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김용호, 음악과 함께 찍고 담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1월 22일 8:00 오전

WITH MUSIC

 

사진가 김용호

음악과 함께 찍고, 담다

 

라흐마니노프 ‘죽음의 섬’으로부터의 상상력. ‘짧은’ 영화에 ‘깊게’ 고이다

 

작년 10월, 김용호가 발표한 영화 ‘데 베르미스 서울리스(De Vermis Seoulis, 원작 Stephane Mot)’에는 그의 예술인 ‘사진’과, 그가 사랑하는 ‘음악’이 공존한다. 직접 촬영한 4,585장과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숨 쉬고 있는 스틸 무비(사진 영화)다.

일단 이 영화를 떠나, 김용호가 만들어내는 사진들은 강렬한 순간들을 품고 있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자극적인 장면이나 화려한 촬영 기법이 아니다. 사진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때문이다. “진실은 보이는 것 너머에 있다”는 그의 말은, 이미지를 언어로 사용하는 창작자로서의 철학을 담고 있다.

이야기가 담기는 그의 사진은 지난 40년간 수많은 분야의 사랑을 받았다. ‘보그’ ‘바자’ 등의 패션 사진 작업은 물론 현대카드의 ‘우아한 인생’, 현대자동차 ‘절차탁마, 브릴리언트 마스터피스’ 등의 기업 브랜드도 새롭게 했다. 그가 찍은 ‘상업’ 사진은 소장하고 싶은 ‘예술 작품’으로 팔려나간다.

 

사진으로 시작된 예술과의 인연

에펠탑 앞 광장에서의 무용수 김용걸/사진·김용호

이미지 너머의 것을 담아내는 그의 카메라에는, 익숙한 예술가들도 새롭게 담긴다. ‘비욘드 더 월’ 작업을 통해 만난 발레리노 김용걸과의 일화는 그 작업 결과물만큼이나 흥미롭다.

“파리 오페라 발레에 한국인으로는 처음 입단한 그를 만난 곳은 에펠탑이 잘 보이는 광장이었어요. 처음에 발레 동작을 요청했을 때, 단호하게 거절하더군요. 그는 ‘발레리노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춘다’며, 내가 요청한 게 현대 무용수들이 하는 것이라고요. 설득했죠. ‘세상은 변했고, 형식은 파괴되고 있으니 시도해 보자’고요.”

그렇게 광장 위 속옷 차림의 한국 발레리노는 외로우면서도 아름다운 한 장의 작품으로 탄생했다. ‘객석’ 표지 작업을 통해 남긴 사진도 그와 같다. 발레리나 강수진·피아니스트 조성진 등 김용호의 사진은 예술가 내면의 분위기를 풍긴다.

이렇듯 예술가를 새롭게 바라보던 그의 눈은, 예술을 새롭게 바라보는 작업으로 확장됐다. 2021년, 배우 박정자의 연락으로 현장에 가게 된 연극 ‘물의 정거장’(연출 김아라)이 그 일례다. 바닥과 무대가 절반씩 담긴 이 영상은 2022년 서울무용영화제에 초청을 받기도 했다. 같은 해 6월에는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사계의 노래’에도 함께 했다. 김용호가 새롭게 촬영한 단원들의 모습이 음악 서사에 힘을 실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으로 빚은 영상 미학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그의 다른 창작 영역에도 활기를 불어넣었다. 지난해 10월, 김용호는 20여 분의 단편 영화 ‘데 베르미스 서울리스(De Vermis Seoulis)’의 시사회를 가졌다. 영화 중간에 배우 김범진, 국립무용단원 정현숙 등 최근 예술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이들이 등장해 인상 깊은 장면을 남긴다.

“배우 김범진은 몇 년 전 ‘복’이라는 연극을 보러 갔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묘한 분위기로 극을 이끌어가는 모습에 주목하게 되었죠. 무용수 정현숙은 국립무용단 김종덕 예술감독을 통해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기량이 뛰어난 두 사람은 현장에서 마치 오래 호흡한 사람들처럼 교감하며 동작을 선보였습니다. 이 무용 부분만 모아 따로 작품을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에 활용된 예술적 감각은 음악에서 정점을 찍는다. 프랑스 작가 스테판 모(1967~)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를 구상하며, 그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음의 섬’(1880)이었다. 붕괴한 아파트의 가루를 먹고 사는 벌레의 이야기는 그대로 영화화하기 난해했기에, 직접 서사를 각색했다. ‘죽음의 섬’ 속 이미지는 무너져가는 아파트로 재탄생했다. 그리고 뵈클린의 ‘죽음의 섬’에 영감을 받아 작곡된 음악,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 ‘죽음의 섬’이 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축이 된다. 작년이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주년과 서거 80주년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었다.

“작품 전체에 깔린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 위로, 21세기 서울의 모습이 서사적으로 펼쳐진 영화입니다. 다만 음악에 한국적 색채를 묘하게 섞어보고 싶었습니다. 반드시 한국적, 혹은 서구적이라고 판단하는 음악이 아니라, 코즈모폴리턴 같은 것이 되기를 바랐죠. ‘라흐마니노프 ‘죽음의 섬’의 새로운 편곡 버전이 있었나’라고 느낄 수 있는 음악이 되도록요.”

 

서울의 혼란을 마주한 우리

영화 ‘데 베르미스 서울리스’ 스틸컷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음의 섬’

영화 ‘데 베르미스 서울리스’는 물에 잠긴 무너진 아파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초반부는 다양한 서울의 모습을 보여준다. 원작에서 강조되는 서울의 골목들인 산동네, 그 위에 ‘호랑이’가 등장한다. 그리고 고도로 성장한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는 도심과 밀집된 고층 빌딩들도 스쳐 지나간다. 서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혼란이 가중된다. 중반부에 이르면 배우 김범진과 무용수 정현숙은 호랑이가 겪는 혼란의 정신 상태와 감정을 표현한다. 호랑이는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는 소시민, 즉 우리 모두다. 성실히 일해서 아파트를 가졌던 사람. 그러나 무너져버린 메트로폴리스를 벗어나기 위해 그는 이상향을 찾아 떠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처음의 시작과 같은 장면의 반복이다. 호랑이는 배를 타고 떠났지만, 도착해보니 처음 떠나왔던 곳이다. 물에 잠긴 낡은 아파트의 모습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다. 결국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와 있더라는 결말은 조금 절망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아온 호랑이의 곁에는, 원작에는 없는 토끼가 있다. 토끼는 눈을 가린 채 호랑이를 믿고 배를 탄다. 그 장면을 보면, 어딘가 모르게 뭉클하다.

“결국 이 모든 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뵈클린의 그림도, 귀족 부인이 자기의 남편 추모 차 의뢰해 탄생했었죠. 가족 중심의 자기애가 지금의 우리를 이만큼 팽창시켰을지도 모릅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먼 중동에 나가 돈을 벌고, 아파트를 장만하며 살았으니까요. 모든 게 붕괴하여 무너지고,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떠날 때. 결국 남아 있는 것은 사랑 아닌가 싶어요. 믿고 함께 따라가 보는 거죠.”

영화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비현실적이라 생각되는 모든 것들은 현실 속에 존재한다.” 기존의 영화에 방식을 벗어나 시각적·음악적으로 많은 이미지를 포괄하고 있는 이 작품은, 그 말 그대로 지금 현실의 정서를 담고 있다.

“각본부터 촬영, 음악 선곡, 배우 캐스팅과 공간 섭외까지 모두 제가 했으니, 이 영화가 ‘독립 영화’임은 분명해요.(웃음) 그러나 ‘저예산’에 맞춰서 표현에 제한받진 않았습니다. 돈이 없어서 호랑이의 탈을 쓴 배우를 등장시킨 게 아니라는 얘기죠. 20분 이내에 이 단편 영화를 표현하기 위한 최적의 것들을 담았습니다. 이 많은 이야기가 사람들의 더 많은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길 바랍니다.”

허서현 기자 사진 김용호

 

김용호 상업사진과 예술 사진의 경계를 넘나들며, 많은 히트 작품을 탄생시킨 국내 대표 사진가. 한국패션사진가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패션지(보그·바자·엘르), 광고 사진과 더불어 ‘피안(연)’ ‘매화’ ‘몸’ ‘신여성’과 같은 예술 사진 작업도 주목 받고 있다. ‘한국문화예술명인전’을 통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남겼다. 현대카드 ‘우아한 인생’, 현대 자동차 ‘절차탁마, 브릴리언트 마스터키스’, KT ‘아름다운 신세계’ 등의 작업이 있다.

 


WITH

작곡가 최우정 | 화면에 소리를 입히고, 음악에 변형을 가하다

 

‘데 베르미스 서울리스’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 ‘죽음의 섬’을 바탕으로 편집된 작품이다. 음악은 기존의 버전에 편집과 변형을 더해, 새로운 버전의 ‘죽음의 섬’으로 탄생할 예정이다. 작곡가 최우정(1968~)이 이 음악의 편집을 맡았다.

‘데 베르미스 서울리스’의 메시지와 라흐마니노프 교향시 ‘죽음의 섬’이 가진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라흐마니노프의 ‘죽음의 섬’의 모티브가 된 뵈클린의 그림 ‘죽음의 섬’을 암시하는 이미지와 소리가 등장한다. 마침, 라흐마니노프의 ‘죽음의 섬’을 좋아하는 터라, 작품에 금방 몰입했다. ‘데 베르미스 서울리스’는 원작자 스테판 모-뵈클린-라흐마니노프-김용호를 통과하여 내게 도달한, 현대 서울에 대한 하나의 오마주다.

기존의 ‘죽음의 섬’ 음악에 전통 악기 요소가 추가된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이 가진 특징 중 전통악기와 어울릴 만한 요소가 있는 것인가?

전혀 없다. 한국 전통 음악은 서양 근대 음악과 근본적으로는 어울릴 수가 없다. 다만 서울 자체가 한국 근현대사의 흔적들이 전혀 어울리지 않게 뒤섞인, ‘기묘한 부조화의 조화’를 보여주는 공간 아니겠나. 억지로 어울리게 하려는 순간 문제가 된다. 서로 다른 것들을 던져두면, 시간이 흘러가면서 끼리끼리 맞춰가는 것 아닐까? 클래식 음악도, 한국 전통 음악도 그렇게 형성되어 온 것일 테다. 그래서 이질적인 것들을 여기저기 던져놓는 것을 선호한다.

음악이 영화에 맞춰 일부 편집된다. 다수의 극음악 작업에도 참여한 바 있는데, 이번 영화 음악에서는 영상의 어떤 흐름을 기준 삼아 음악이 편집되나.

‘흐름’이 그리 중요하진 않다. 대신 음악 안에 있는 것, 말하자면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 소리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언어다. 라흐마니노프의 ‘죽음의 섬’에는 서양의 많은 작곡가들이 인용해 온 ‘분노의 날(Dies Irae)’ 모티브와 변주가 지속해서 등장한다. 서양 근대 지식인들이면 알만한, 일종의 코드 같은 것인데 이런 점에서 음악 선택이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아마 해외에서 영화가 상영된다면 단순히 라흐마니노프의 ‘죽음의 섬’이 아닌, ‘분노의 날’ 코드가 더 큰 힘을 발휘할 것 같다.

‘데 베르미스 서울리스’는 실험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의 특징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작가 혹은 감독이 본 것들이 귀를 자극할 때 거기에 끌려들어 간다. 엄청 현실적인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데 베르미스 서울리스’를 무음으로 보고 있으면, 엄청난 소리가 들린다. 마치 교향곡 같다. 이미 라흐마니노프의 ‘죽음의 섬’을 바탕으로 편집되었기 때문에 굉장히 음악적이기도 하고. 아주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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