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김시화, 새로운 ‘살로메’를 그리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1월 29일 8:00 오전

CHALLENGE

 

연출가 김시화

여성이 아닌 새로운 ‘살로메’를 그리다

젠더의 경계, 장르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모습의 창극에 도전!

 

©Joonyeol

새빨간 배경을 뒤로하고 한 사람이 올곧이 정면을 응시하는 공연 포스터가 있다. 순간 떠오르는 것은 그림 너머 관객의 눈을 바라보던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올랭피아’. 그 도발적인 시선을 느끼고 나니, 궁금증을 숨길 수가 없었다. 대체 이것은 어떤 공연의 포스터인가. 그 옆에 쓰여 있는 공연명 ‘남성창극 살로메’가 이 궁금증까지 해소해주진 못 한다. ‘남성’에 ‘창극’에 ‘살로메’라니. 누가 이 세 단어를 조합하는 발상을 한 걸까.

그렇게 찾아본 연출가의 이름마저 낯설었다. 연출가 김시화가 2017년부터 꾸준히 쌓아 올린 경력에는 ‘안무’와 ‘무용연출’이 가득했고, 창극 연출과는 조금 헐거운 연결만 보였다. 국립창극단 ‘귀토’와 ‘심청가’에 조연출가로 참여한 경력만이 연관된 유일한 이력이었다. 확인을 위해 창극 연출은 처음이냐 물으니, 그는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처음입니다.”

새롭고, 낯설고, 처음이라는 용어가 가득하면 사람의 머릿속에는 곧바로 의심이 피어오른다. 그러나 이 공연은 달랐다. 은은한 그의 미소에 여유가 엿보여서인지, 답변에서 숨겨지지 않는 여러 경험 때문인지, 아직 뚜껑도 열지 않은 이 공연엔 의심보다는 관심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그 뒤를 든든히 밀어주는 여러 베테랑 창작진과 배우들이 의심의 그림자를 걷어준 것도 한몫했다. 국립창극단의 김준수·유태평양·김수인, 최근 창극 ‘패왕별희’에서 항우로 분한 정보권이 출연하고, 다수의 창극을 연출했던 고선웅이 극본, 국립창극단 출신의 소리꾼 정은혜가 작창을 맡았다. 그래도 의심이 든다면, 김시화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살로메로 분한 소리꾼 김준수 ©Joonyeol

우선 내용부터 이야기해 보자. 희곡 ‘살로메’를 선택한 이유는?

종합적인 이유이다. 창극이 가진 특징이 ‘살로메’와 잘 맞았다. 타락한 욕망으로 결국 파국에 치닫는 이 이야기가 창극으로 옮겨졌을 때 더 처절하고 극적으로 표현될 것이라고 느껴지더라. 추가로, 오랫동안 안무를 해온 입장에서 ‘살로메’ 속 일곱 베일의 춤 역시 마음을 혹하게 했다.

살로메를 어떻게 해석했을지도 궁금하다. 살로메는 팜 파탈의 인상이 강하지 않나?

원작의 살로메를 재해석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사랑을 얻지 못해 집착하면서, 남의 사랑은 무시하고, 원하는 이를 얻기 위해 의붓아버지 앞에서 유혹의 춤을 추기도 하는 원작의 그 살로메이다. 그러나 ‘남성창극 살로메’는 주안점을 조금 옮긴 데에서 차이가 있다. 원작에서는 살로메만 못된 사람으로 그려지지만 창극에서는 다른 인물들의 집착과 악의, 욕망도 모두 들여다본다. 살로메의 재해석보다는 조명하는 인물의 폭이 더 넓어진 것이다.

조명하는 인물의 폭을 넓혔다면, 인물들 간의 관계에도 변화가 있는가?

고선웅의 극본에 그러한 변화가 담겨 있었다. 원작에서 시녀로 나오는 역할이 이 작품에는 남성인 시종으로 바뀌어서 등장한다. 그 하나에서 다른 관계가 생겨나는데, 그렇게 인물 간의 연결성이 늘어나는 게 흥미로웠다.

시녀가 시종으로 바뀌었다면, ‘남성’ 창극이라고 명시한 것처럼 극에서 살로메도 남성으로 인식되는가?

극의 배우도 모두 남성이다. 여성으로 인식된다. 바뀐 것은 시종 하나이다. 그렇지만 ‘여성의 옷을 입은 남성’처럼 성별의 틀에 가두려는 것이 아니다.

 

어색함이 없는 존재들

김준수(살로메 역), 김도완(요한 역) ©Joonyeol

윤제원(살로메 역), 김도완(요한 역) ©Joonyeol

연출의 의도에도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라고 적었다. 극의 등장인물이 성별의 틀에 있지 않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억지스러운 느낌을 다 버렸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성 인물을 연기하는 남성’도 관객은 이미 성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관람하다 보면 성별이라는 관념 자체를 잊게 되고, 그저 살로메, 요한, 헤로데 등 각각의 사람만 남게 되는 것이다. ‘남성창극’이라는 단어에서 ‘여장남자가 등장하나’라는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공연을 보면 그런 ‘젠더’는 사라지고 존재만 보일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이렇게 ‘젠더프리’로 극을 시도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

사회에서 성별의 구분이 허물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구분을 창극에서도 허물어 보는 게 파격적인 시도라고 생각했다. 연극·뮤지컬이나 해외의 오페라에서는 그런 시도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국내의 전통 공연 안에서는 이런 시도가 두드러지지 않아서, 이전부터 ‘내가 해보자’라고 생각한 하나의 바람이었다.

창극은 인물들의 합창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한 성별로만 작품을 준비했을 때 음악적인 균형을 맞추는 어려움은 없었을까?

구상 단계에서 같은 걱정이 있었다. 남성의 음역대가 아무리 높아도 한계가 있고, 그 때문에 성부와 폭이 단조로워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짧은 극이 아니라 1시간 이상의 분량을 이어갈 때, 성부가 너무 단조로우면 지루함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특성을 가진 인물들이 서사와 악기의 음색에 맞춰 이야기를 풀어내니, 예상보다 음악이 풍부하게 들렸다. 그것을 미리 고려한 작창도 탁월해 고민은 자연스럽게 해소됐다.

 

음악도 경계를 허물다

창극은 작창과 작곡이 모두 중요한데, 소리꾼 정은혜(1984~)와 작곡가 김현섭(1992~)은 둘 다 창극에 처음 도전한다. 어떻게 섭외된 것일까?

정은혜의 음반 ‘단테의 신곡-지옥’을 들어보면 굉장히 그로테스크한 음색을 들을 수 있다. 이 음색이 살로메가 가진 섬뜩한 성격과 잘 맞을 것이라 예상했다. 김현섭의 작품 역시 기괴한 분위기의 음악을 잘 만들 수 있는 거라는 믿음을 주었다. 마침 그분도 이런 분위기의 작품을 하고 싶었던 찰나에 우리와 소통이 됐다. 이 두 분은 이번 공연을 통해 세상, 아니 세계에 내놓는 자랑이 될 것이라 믿는다.

작품의 음악 특성을 설명하자면 어떠한가?

전통 소리와 오페라 아리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듯하다. 음악은 작창가, 작곡가, 음악감독과 함께 모여 ‘첼로 선율을 보다 묵직하게’ ‘피리로 왕의 위엄이 표현되게’ 등의 대화로 결정됐다. 배역에 맞춰 음악과 악기를 정했으니, 음악을 들으면 저절로 그 인물이 연상될 것이다.

음악에 전통악기와 서양악기가 섞여 있듯이, 참여 배우도 모두 소리꾼은 아니다. 배우는 어떤 기준으로 선별했는가?

처음에는 소리꾼으로만 진행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의 작창과 음악이 완전히 전통 소리라기보다 오페라가 섞인 오묘한 소리라고 받아들여져 생각을 바꿨다. 오히려 여러 장르의 배우들과 함께 하면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코러스가 5명인데, 그중 3명은 뮤지컬 전공이다. 또한 주요 역할인 요한은 연극배우가 맡고 있다.

 

가슴 뛰는 도전의 연속

창극 연출은 처음 도전한다. 본인의 전공은 초등학생 때부터 박사과정까지 모두 한국무용을 택했고, 여러 공연이나 방송에서도 안무나 무용연출을 해왔다. 대표로 있는 ‘움직임팩토리’에서도 예술감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창극 연출은 어떻게 도전하게 됐나?

‘연출가가 되어야지’라고 목표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개인 무용 작품을 하다 보면 주제와 콘셉트를 정하고, 그에 맞는 무대 디자인·음악·의상·조명 등을 아우르게 되지 않나. 어느 순간 ‘내가 하고 있는 게 연출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출가로 기회를 잡은 것은 2019년 국립무형유산원의 신진 연출가 발굴 공모전 ‘출사표’에 당선되면서부터였다. 과거 ‘출사표’ 선정자들을 살펴보니 연극·전통예술 분야의 연출가 분들이 응모했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나도 전통공연 예술가로서 자격이 있지 않을까 싶어 도전했다. 또한 어릴 때부터 무용 작품에 판소리 음악을 꾸준히 사용했다. 움직임팩토리의 공연에도 소리꾼들과의 작업이 많았다. 그렇게 계속 듣고 접하다 보니 물 흐르듯 창극이 좋아졌고, 그 매력에 푹 빠졌다.

직접 극본을 쓰는 것에도 관심이 있을까?

그건 모르겠다. 이렇게 계속 나아간다면 10년 후엔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용기는 있다.(웃음)

마지막으로 연출가로서, 또는 안무가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을까?

앞으로 연출가로 살지, 안무가로 살지 딱 정해놓고 싶지는 않다. 나는 항상 흥미가 가는 일을 했고, 그게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도전해 왔다. 앞으로도 관심이 생기는 것에 막힘없이 임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것이 안무가 됐든, 연출이 됐든.

이의정 기자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김시화(1989~) 국립국악중·고부터 무용을 전공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사와 전문사를 취득했다. 현재 단국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2019년 국립무형유산원 신진연출가 공모전 ‘출사표’에 선정됐으며, 국립창극단의 ‘귀토’(2021·2022), ‘심청가’(2023)에서 조연출을 맡았다.

 

 

Performance information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남성창극 살로메’

2월 2~4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김시화(연출), 고선웅(극본), 정은혜(작창), 김현섭(작곡), 이상봉(의상), 김준수·윤제원(살로메), 유태평양(헤로데), 서의철(헤로디아), 김도완(요한), 정보권(나라보스), 김수인(메나드), 이정원(나아만) 외

 


집중탐구

 

동아시아 전통 예술극과 젠더

 

한때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은 출연진의 성별과 무관하게 여성이 남·여의 역할을 넘나드는 독특한 장르였다. 그런데 살펴보면 동아시아에는 이러한 성격의 공연 장르가 오래 전부터 존재해오고 있다. ‘남성국극’을 표방한 ‘살로메’를 취재하며 살펴본 동아시아 예술극들을 간단히 살펴본다.

 

【한국】 여성국극

여성국극의 김경수와 김진진

한국전쟁 이후인 1950~196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장르로, 여성 배우만이 무대에 오르는 창극이다. 첫 등장은 1948년 여성국악동호회가 결성되면서 소리꾼 박녹주를 중심으로 올린 첫 공연 ‘옥중화’(1948)로 기록된다. 당시 이몽룡을 맡은 임춘앵(1923~1975)은 지금도 회자되는 여성국극의 스타이다. 그가 활동할 당시 여성국극의 인기는 대단했는데, 전국에 여성국극단이 30개에 달하고, 매년 꾸준하게 신작이 제작되는 것은 당연지사였으며, 그가 창단한 ‘임춘앵국악단’은 일본에서 ‘춘향전’을 공연하기도 했다.

여성국극이 쇠퇴한 것은 1965년 이후이다. 국내의 영화와 TV 방송에 밀리고, 박정희 정권이 여성국극을 정치적으로 배제하면서 서서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여성국극단의 여러 배우는 국립국극단(현 국립창극단)으로 영입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로 인해 국립국극단은 여성국극단의 이름을 당당히 밝히지 않았다. 현재 여성국극은 2000년대 이후 연구를 통해 자료가 발굴되기 시작했으며, 최근 여성국극을 다룬 웹툰 ‘정년이’가 인기를 얻으면서 창극과 드라마로 제작돼 그 이름을 대중에게도 널리 알리고 있다.

 

 

 

【중국】 경극

‘북경의 연극’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에서 만들어진 음악극이다. 경극은 전통적으로 남성만이 무대에 올랐다. 이때, 맡은 역할의 성별뿐만 아니라 그 역의 성격에 따라 가창 발성법이 모두 다르다. 이는 총 다섯 가지로 나누어지며, 각 역할마다 다른 분장 색으로 그 역할의 성품도 알 수 있다. 극중 여성 역은 ‘단(旦)’이라 칭하는데, 문화대혁명 이후로 단 역할을 맡는 여성 배우가 늘어나면서 현재는 한 성별로만 이루어진 극이라 볼 수 없다.

국내에는 항우와 우희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패왕별희’가 가장 잘 알려졌지만, 그 외에도 경극의 레퍼토리는 과거에 3,800종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다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대부분이 유실되었고, 문화대혁명 때 많은 작품이 처분되어 현재 공연되는 작품 수는 현저히 적다.

 

【일본】 가부키·다카라즈카

가부키는 17세기 에도막부시대부터 시작된 일본의 전통 서민극으로, 오직 남성만이 무대에 오르는 것이 특징이다. 발생 초기에는 여성들이 무대에 올랐으나, 성매매와 관련된 문제를 없애고자 했던 에도 막부가 여성·미성년자가 무대에 오르는 것을 금지했다. 다만 이러한 법을 피해 ‘일본무용’이라는 것이 창시됐고, 이 무대에는 오직 여성들만 오르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가부키는 전체 5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복장과 분장이 화려하다. 분장은 얼굴을 하얗게 칠한 뒤 그 위에 표정을 그리는 공통점이 있고, 이를 통해 인물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독특한 점은 일본의 가부키 배우는 오직 세습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카라즈카는 1913년에 창단한 가극단으로, 미혼 여성만이 무대에 오르는 것이 특징이다. 여성국극과 마찬가지로 TV 방송이 보급되면서 위기를 맞았으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를 배경으로한 동명의 작품이 성공을 거두면서, 지금까지도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다카라즈카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카라즈카 음악학교에 입학해야 하며, 한 번 극단을 떠나면 다시 무대에 서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의정 기자 사진 한국여성국극예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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