않았다. 두 음악가는 일견 고요한 듯 보이는 이 소나타에서 숨은 재치와 아름다운 노래를 끄집어내며 깊은 인상을 주었다. 역시 음악 작품의 성격은 연주자가 그 곡을 연주하는 그 순간에 정해진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글 최은규(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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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itional MUSIC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역(易)의 음향’
관현악적 시나위, 새로운 역사를 쓰다
5월 13일 국립극장 해오름

원일(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은 지난 4년 동안 ‘경기도립국악관현악단’을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로 개명하고 이른바 ‘시나위-하기’를 줄곧 강조해 왔다. 솔리스트 즉흥연주자들끼리 이루어지는 프리 뮤직과 달리,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음악의 주인이 되는 ‘시나위-하기’는 그 자체가 실험과 모험이다.
이번 ‘관현악적 시나위’는 규모 면에서도 역대급이었을 뿐만 아니라 연주자들의 창작력과 연주력, 즉흥성 등을 만개시켜 70명 단원 모두를 솔리스트로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 각각의 곡들은 서로 다른 차별성과 개성적인 음악을 통해 일련의 즉흥음악 앙상블이 서로 비슷해지는 음향적 결과물의 단조로움을 피해 나갔고, 공연 전체가 풍성한 들을 거리·볼거리를 다채롭게 제시해 주었다.
전통적인 지휘자나 작곡가, 혹은 음악감독과 다른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는 ‘리더’의 역할도 흥미로웠다. 6명의 리더는 다양한 레퍼런스를 팀원에게 제공하여 연주자들이 사용할 재료와 아이디어를 환경적으로 조성해 주었다. 나아가 연주자들의 단편화된 음형에 구조와 스토리를 부여하는 촉진자로서의 리더 역할을 새롭게 자리매김하였다.
‘27개의 파랑’(리더 송지윤·이예진)은 첫 번째 섹션에서 미니멀한 리듬 위에 강세를 주는 선율 악기들의 움직임으로 곡의 성격을 살려냈다. 곡이 전개되면서 정가 앙상블과 수제천 등이 거대한 클러스터 위에 대위적으로 장대하게 풀어지면서 물결에 대한 각양각색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구현하였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주목을 끈 ‘시나위 브리콜라주’(리더 김도연·원일)는 ‘지휘 즉흥’이라는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한 즉흥음악방법론을 도입해서 국악관현악단과 같은 대규모 단위에서도 단원의 즉흥성과 연주력을 표출하되 자유로우면서도 지휘와 단원이 일체화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였다.
‘호호훗’(리더 지박·장태평)은 풍물굿의 개인놀음과 공동체성 등에 기반한 연희적 놀이성을 주제로 하였는데, 악가무 일체의 전통적인 신명을 현대예술의 퍼포먼스에 잘 녹여내어 청중의 환호성을 끌어냈다. 전 단원이 함께 한 마지막 순서 ‘합생(合生)’은 3팀의 리더가 독주악기를 직접 연주하여 즉흥 연주자로서의 면모를 확인시켜 주었고, 총주에서는 김도연의 즉흥 지휘와 3팀의 전 단원이 유기적으로 교섭하면서 관현악적 시나위의 거대한 완전체를 구현해 냈다.
고정된 악보의 재현이 아니라 연주자들의 능동적인 ‘음악하기(Musicking)’로 이루어진 이번 공연은 “길은 가면 뒤에 있다”는 황지우 시구처럼 사건이 구조를 만들고 과정이 곧 작품임을 웅변하고 있다. 이 변화의 음향이자 과정의 음향이야말로 ‘역(易)의 음향’이고 오늘 여기, 우리가 찾는 새로운 음향체 아닐까?
무엇보다도 이번 공연은 수평성과 수직성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고,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인 창의성과 역동성이 어떻게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지 잘 보여주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관현악으로도 ‘시나위-하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이번 공연은 국악관현악의 역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글 이소영(음악평론가) 사진 경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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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ATER

연극 ‘시티즌 오브 헬’
지옥을 만드는 이 누구인가
4.21~5.28 대학로 자유극장

2017년 국내 초연 이후, 여러 차례 공연된 인기 뮤지컬 ‘미드나잇’은 구소련 국가 중 하나였던 아제르바이잔의 작가 아판디예프 엘친(1933~2018)의 희곡 ‘지옥의 시민들(Citizens of Hell)’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젊은 관객층의 꾸준한 호응 속에 여섯 번이나 무대에 오른 뮤지컬의 인기에 힘입어 이번에는 원작이 정통연극 형식으로 무대에 올랐다. 두 작품 모두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 소비에트 연방을 배경으로, 살벌한 시대를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화된 공포를 비춘다. 다만 지명과 인명 등을 추상화·단순화함으로써 주제의 보편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뮤지컬과 달리, 연극은 오히려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당대의 비극을 역사적 맥락 속에 더 생생하게 구현한다.
극은 스탈린의 대숙청이 절정에 달했던 1937년 마지막 날 밤, 한 평범한 공산당원 부부의 집에 누군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마치 도청이라도 한 듯 남자(맨)와 여자(우먼)의 은밀한 비밀을 속속들이 들추는 ‘게스트’의 폭로로 인해 결국 평범해 보이는 이 부부도 자기가 살기 위해 이웃과 동료, 친구를 고발한 밀고자였음이 드러난다. 늘 겁에 질려 있고, 선량해보이기까지 했던 이들에게 이런 비열한 면이 있었다는 것은 극을 이끄는 반전 요소인 동시에 당대를 살아갔던 시민들의 뒤틀린 내면을 은유하는 설정이다.
한편 이 작품은 극중 남자와 여자가 이른바 ‘조용한 협조자’였음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 누구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음을 강조한다. ‘게스트’에 의해 선량해 보이는 남편이 동료를 고발해 승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그 동료 역시 몇 달 전에는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넣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폭로로 인해 극의 마지막 즈음에 가면, 대체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 구분이 모호해진다. 이제 더 이상 누가 밀고자이고 가해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는 것은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지옥’ 같은 현실뿐이다.
‘게스트’의 정체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그리는 뮤지컬과 달리, 연극은 이 인물을 선명한 ‘사탄’의 형상으로 등장시키고 노골적으로 신과 구원, 지옥에 대해 언급하게 만든다. ‘게스트’가 명백한 사탄으로 등장하는 것은 극중 그가 거울처럼 비추는 남자와 여자 모두 사탄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지금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이 사탄이 사는 지옥과 다를 바 없다는 것도 드러낸다.
폭로 끝에 과연 누구를, 무엇을 믿어야할지 알 수 없게 된 남자와 여자는 절망 속에 무너진다. 배신과 거짓말로 뒤덮여 울부짖는 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지옥과 다를 바 없고, 새삼 이 작품의 제목 ‘지옥의 시민들’을 환기시킨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지옥이란 불구덩이가 타오르는 공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지칭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친구든 이웃이든 고발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곳, 이곳이 지옥이 아니면 어디일까. 그런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는 스탈린과 비밀경찰의 지옥에 갇힌 이들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는 ‘지옥의 시민들’인 것이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똑같은 순환적 구조, 앞쪽과 뒤쪽 공간이 자기복제를 하는 듯한 무대 또한 이 시작도 끝도 없는 무간지옥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글 김주연(연극평론가) 사진 더웨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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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박찬(게스트)/이기현(맨)/김정민·강해진(우먼)/오루피나(연출)/정명주(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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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CE

고블린파티 ‘현대에만 가능한 다소 발레스러운 한국의 춤’
몸과 분리되지 않는 장르는 족쇄, 혹은 무기
5월 12·13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춤의 3분법’은 우리나라 무용계의 구조이다. 서양의 예술 춤 개념이 도입된 이후, 서서히 한국무용·현대무용·발레가 극장 예술춤의 대표 장르로 자리 잡았다. 예술의 경계마저 흐려진 오늘날이지만 극장춤을 세 장르로 구분 짓고 이를 ‘순수무용’이라 부르며 여타 춤 장르와 구분하는 관습은 질기게 남아있다.
하여 고블린파티의 ‘현대에만 가능한 다소 발레스러운 한국의 춤’은 이 3분법을 정면 돌파한다는 점에서 대담하고 영민하며 성찰적이다(고블린파티는 ‘현대무용단’이다). 그들의 전략은 힘 빼기다. 익살스러운 제목에서 드러나듯 거대담론을 지극히 가볍고 부분적인 방식으로 해체한다. 무용단의 세 무용가(이경구·지경민·임진호)가 각각 현대무용(이재영), 발레(이루다), 한국무용(최진욱) 무용가와 짝을 이뤄 듀엣을 선보인다. 장르의 만남을 개인의 만남으로 환원한 것이다. 여우 탈을 뒤집어쓴 진행자가 과장된 몸짓과 효과음을 곁들여 해설하는데, 텍스트성이 강한 단체답게 짜임새 있다. 각 장르를 숙성도가 다른 막걸리에 비유하거나 커플들의 개인적인 관계로 귀띔해 주는 등 친밀한 방식으로 주제의 무게를 덜어낸다.
첫 타자인 현대무용 커플(이재영-이경구)은 물을 주제로 존재하기와 관계 맺기를 탐색한다. 느린 호흡으로 바닥에서 멈추고 구르는 이들은 직립 보행하는 인간의 의식에서 벗어나 물 혹은 물속 존재가 된다. 생명체인지 아닌지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느슨하게 공존하던 이들이 조금씩 서로와 관계를 맺으며 연결되는데, 유독 작고 가벼우며 분절적인 동작들로 인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처럼 아기자기하다.
발레 커플(이루다-지경민)과 한국무용 커플(최진욱-임진호)에겐 각각 발레와 한국무용이라는 장르가 주제이다. 이루다에게 발레는 살 속으로 파고든, 그래서 살과 하나가 된 족쇄인 듯하다. 어렵고 인위적이며 답답한 것. 벗겨내고 싶지만, 몸 속 깊이 배어있으니 도통 베어낼 수 없다. 그때 등장한 동갑내기 친구 지경민이 대화를 건네듯 발레의 어휘를 주고받는다. 발레가 밴 몸과 그렇지 않은 몸의 차이가 그토록 또렷하다는 게 놀랍다.
국립무용단 ‘산조’에서 협업한 바 있는 한국무용 커플은 안정적인 신뢰를 드러낸다. 첫 장면에서 둘은 노파처럼 쪼그려 앉아 떡을 찧듯 막대로 바닥을 번갈아 두드린다. 노동에 지친 몸이 행하는 무미건조하고 기계적인 행위. 하지만 애상적이진 않다. 건장한 체격에 쪽 찐 머리의 임진호처럼 해학적이다.
발레 커플이 발레라는 체계를 다루었다면 한국무용 커플은 한국무용의 맥락을 살핀다. ‘산조’가 그러했듯, 이들은 작은 막대로 담배를 피우거나 다듬이질을 하는 등 옛 민중의 삶을 호출한다. 한국무용이 삶에서 녹아 나온 흔적임을 드러낸다. 산전수전 다 겪은 몸 위에서 좋은 시절을 회고하는 할머니의 목소리와 작업 조끼 차림의 노동자가 겹친다.
그 와중에 최진욱의 손끝이 맵다. 최진욱과 이루다는, 각각의 파트너인 임진호와 지경민과는 달리 몸짓에 층위가 있다. 최진욱의 팔사위는 매혹적이었고 이루다의 포 드 브라는 부드러웠다. 무수히 담금질하여 생겨난 결이다. 현대무용가들은 그저 자기 춤을 추는데 발레와 한국 무용가들은 장르라는 비늘이 춤에 찰싹 들러붙어 좀처럼 벗겨낼 수 없다. 장르란 족쇄이자 무기다. 글 정옥희(무용평론가) 사진 고블린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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