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음표라는 시간, 음악이라는 인생을 살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3년 7월 3일 5:26 오후

CINESSAY
영화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7.5 개봉

음표라는 시간, 음악이라는 인생을 살다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
출연 엔니오 모리코네, 클린트 이스트우드, 쿠엔틴 타란티노, 존 윌리엄스, 한스 짐머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 귓가에 음악이 들리고, 순식간에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 있을까? 마치 위대한 자연의 풍광을 만났을 때처럼 음악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기억하게 하는 사람, 클래식 음악부터 실험적인 음악까지 실패한 적 없이 영화를 더 빛나게 하는, 때로는 영화보다 더 빛나는 음악을 만든 사람, 음악가를 넘어 영화계의 거대한 장인이 된, 그리하여 영화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사람. 바로 엔니오 모리코네(1928~ 2020)다.

다름이라는 아름다움
주세페 토르나토레(1956~) 감독의 영화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을 상상하면 키스신보다 음악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이처럼 엔니오 모리코네는 영화보다 더 큰 기억을 남기고, 장면보다 먼저 들려오는 음악을 만들었다. 그가 영화음악 작곡가라는 타이틀보다 더 큰 존재로 기억되는 이유다.
영화음악과 엔니오의 이야기를 담은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다큐멘터리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2020년에 세상을 떠나,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거장을 기리는 일종의 기념비 같은 작품이다. 영화는 엔니오와 인연을 맺은 영화감독, 음악인들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엔니오가 직접 등장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다큐멘터리 속 엔니오 모리코네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트럼펫을 연주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영화음악을 시작했지만, 자신의 뿌리는 클래식 음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고, 영화음악을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견을 이겨내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그가 처음 영화음악을 시작했을 때, 음악은 단지 생계를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편견을 이겨내겠다는 다짐처럼 그는 영화음악을 영화의 부속물이 아닌 당당하고 독립적인 하나의 영역으로 굳혔다. 그는 1960년대 서부극 영화음악을 시작으로, 영화 산업에서 영화음악이 예술로 차지하는 비중을 넓혀나갔다. 나아가 영화가 산업이 아닌,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성장시켰다.
엔니오는 단순한 작곡을 넘어 영화 시나리오를 분석하고 감독과의 심도 있는 대화를 통해 영화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하나의 캐릭터로 창조해 낸다. 다큐멘터리는 이러한 엔니오의 음악을 연대기로 그려내며 한 사람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거대한 영화사를 집대성하는 역할을 한다.
브라이언 드 팔마(1940~) 감독이 엔니오 모리코네의 작품 중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영화 ‘언터쳐블’의 영웅 테마를 선택한 일화, 세르지오 레오네(1929~1989) 감독이 스탠리 큐브릭(1928~1999) 감독에게 엔니오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개입했던 일화 등 영화에 얽힌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듣는 동안 그의 인생은 영화가 되고, 영화인이 되고, 영화사가 된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거짓말까지 하면서 엔니오 모리코네를 독점하고 싶어 했던 이유는 그의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엔니오의 영화음악을 동그랗게 이어주는 건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서부극이다. 권선징악의 뚜렷한 메시지가 담긴 기존의 서부극과 달리, 누가 진짜 악당인지 알 수 없고, 주인공조차 악당처럼 보이는 소위 무법자 시리즈,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1930~)로 기억되는 서부 사나이의 이미지를 정립한 이가 바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었다.
형식의 변화를 넘어 하나의 장르로 변화시킨 건 엔니오의 음악이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서부극의 음악 역시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이다. 그는 휘파람과 하모니카 그리고 일렉트릭 기타 선율을 넣어 기존 서부극 음악이 지닌 가벼운 분위기를 처연하게 표현했다. 그의 음악은 이전과 늘 달랐고, 그 다름은 웅장한 아름다움으로 남았다.

음악으로 잊지 못할 미장센을 만들다
한 분야에 전설적인 영향력을 미치면서, 그에 못지않게 수많은 작품 경력을 지닌 음악인은 거의 없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60년에 걸친 경력을 통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에서 400편이 넘는 영화음악을 작곡했고, 100개가 넘는 콘서트 작품에도 참여했다.
그가 단순히 영화음악 작곡자였다면 지금과 같은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영화음악뿐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조율하는 지휘자의 역할을 해내며 음악 그 자체에 담긴 숭고함과 완성된 아름다움을 전달한다. 그렇기에 그의 음악은 관객뿐 아니라 음악 애호가까지 매료시킨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영상의 도움 없이도 음악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지닌 음악적 자부심과 자존심을 오롯이 이해하는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관객들이 기대하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음악을 들려주기보다 거대한 예술가 엔니오 모리코네의 모습을 보여준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엔니오 모리코네라는 사람에게 집중하지만, 엔니오의 잡담이나 개인사는 거의 담지 않는다. 2020년 7월 세상을 떠난 거장을 기리는 다큐멘터리의 목적 자체가 그에 대한 찬사이자 헌정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영화사나 사담에 관심이 있는 관객보다 한 사람의 장인이 예술을 창작하는 과정에 집중하고 싶은 관객이 더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이다. 150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가 구분해 내는 음표 하나하나의 차이를 함께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이야기는 거대한 악보처럼 펼쳐지면서 하나의 미장센이 된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세 차례의 골든 글로브 음악상과 그래미상을 수상했지만, 아카데미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여섯 번이나 거론되지만, 그뿐이었다. 그러던 중 2007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다른 이였다면 아카데미와의 인연이 여기에서 그쳤겠지만, 엔니오는 달랐다. 공로상을 받은 지 9년이 흐른 2016년, 88세의 나이로 쿠엔틴 타란티노(1963~) 감독의 영화 ‘헤이트풀8’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했다. 그 음악은 그가 이전에 만들었던, 가장 잘해왔던 서부극 음악이 아니었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이전의 상징과 색채를 모두 지운, 새로운 서부극 음악을 만들어 냈다.
영화음악을 집대성한 다큐멘터리지만, 별도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음반이 발매되지는 않았다. 다큐멘터리에서 그려낸 것은 영화음악이 아닌 위대한 예술가 엔니오 모리코네의 삶이기 때문이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보고 있지만 ‘들리는’ 영화다. 매 순간이 음표로 직조된 한 사람의 인생은 음악 그 자체보다 더 아름다운 선율이 된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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