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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나부코’ 9.28~2024.1.26
영웅적인 목소리로 날아오르다
뉴욕이 주목한 테너, 백석종의 성공적인 메트 데뷔
지난 9월 25일 ‘뉴욕타임스’는 ‘우회한 끝에 메트에 도착한 가수(A Singer Arrives at the Met, After a Detour)’라는 제목의 대형 기사를 소개했다. 뉴욕에서 공부한 바리톤이 테너로 전향하여 유럽 무대에서 먼저 인정받았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와 더불어, 그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메트 오페라) 무대까지 서게 된 과정을 조명하는 인터뷰 기사였다. 올 시즌은 ‘나부코’와 ‘투란도트’에서 그를 만나볼 수 있다는 소제목을 함께 달았다. 그리고 지난 9월, 드디어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백석종의 데뷔 무대가 있었다.
런던부터 메트까지, 3연속 공연의 대성공
일반적으로 오페라 극장은 배역을 결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디션을 개최한다. 그러나 늘 이 과정을 통해서만 가수를 발굴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주연급은 더더욱 그렇다. 이미 다른 무대에서 검증되었거나, 신뢰할 만한 채널을 통한 추천을 받은 후 자체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다. 백석종의 이번 메트 오페라 데뷔도 비슷하다.
사실 그는 런던 로열오페라에 데뷔하기 얼마 전, 메트 오페라의 오디션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노래를 들어본 극장은 이후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다. 흔하게 있는 일이라 그는 ‘No!’라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런던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에서 삼손 역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엄청난 양의 리뷰가 쏟아졌다. 원래 삼손의 커버(대기) 가수로 제안을 받았었다. 그러나 삼손을 맡았던 테너가 여행 중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었고, 로열오페라는 백석종에게 SOS를 보냈다. 런던의 ‘삼손과 델릴라’ 다음 공연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였다. 이 공연은 코로나 확진으로 출연을 취소한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을 대신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문제는 백석종이 이 작품을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당시 ‘삼손’ 공연의 마지막 일주일을 남긴 상태였고,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첫 공연은 일정상 2주 후였다. 이론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정이었지만, 극장은 그의 역량을 믿었다. 백석종은 새 작품을 익히기 위해 지독하게 몰입했고, 결국 두 작품 모두 무사히 마쳤다. 그의 연이은 성공에, 로열오페라는 그다음 공연인 ‘아이다’까지 부탁했다. 라다메스 역의 프란세스코 멜리의 공연 일정 중, 다섯 번의 공연을 조정해 그 자리에 백석종을 캐스팅했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가장 놀라운 부분은 앞선 세 개의 오페라(‘삼손과 데릴라’ ‘카발레니아 루스티카나’ ‘아이다’)가 그에게는 첫 작품이라는 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극장이 무대 경험이 없는 한국인 테너를 투입하여, 3연속 대성공을 이뤄냈다. 이 게임의 최고의 수혜자는 백석종이었고, 그는 지금 세상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특별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실제로, ‘뉴욕타임스’의 기자는 로열오페라 감독인 올리버 미어스와 백석종에 관해 나눈 이야기를 소개하며 “그가 한 번도 실제 오페라 무대에 섰던 경험이 없던 가수였다는 사실이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말했고, 그의 독특한 음악 여정을 선택한 것 역시 모험이었다는 부분을 상기시켰다. 백석종의 런던 데뷔를 접한 메트의 캐스팅 디렉터는 그의 다음 작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직접 듣기 위해 런던으로 갔고, ‘아이다’ 공연 역시 놓치지 않았다. 이후 그는 메트 오페라로부터 두 작품을 제안 받아 계약이 전격 성사되었다. 올 시즌 베르디의 ‘나부코’와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시작으로, 2024/25년 시즌에는 ‘토스카’에도 출연하게 된다.
백석종의 확실했던 존재감
베르디의 초기 작품에 속하는 ‘나부코’는 성서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극의 주제 역시 짙은 종교성을 띤다. 듣는 사람에 따라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여전히 베르디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3막에 등장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Va pensiero sul ali dorate)’은 그야말로 누구나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이다. 제임스 러바인이 메트 오페라를 이끌던 시절, 공연 중 이 곡을 마치자마자 청중의 박수갈채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결국 이 곡을 한 번 더 불렀어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곡이다.
공연을 이끈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 다니엘레 칼레가리(1960~)의 지휘는 섬세하고 꼼꼼했다. 그는 주요 배역들의 분노를 쏟아내는 장면부터, 회의와 절망 속에서 실낱같은 꿈을 그리는 복잡한 장면들의 감정선을 잘 담아냈다. 오케스트라를 일필휘지의 무기로 삼아 분위기를 쉽게 만드는 손쉬운 방식을 택하는 대신, 손으로 일일이 그림을 그리듯 소리의 결을 세심하게 빚어갔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부코는 작품 전체를 휘젓는 첫째 딸 페네나의 역량에 작품의 존폐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의 첫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출연 비중도 높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보여줄 수 있는 연기력도 필요하다. 음악적으로 성량의 조절이나, 소위 ‘미친 음역대’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단단한 테크닉이 누구보다 중요한 배역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페네나를 노래한 메조소프라노 마리아 바라코바(1998~)는 이번 프로덕션의 일등공신이었다.
아비가일레 역은 우크라이나 출신 류드밀라 모나스티르스카(1975~)가 맡았다. 같은 역으로 2012년 배역으로 메트 오페라에 데뷔했고, 지난 2022년 봄에는 테너 이용훈의 상대역으로 투란도트를 맡았던 소프라노이다. 당시 안나 네트렙코가 투란도트를 노래할 예정이었지만, 메트 오페라 측은 푸틴 대통령 지지 관련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그녀와 결별을 선언하고, 류드밀라 모나스티르스카를 투란도트로 대체 캐스팅했다.
백석종이 맡은 이스마엘레 역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편임에도 오페라 전문 매체 ‘오페라와이어’의 리뷰에서 마리아 바라코바와 더불어 가장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를 가리켜 “영웅적인 목소리” “유연함” “근육질의 톤”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내년 봄 ‘투란도트’(2.28~6.7)의 칼라프 왕자로 귀환할 그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였다. 메트 오페라는 최근 백석종과 2026/27년 시즌 작품까지 계약을 마쳤다.
글 김동민(뉴욕클래시컬 플레이어스 음악감독) 사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