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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이성준
여름에 피어날 ‘장미’를 기대하며
7월 초연을 앞두고 뮤지컬 콘서트로 먼저 피어난 ‘베르사유의 장미’ 12.2·3 와 그 뒷이야기
지난 12월 3일, 주말의 LG아트센터 서울 로비는 관객으로 북적였다. 팬데믹 이후, 가파른 회복세를 보이며 각 공연장의 객석을 빠르게 채우고 있는 뮤지컬계에서 세계초연작이자 대중에게 친숙한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1972)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에 대한 기대감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뚫고 공연장을 찾게 할 만큼 뜨거웠다.
12월 2·3일 양일간 LG아트센터 서울(LG 시그니처홀)에서 ‘베르사유의 장미 뮤지컬 콘서트’(이하 뮤지컬 콘서트)가 열렸다. 오는 7월, 초연을 앞두고 옥주현·김지우(오스칼 역), 이해준(앙드레 역), 윤소호(베르날 역), 장혜린(로자리 역), 리사(폴리냑 부인 역) 등이 무대에 올라 작품의 콘셉트와 주요 넘버를 간추려 선보였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장중한 역사의 흐름을 드라마틱한 전개로 풀어낸 뮤지컬은 서정적인 음악과 섬세한 서사로 다가올 여름, 충무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맞이할 예정이다.
그 중심에는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의 음악감독 이성준(1981~)이 있었다. 장미의 겹잎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무대 위에 그가 직접 이끄는 브랜든 챔버 오케스트라가 모습을 드러냈고, 곧이어 극의 주요 넘버를 메들리 형식으로 편곡한 ‘OVERTURE’가 흘렀다. 왈츠풍의 바이올린 선율은 웅장한 타악기의 소리로 바뀌며 혁명의 기운이 들끓던 당시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자아냈다.
50여 년의 세월을 넘어 그의 지휘봉 끝에서 다시, 새롭게 피어날 ‘베르사유의 장미’는 어떤 모습일까. 공연 후, 그의 음악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봤다.
‘베르사유의 장미’ 원작의 재탄생
지금까지 영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다양하게 각색될 만큼 대중과 아티스트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이성준 음악감독 역시 한창 만화에 관심이 많을 중학생 무렵, 또래 여자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읽던 ‘베르사유의 장미’를 빌려 봤다. 당시에는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이자 하나의 판타지 장르로 가볍게 여겼지만,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러 40대의 뮤지컬 음악감독이 된 지금 다시 접한 원작은 어린 시절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다양한 갈등과 내면의 변화를 겪기 마련이죠. 원작을 다시 읽으며 내면에 감춰진 아픔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특히 저는 무대 위의 캐릭터와 배우들을 빛나게 해주는 스태프이기 때문에 왠지 오스칼 곁을 지키는 앙드레에게 마음이 가더라고요. 저와 같은 숙명을 갖고 사는 것 같아 그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뮤지컬로 각색할 때는 원작의 특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베르사유 궁전의 마지막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를 그녀의 측근인 오스칼의 시선을 통해 다룬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시대적 배경뿐 아니라, 남장여자인 오스칼을 주인공으로, 오늘날까지 순정 만화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원작 속 장면들을 그는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조금 더 극적이고 동화 같은 음악으로 그림을 그려보기 위해 고민하고 있어요. 저는 가끔 ‘아름다움이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요. 아름다움에 대해 갖고 있는 각자의 시각이 다르듯, 원작 속 캐릭터들이 품고 있는 그들만의 아름다움을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통해 펼쳐보려고 합니다. 어떤 색채로 풀어갈지 고민도 많이 하고, 나름대로 연구하는 중이에요.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베르사유의 장미’에는 어떠한 의지나 신념을 강하게 품거나 드러내는 인물들이 나와요. 각자 지켜야 할 신념이나 의지로 인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사는데, 그 모습이 오늘날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신념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길이 얽히거나 충돌하기도 하고, 때론 큰 변화나 깨어짐을 겪으며 노선이 바뀌기도 하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나 탐욕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러한 인간 내면의 파노라마를 음악으로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꿈과 음악 사이에
인물의 캐릭터성에 초점을 둔 그의 음악은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프랑스 혁명을 이끄는 베르날의 각오가 담긴 ‘혁명의 불씨’는 웅장함을, 폴리냑 부인의 ‘마담 드 폴리냑’은 강렬한 조명과 리드미컬한 비트로 색다른 분위기를 선사했다. 공연 중간, 마이크를 잡은 그는 “2017년부터 쓰기 시작한 이 곡들은 오선지에서 시작됐지만, 배우와 오케스트라 단원들 덕분에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라며 뮤지컬 ‘모차르트!’ 초연(2010)부터 함께 연주해 온 브랜든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전했다.
“대부분의 단원이 거의 10년 이상 함께 한 친구들이자 선후배로 구성되어 있어요.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브랜든 챔버 오케스트라는 저의 자랑이기도 하죠. 제 이야기는 쑥스러워서 잘 하지 않는 편이지만, 공연이나 인터뷰 등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오케스트라를 꼭 언급하곤 해요.(웃음) 그만큼 브랜든 챔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시간은 늘 행복하고, 단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 곡 창작 과정을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그는 “말로 설명하기보단 음악으로 답을 드리고 싶다”라며 ‘나 오스칼’과 ‘나를 감싼 바람은 내게만 불었나’ 두 개의 넘버를 클래식 기타로 연주했다. 그의 기타 선율은 오스칼의 고뇌와 함께 짧지만 강렬하게 객석을 향해 흘렀다.
“제가 있는 곳에는 늘 손이 닿는 곳에 기타와 피아노가 놓여있어요. 특히, 이번에 ‘나를 감싼 바람은 내게만 불었나’를 작곡할 때는 한 달 내내 이 곡만 붙잡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곡을 쓰면서 많이 울었어요. 누워서 기타를 안고 곡을 쓰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던 적도 있죠. 지금까지 곡을 쓰며 이렇게 오랜 시간 고통스러웠던 적이 없었는데…. 지금도 이 곡을 들으면 많이 뭉클해요. 기타는 다른 악기와 달리 여음이 아주 짧습니다. 연달아 치지 않으면 음이 바로 사라지고 말죠. 이 두 곡의 시작은 짧은 기타의 음처럼 작은 촛불 같았습니다. 촛불처럼 미세한 바람에도 꺼질 듯한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고, 그 촛불들이 모여 어떠한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를 이루는 장면을 음악으로 나타내고 싶었어요. 그 과정을 관객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인상 깊게 봐주신 것 같아 감사했습니다.”
세상 만물이 내게는 음악을 위한 영감으로
지난해 6월, 그는 도쿄 현지에서 도쿄필을 지휘하며 ‘브랜든리 뮤지컬 심포니 콘서트’를 선보였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과 ‘벤허’ 그리고 이번 뮤지컬 콘서트를 통해 미리 선보인 ‘베르사유의 장미’까지,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사랑받는 넘버들을 탄생시키는 그의 작곡 비결이 궁금해졌다.
“세상의 만물, 모든 것이 저에게 영감이 됩니다. 어떤 것으로부터 영감을 받게 되면 그것을 어떤 캐릭터의 시점으로, 누구의 생각으로 표현할지 고민한 뒤, 그 인물만의 언어와 스타일로 풀어내곤 하죠. 그래서 평소에 말하기보다 묵묵히 관찰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즐겨하는 편이에요. 때로는 사람마다 갖고 있는 각기 다른 말투나 억양이 영감이 되기도 해서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 말을 녹음한 뒤, 반복해서 듣기도 합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 역시 같은 나뭇잎 소리지만 나무의 종류별로, 심지어는 나라마다 소리의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에 그 소리를 분석해 악보에 적어두곤 해요. 이 모든 것들을 혼합해 저만의 판타지를 만든 다음, 다듬어진 그림을 오선지에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바쁜 공연 일정 속에서도 인터뷰 질문에 꼼꼼히 답하며 뮤지컬 콘서트에서 못다 한 이야기들을 차분히 풀어냈다. 평소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지만, 음악에 대한 진심만은 숨길 수 없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연말연시.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에게 새해 계획을 물었다.
“특별한 계획보다는, 꿈이 많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하고 싶은 뮤지컬도 많고, 아직 도전해 보고 싶은 것도 참 많습니다. 세계에서 K-뮤지컬을 주목하는 이 시점에서, 작품뿐 아니라 소규모 앙상블 혹은 오케스트라로도 음악을 표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오케스트라에 초점이 맞춰진 ‘브랜든리 뮤지컬 심포니 콘서트’도 시작하게 됐고요. ‘태양의 서커스’처럼 넌버벌(non-verbal·말을 사용하지 않는) 퍼포먼스 형식의 쇼에도 도전해 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일단은 오는 7월 무대에 오를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를 관객 여러분들 앞에 멋지게 선보이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웃음) 많이 기대해 주세요!”
글 홍예원 기자 사진 EMK엔터테인먼트·EMK뮤지컬컴퍼니
이성준(1981~) 클래식 기타 전공으로 서울대를 졸업,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로 음악감독 데뷔 후, 영국 스코틀랜드 왕립음악원에서 뮤지컬 음악을 공부했다. 뮤지컬 ‘햄릿’ ‘모차르트!’ ‘삼총사’ ‘잭더리퍼’의 음악감독을 맡았으며, ‘프랑켄슈타인’ ‘벤허’ 등 창작 뮤지컬 작곡가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현재 단국대 뮤지컬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