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탄생 주년에 만나는 두 작곡가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6.1~25
(정치용/KBS교향악단(협연 박종화))
6월 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라흐마니노프와 리게티가 만났다. 각각 탄생 150주년, 100주년을 맞이한 두 작곡가의 기념 주기지만, 한 사람은 뜻하지 않게 발발한 전쟁의 여파로, 한 사람은 청중에게 조금 낯선 작풍을 가졌다는 이유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음악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곡가들을 자세히 살펴볼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아쉬움에, 이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교향악축제의 현장을 찾았다.
라흐마니노프를 조명하는 방식은 마치 수미상관처럼 그의 처음과 끝을 보는 식이었다. 초기작 ‘바위’ Op.9로 시작된 공연은 그의 마지막 교향악 작품인 ‘교향적 무곡’ Op.45로 마무리 됐다. ‘바위’는 그의 ‘보칼리제’를 예견한 듯한 멜랑콜리를 간직했다. 관현악에 필요한 규모를 갖췄음에도 다정함을 잃지 않은 첫 곡과 달리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무곡’은 거침없이 펼쳐냈던 라흐마니노프의 창조적 세계를 모두 담았다. 낭만 음악만으로 규정하기에는 조금 더 과감하며, 알토 색소폰의 사용은 고유한 색깔의 서정을 드러낸다. 이로서 한 공연 내에 작곡가의 초상이 조금 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한편 이 두 곡 사이에 자리잡은 리게티의 피아노 협주곡은 가장 요란한 무대 전환의 과정을 거쳐야했다. 맨 뒷 줄에 위치해있던 타악기가 모두 단상 밑까지 진출했으며, 첼로가 있어야 할 지휘자 우측 자리는 피아노가 차지했다. 일반적인 피아노 협주곡에서의 악기 위치와는 상반됐다. 기존과 다른 것은 위치만이 아니었다. 눈에 띄는 타악기적 주법으로 시작한 피아노 연주는 독주라기보다는 오케스트라의 한 부분으로 역할로 자리했다. 충실하게 기능한 피아노 ‘파트’와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이 리게티를 조명하기에 적절한 온도를 형성했다. 탄생 100주년이 지나는 지금, 그의 작품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신선함’을 환기해내는 위치를 선점 중이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예술의전당
막이 내리면 낙관도 끝나는 극
국립창극단 ‘베니스의 상인들’
6월 8~11일 국립극장 해오름
창극의 제목은 잘 알려진 셰익스피어의 희극인 ‘베니스의 상인’에서 ‘베니스의 상인들’로 변하였지만, 내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9일 관람). 안토니오(유태평양 분)는 자신이 아끼는 친구이자 동생인 바사니오(김수인 분)의 사랑을 위해 샤일록(김준수 분)에게 3천 더컷을 빌렸고, 기간 안에 돈을 갚지 못하면 심장에 가까운 생살 1파운드를 건네주기로 계약한다. 변한 부분은 관객이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샤일록과 대립하는 자를 안토니오 개인에서 베니스의 소상인조합으로 넓히고, 재판에 긴장감을 심을 수 있도록 포샤(민은경 분)를 판사가 아닌 변호사로 옮겼다는 것. 희극의 코미디는 생생하게 살아있었고, 어쩌면 조금은 유치할 정도로 익숙한 400년 전 명작이었다.
한편 주요 대목마다 등장하는 창은 공연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충분했다. 특히, 조연에도 베테랑 소리꾼이 가득한 국립창극단이다 보니, 장면 전환을 여는 합창이나, 소규모 창이 독창보다 가슴에 와닿기도 했다. 연안에서 배가 침몰하여 소식을 알 수 없는 아들을 기다리는 소피아(김금미 분)가 여는 2막의 창이 그러했다. 바다가 모든 것을 앗아간다며 한탄하는 해안 도시의 과부의 창은 극 전체 어떤 창보다 구슬펐다. 샤일록이 악을 쓰기 전까지는.
서민의 삶과 친구와의 우정을 위해 힘썼던 안토니오가 재판에서 승소하고, 살인을 종용하고 재물만을 탐하던 샤일록이 패소하는 익숙한 권선징악의 결말을 맞이하는 순간. 샤일록은 끔찍한 고함을 질렀고, 모든 조명이 붉게 변하여 그만을 비췄다. 직후에 시작하는 창의 가사는 이제껏 옛이야기 속 인물이었던 고리대금업자를 현대와 연결하고 있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돈으로 살 수 있을 때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격분의 창은 가히 청중을 압도했고, 이는 베니스 상인들의 승리를 너무나 짧은 안도로 바꿔버렸다. 3시간의 코미디는 극장에서 관객을 웃겼지만, 5분간의 아이러니는 사회 부조리의 불편함을 오랜 기간 상기하게 만들었다.
글 이의정 기자 사진 국립극장
이토록 평범하고 눈부신 우리의 시간들
연극 ‘20세기 블루스’
5월 30일~6월 17일 두산아트센터 Space111
“나한테는 너희들이 역사의 시간표니까. 너희들이 로큰롤이고, 우주선 발사고, 시민 평등권이라고. 가장 엄청난 변화들이 기록된 수십 년의 역사가 너희들이야.”
이들은 여성 최초의 록 가수도, 우주인도, 여성 운동가도 아니다. 1950년대 태어나 중년을 넘어 어느새 노년을 향하고 있는 평범한 여성들이다. 연극 ‘20세기 블루스’(수잔 밀러 작)는 60대의 저명한 사진작가 대니(우미화 분)의 TED 강연 장면으로 시작한다. 대니는 뉴욕현대미술관 개인 회고전을 앞두고 지난 40년간 꾸준히 촬영한 친구들의 사진을 전시하기로 마음먹지만, 친구들은 그의 계획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극작가 수잔 밀러는 ‘작품을 통해 여성이 60세가 되었을 때 갑자기 섹스리스가 되거나, 매력을 잃거나, 투명 인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고 밝혔다. 그의 의도대로 극은 대니의 회고전을 앞두고 네 명의 친구가 주고받는 시시콜콜한 대화를 통해 지난날의 꿈과 열정 그리고 여전히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버텨내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회고전에 대해 이야기하며 언성을 높이다가도, ‘뭐라도 좀 먹여야 된다’고 갑작스레 토스트를 굽고, ‘너희가 좋아하는 무화과잼’을 가져왔다며 나눠 먹는 장면은 오래되고 소중한 친구들을 떠올리게 했다.
극은 다시 TED 강연 장면으로 돌아와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대니의 회고전으로 마무리한다. 친구들의 지난 수십 년이 기록된 사진에는 그들이 지나온 세월과 함께한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고, 빔프로젝트를 통해 공연장 전체에 펼쳐진 이들의 사진은 관객에게 추억의 책장을 넘기게 했다.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사랑하는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에게 ‘곧 보자’는 메시지를 남겼다. 아무래도 다음번에 만날 때는 꽃 한 송이와 무화과잼을 챙겨 가야겠다. 대니의 사진 속에 남겨진 친구들의 모습처럼,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평범하고 눈부신 나날을 기대하며.
글 홍예원 기자 사진 두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