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뮤직 샤펠’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3년 10월 10일 9:00 오전

CINESSAY
영화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

‘뮤직 샤펠’

재능을 가둔 성에서 탈출하기

감독 도미니크 데루데르

출연 타커 니콜라이, 케빈 얀센, 안 코에상, 루스 베쿠아르트, 피에르 보크마

빼어난 실력을 갖춘 아이였다. 누구보다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평범한 친구들과 비교해 아주 빨리 미래가 결정된 것 같았다. 하지만 특기에 머물 수도 있었을 재능이 어느 선을 넘어서면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해 더 뛰어난 나를, 더 훌륭한 나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날카로운 경쟁 속에서 지속해서 평가받는 일이 일상이 된다. 그러다 보면 점수가 적힌 성적표는 정확하게 나의 미래 중 어떤 지점을 콕 찍어 버리는 것 같다. 1등이 되지 못한다면, 나의 재능은 더 이상 나의 미래를 빛나게 하는 축복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장애가 된다.

빛바랜 축복

아주 어릴 때부터 피아노 영재라고 칭찬 받아온 제니퍼(타커 니콜라이)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으로 자신의 재능을 증명하기로 한다. 그녀는 결선에 오른 다른 11명의 경쟁자와 함께 뮤직 샤펠이라는 성에 갇혀 연습 기간을 가진다. 폐쇄적인 공간과 그것보다 더 밀폐된 경쟁 상황은 제니퍼의 오랜 트라우마를 끄집어내고, 그녀는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올해 열린 제19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되어 호평받은 도미니크 데루데르 감독의 영화 ‘뮤직 샤펠’은 피아노 콩쿠르라는 소재를 이용해 젊은 예술가의 재능이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축복인지, 현재를 옥죄어 미래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저주인지를 묻는다. 실제로,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압박감은 어린 시절 영재라고 칭송받던 인장 뒤로 주렁주렁 매달려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다.

‘뮤직 샤펠’은 천재적 재능을 가진 아이들과 함께 천재를 양육해야 하는 가족들의 갈등도 영화에 담아 또 다른 질문과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 환경 때문에 제니퍼의 아버지는 피아노를 사치라 부르고, 어머니는 딸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이라고 믿으며 점점 더 제니퍼를 압박한다. 제니퍼의 재능을 두고 서로 다른 평가를 하고, 서로 다른 꿈을 꾸는 부모의 마음은 가족 갈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재능이 있는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가정에서 흔히 벌어지는 갈등이기도 하다.

데루데르 감독은 예술가의 고뇌와 열정, 최고가 되기 위한 열망이 광기에 이른다는 수많은 영화의 클리셰를 넘어서기 위해, 밀폐된 공간과 콩쿠르라는 장치를 사용해서 개인의 광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관객들이 직접 보고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게 한다. 단 한 번의 경연으로 자신의 미래가 하나의 덩어리로 결정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긴장감은 영화 ‘뮤직 샤펠’을 구성하는 가장 큰 이야기이다.

영화는 치열하게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나를 달뜨게 했던 아름다운 예술이 숙제가 되고, 나의 재능이 어느새 극복해야 하는 장애가 되어가는 과정을 계단처럼 쌓는다. 폐쇄된 공간은 음악계 혹은 더 넓게는 지독한 경쟁 관계로 이뤄진 예술계를 상징하는 것 같고, 공황에 가까운 발작은 아무리 많이 겪어도 내성이 생기지 않는 상처 입은 예술가의 마음을 닮았다.

 

재능이라는 장애를 극복하기

가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꿈과 본인을 동일시한다. 또 자신의 재능과 미래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과연 나의 재능은 나 자신일까. 나의 꿈이 바꿀 수 있는 나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내 꿈이 가족의 꿈이 되어버린 순간, 나는 온전히 나를 위해 살 수 있을까. ‘뮤직 샤펠’은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환기하면서 젊은 천재 예술가의 인생과 꿈, 그리고 어쩌면 오롯이 자신의 것이어야 하는 각자의 미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안타깝게도, 영화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예술이 아름다운 나의 미래가 아닌 극복해야 하는 현실이 되어버린 어린 예술가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관계에 앞서 상대방을 누르고 이겨야 한다는 경쟁을 먼저 배운다. 예술을 향한 숭고한 열정은 소수점 단위로 새겨지는 재능에 대한 평가 앞에서 좌절을 맛본다. 게다가 선천적 재능을 가진 경쟁자들 사이에서 나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가장 먼저 눈치채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이다.

부글부글 끓는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로 치달을 때쯤, 카메라는 피아니스트의 감정에 따라 격정적으로 변화하는 연주 장면을 마치 실제 연주 현장에 와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준다. 연주에 공을 들인 연출 덕분에 음악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충분한 시각적 즐거움과 청각적 쾌감을 준다. 이러한 점에서 ‘뮤직 샤펠’은 꽤 만족스러운 음악영화로 분류될 수 있는 작품이다.

뻔한 소리 같지만, 가장 먼저 이겨야 하는 경쟁자는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죽도록 노력하지만 나보다 더 잘하는 경쟁자, 친구인지 적인지 알 수 없는 관계들 사이로 자의식이 떠돌다 부서진다. 경쟁이 뜨거워질수록 그 마음들은 사람을 심지 삼아 활활 타오르다가 결국 자신을 망친다. 재능을 가둔 성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믿음은 메아리처럼 계속 울리고 되돌아와도 좋은 마법의 주문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이한 작곡가 라흐마니노프(1873~1943)는 ‘BBC 뮤직 매거진’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는 본인이 직접 연주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는데, 그중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제대로 연주하기 어려워서 연주자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는 곡이라고 한다. 이 곡은 ‘뮤직 샤펠’의 주인공인 제니퍼의 경연곡이기에 메인 테마처럼 사용된다. 따로 발매된 OST가 없어 아쉽지만 피아니스트들의 경쟁을 다룬 영화이기에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곡을 꽤 자주, 제법 오래 들을 수 있다.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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