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공연수첩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3년 9월 27일 9:00 오전

CHOICE REVIEW

Editor’s Note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불같은 치정 코미디

서울시극단 ‘카르멘’

9월 8일~10월 1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고선웅(각색·연출)/서지우(카르멘), 김병희(돈 호세), 최나라(미카엘라), 강신구(에스카미요), 장재호(가르시아)

‘화내고, 가두고, 조종하고, 집착합니다.’ 자신이 각색한 연극 ‘카르멘’을 소개하는 연출가 고선웅(서울시극단장)의 문구는 비장한 듯, 미묘하게 웃기다. 이 극 자체가 그렇다. 파멸로 걸어가는 연인의 비극적인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숨 막히는 몰입 극을 기대했는가? 안타깝게도 무대 위 연극은 관객이 무대 밖 세상을 차단하고 몰입하자마자 빠르게 다시 현실 세계를 불러온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밖에 있기 때문에.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이 극은 무대를 좁게 보면 비극이고 크게 보면 희극이다. 폭소 장면이 등장하고, 재미있는 농담을 쳐야지만 희극이 아니다. 갖가지 인간사를 우습게 담아내는 해학은 희극의 기술이고, 이런 점 덕에 비극보다 담아내는 웃음의 층위가 두텁다. 이날의 연극 ‘카르멘’은 이러한 방향성을 숙지하고 봤을 때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다.

극의 줄거리는 오페라 ‘카르멘’과 같다. 카르멘(서지우 분)은 미카엘라(최나라 분)의 애인 돈 호세(김병희 분)를 유혹하고, 이에 넘어간 돈 호세는 죄를 짓고 군인의 신분을 잃어 카르멘을 따라간다. 그러나 자유로운 집시 카르멘은 폭력성과 집착을 보이는 돈 호세에게 얽매이지 않기 위해 투우사 에스카미요(강신구 분)에게 빠져든 듯 행동하니, 돈 호세 주변의 관계는 온갖 부정적인 수식어로만 치장된다. 비극적 사랑일까?

배우들의 발화 방식과 연출은 그 비극에 함께 젖어 들지 말라고 경고한다. 코믹하게 퇴장하는 조연들, 연주와 배역을 병행하며 무대 안팎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타악기 연주자, 무대에서 펼쳐지는 일보다 과하게 화려한 조명 등. 이러한 연출은 오히려 이들의 요란하고 지나친 사랑을 조소한다. 고선웅의 다음 문구가 다시 떠오른다. ‘왜 이러는 걸까요?’

몰입을 깨는 행동이나 연출로 관객을 무대 밖으로 쫓아내는 ‘패러디’는 희극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기법이다. 무대가 세상을 비추기 때문에 자연스레 사회 비판으로 연결되고, 극 자체가 아닌 극이 만들어 내는 담론이 작품의 의미를 더한다. 데이트 폭력, 가스라이팅, 칼부림 등 카르멘은 관람객 머리에 현대 사회의 문제를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옳지 않게 격양되는 감정은 그 누구에게도 행복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이 당연한 말을 극으로 만들어서 계속 되뇌여야 하는 사회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이의정 기자 사진 세종문화회관

 


수많은 우연과 오류에 대한 실험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

9월 5~23일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강현주(극·연출)/공예지·류혜린·박인지·이지현·이휘종·황상경(출연)

내게는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손길이 닿는 순간 모든 식물의 생명을 앗아가는 ‘마이너스의 손’이다. 분명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적정량의 물을 주며 정성스레 키웠건만, 이 작은 식물조차 참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극·연출 강현주)는 매일 식물을 키우며 식물의 저항성 유전자를 연구하는 대학 연구실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실험을 반복한다. 그리고 실험체가 된 식물의 성장 과정을 보며, 누군가는 커리어에 대한 성취감을, 누군가는 어긋난 실험 윤리로 인한 패배감을 느낀다.

희곡을 쓰고, 연출을 맡은 강현주는 “가정폭력을 당한 아이에게 누군가 무심코 ‘저런 아이는 커서 뭐가 될까’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라며 “누군가의 삶을 쉽게 단정 짓는 ‘걱정을 가장한 편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매번 완벽한 실험을 준비하지만, 식물의 성장 과정조차 예측하지 못하는 연구실의 단편처럼 우리의 삶 역시 ‘수많은 우연과 오류가 존재’하기에 누군가의 삶을 쉽게 짐작하고 판단할 수 없다. 극은 언뜻 보면 과학적인 내용을 다루는 듯하지만, 어떤 환경에서든 치열하게 살아내는 식물과 각 인물의 고유한 삶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연출에서 보다 섬세하게 드러난다. 작품마다 새로운 공간을 선보이는 두산아트센터 Space111의 무대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이번 작품에서 특히 돋보였다. 연구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섬세한 소품들, 창문의 블라인드를 활용한 시공간의 구분, 논문의 소제목을 본떠 구성한 막 등 극의 현실감을 더하는 요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더불어 입체적인 캐릭터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디테일한 서사는 12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극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게 했다.

이번 작품은 두산아트센터 아티스트(이하 ‘DAC Artist’)로 선정된 강현주의 신작이다. ‘DAC Artist’는 공연예술 분야의 젊은 예술가들이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매년 공모를 통해 2명을 선정한다. 오는 10월에는 극작가·연출가 진해정의 신작이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젊은 예술가들의 새롭고 신선한 작품이 더욱 기대되는 시점이다.

홍예원 기자 사진 두산아트센터

 


우리의 ‘상식’은 얼마나 변했나

전시 ‘김구림’ 연계 공연

9월 7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MMCA 다원공간

무용 ‘무제’

만약 100미터가 넘는 경사면 잔디에, 거대한 삼각형 모양으로 불이 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면 이를 쉽게 ‘미술’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불타버린 검은 잔디는 본래의 푸른 잔디와 같은 물체건만, 다른 ‘현상’이 되었다. 새싹이 돋아도 본래의 잔디와 다른 색을 띄며 ‘흔적’이 남는다. 1970년, 김구림(1936~)이 선보인 ‘현상에서 흔적으로’다.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불린 김구림의 작품은 5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아도 여전히 ‘전위’적이다. 같은 해인 1970년 제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에서 백남준의 작품 ‘피아노 위의 정사’ 연출을 맡은 것도, 1981년 연극 ‘이상의 날개’에서 연출·안무·무대를 모두 담당한 것도 김구림이다. 그가 추구한 예술 세계는 언제나 기존의 가치를 흔들었다. 작품을 발표하면 문화예술 지면보다는 사회 지면에 더 자주 등장할 만큼, ‘상식’에 대한 그의 도전은 논란을 자처했다.

지난 7일, 총체예술가로서의 김구림을 조명하는 공연(연출·안무·작곡 김구림/기획 및 제작 국립현대미술관/협력 제작 및 진행 김민영(아르떼사피엔스))이 열렸다.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한 그의 행보를 조망하는 의도다. 영화 ‘1/24초의 의미’ ‘문명, 여자, 돈’, 무용 ‘무제’와 음악 ‘대합창’, 그리고 연극 ‘모르는 사람들’을 선보였으며, 서울예술대·성균관대·한양대의 재학생 70여 명이 출연했다.

영화 ‘1/24초의 의미’(1969)는 1초당 24개의 프레임으로 구성되는 영화의 구조에 기반해 만든, 한국 실험영화사에서도 주요한 작품이다. 무음으로 10분간 상영되는 필름에는 1초 단위로 빠른 서울의 모습이 흘러가며, 중간에 등장한 남성의 하품과 흡연이 느리게 표현된다. 분주한 현대 사회 속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명, 여자, 돈’이 주는 이미지 또한 비슷하다. 작은 방 안, 한 여성의 하루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용 ‘무제’(1969)였다. 하얀 의상 속 익명화된 무용수들이 무대의 네 방향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연상하는 움직임으로, 무대 중앙에서 자리를 잡고 앉거나 눕는다.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는 수십 명의 무용수가 무대에 자리를 잡자 한편의 그림 같은 미장센이 완성됐다. ‘움직이는 전시’와 같았던 공연은 미묘한 호흡으로 관객을 몰입시켰다.

음악 ‘합창’(1969)과 연극 ‘모르는 사람들’(1969)에선 오래된 전위 예술가의 작품과 만난 젊은 실연자들의 열정이 시너지를 발휘했다. 음악과 연극 모두 각자 문장을 단편적으로 내뱉는 형식이었다. 서사가 진행되지는 않지만, 파편적인 문장들을 제시하는 다양한 연출이 돋보였다. 각각의 동선이 가진 의도는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 완성도를 갖춰, 이 움직임을 모아 ‘인간의 군상’을 말하려는 작가의 메시지가 온전히 전달됐다.

연계 공연 관람 후, 전시장으로 들어서 전시된 ‘김구림’을 관람했다. 움직이고, 말하는 그의 예술 세계를 관람하고 난 후여서인지 조용히 걸려있는 그의 작품들이 다소 심심하게 느껴졌다. 이번 전시에서 김구림은 ‘현상에서 흔적으로’의 또 다른 작품으로, 미술관을 천으로 묶어 염을 하는 설치 미술도 함께 선보이고자 했으나, 국립현대미술관이 등록문화재라는 제재를 받아 무산됐다고 한다. 그는 전시 기자간담회에서 이를 언급하며 “이번 전시에는 파격이 없이 고리타분한 것들만 늘어놨다”며 돌발 발언을 해 현대미술계를 둘러싼 현실에 여러 비평을 이끌어 냈다. 원로 작가의 ‘전위성’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상식’에 위배된다면, 오늘날 우리의 편협한 고정 관념은 과연 개선되고 있는 것일까. 김구림 전은 2024년 2월 12일까지 이어진다.

허서현 기자 사진 서울예술대학교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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