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HOT 일본 I 신국립극장 ‘시몬 보카네그라’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1월 15일 8:00 오전

WORLD HOT_JAPAN

전 세계 화제 공연 & 예술가

 

신국립극장 ‘시몬 보카네그라’ 11.15~26

푸른 바다의 서사시,

검붉은 화산의 광시곡으로 재탄생하다

 

베르디 오페라에 대한 새로운 해석

 

도쿄 신국립극장이 지난해 11월 15일부터 26일까지 새로운 프로덕션의 베르디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를 공개했다. 신국립극장은 유럽 스타일의 시즌제 시스템을 가진 오페라 극장으로, 1997년 극장 개관 이래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이다. ‘시몬 보카네그라’(1857)는 복잡한 플롯과 지나치게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초연 당시에는 실패했지만, 아리고 보이토(1842~1918)의 대대적인 개작으로 환골탈태했다. 결국 1881년에 다시금 대성공을 거두게 되고, 이 작업을 계기로 베르디는 보이토와 그의 예술 인생의 마지막 명작인 ‘오텔로’와 ‘팔스타프’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신국립극장과 핀란드 국립 오페라, 마드리드 테아트로 레알이 공동 제작한 이번 프로덕션은 스타 연출가인 피에르 오디(1957~)가 연출을 맡았다.

 

 

노련한 역할 해석과 탁월한 합창 기량

캐스팅에는 유럽 본고장 가수들이 대거 참여했다. 시몬 보카네그라 역에는 베테랑 바리톤 로베르토 프론탈리(1958~)가 관록을 바탕으로 노련한 해석을 선보였다. 물론, 전성기에 비해 노쇠해진 모습으로 고음역 발성이 힘겹게 들리긴 했지만, 중저음역에서는 우아하고 안정적인 가창을 들려주었다. 시몬 역이 음악적인 면보다 드라마적인 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배역임을 감안했을 때 그의 노련한 인물 해석은 훌륭했다.

이는 시몬의 대척점에 서 있는 야코포 피에스코 역의 베이스 리카르도 자넬라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돈된 발성으로 귀족적인 해석을 들려주었지만, 베이스로서 저음역의 볼륨감은 부족한 편이었다. 다만, 시몬과 마찬가지로 드라마적 표현력이 더욱 중요한 배역이었기에 그의 성악적 연기에는 불만이 없었다.

아멜리아 역의 소프라노 이리나 룽구(1980~)의 캐스팅은 의외였다. 이전에 들었던 룽구의 공연들은 모두 벨칸토 레퍼토리였고, 그녀의 목소리 역시 전형적인 리리코 콜로라투라로 기억하고 있었기에 리리코 스핀토의 적당히 어두운 표현력이 요구되는 아멜리아 역에 어울릴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세월에 따라 충분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여전히 중저음역에서는 성량의 부족함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벨칸토 전문 가수로서 고음역의 빛나는 존재감과 카리스마는 어두운 드라마 속 홍일점인 아멜리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했다.

이날 가장 만족스러웠던 가수는 가브리엘레 아도르노 역의 테너 루치아노 간치(1982~)였다. 큰 성량과 찬란한 고음으로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성격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배역인 가브리엘레를 매력적으로 표현했다.

지휘는 브뤼셀 필하모닉과 도쿄 메트로폴리탄 심포니, 그리고 신국립극장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오노 카즈시(1960~)가 이끌었다. 뮌헨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에서 볼프강 자발리쉬와 주제페 파타네 등의 거장들에게 다양한 오페라를 사사한 오노는 노련한 오페라 전문가답게 복잡한 플롯들이 얽힌 스토리와 바그너적인 영향까지 더해진 다층적인 작품을 한치의 애매함 없이 자연스럽게 들려주었다.

섬세한 연주 속에서 관악기의 포효는 억제되어 있었고, 실내악적으로 정제되어 있었다. 3막 첫머리에 들려오는 진혼의 호른 합주가 펼치는 명징한 아티큘레이션은 지금까지 들었던 모든 ‘시몬 보카네그라’ 공연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았다. 정교한 앙상블의 각 악기군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으며, 지휘자에 의해 완벽히 통제된 역동성은 과장된 표현 없이도 뚜렷한 극적 대비를 이뤘다. 적절한 고양감과 긴장의 완급 조절도 절묘했다. 이러한 오노의 해석을 완벽하게 구현해 낸 도쿄 필하모닉의 연주는 찬사를 받을 만했다.

특히 놀라운 점은 합창단의 기량이었다. 다양한 연출적 요구에도 흐트러짐 없이 정확한 앙상블로 표현하는 합창단의 원숙한 기량은 가장 스펙터클한 1막 2장 대회의실 장면의 뛰어난 완성도에 기여한 일등 공신이었다.

 

피에르 오디와 아니쉬 카푸어의 만남

연출가 피에르 오디는 14세기 제노바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역사적 배경지식을 요구하는 작품 해석에 정공법을 택해 ‘한 남자의 기구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라고 정의를 내렸다. 오디는 다층적인 스토리를 단순화시키고, 이를 상징적인 시각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에 능숙한 연출가다.

이번 연출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것은 단연 무대미술이었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아티스트인 아니쉬 카푸어(1954~)가 무대미술을 맡았기 때문이다. 카푸어는 일찍이 시카고에서 거대한 스테인리스 구체(具體)인 ‘클라우드 게이트’를 통해 공간 속에 존재하는 조형물이 아닌, 공간을 창출해 내는 미술 개념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2016년 피에르 오디가 총감독으로 있던 네덜란드 국립 오페라의 ‘파르지팔’ 프로덕션에서 이와 유사한 스테인리스 조형물을 무대 중앙에 배치해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은 바 있다.

일반적으로 ‘시몬 보카네그라’는 푸른 바다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번 프로덕션은 그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푸른색을 의도적으로 걷어낸 듯한 무대에는 붉은색과 검은색이 가득했다. 카푸어가 최근에 집중하고 있는 색상 조합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구조물은 거꾸로 뒤집힌 화산이었다.

붉은 색조를 띤 거친 질감의 화산은 극이 진행될수록 점차 아래로 하강한다. 뒤집힌 채 아래로 입을 벌린 화산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악의 힘을 형상화한 듯 보였다. 아래로 내려오던 화산은 2막에서 아멜리아의 고백으로 시몬과 가브리엘레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3막에서 온몸에 독이 퍼져 죽어가는 시몬이 등장할 때 화산은 다시 내려온다. 무대 바닥에는 화산이 토해낸 듯 분출된 용암들이 차가운 바위로 굳어간다. 이는 마치 화산이 품고 있던 악의 기운이나 갈등의 씨앗들이 주인공 시몬의 죽음과 더불어 지나간 역사가 되어버림을 상징하는 듯했다. 실리콘과 목재를 혼합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붉은 화산은 작년, 서울에서 열린 카푸어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검붉은색의 조형물들을 연상시키며 그의 최신 경향을 반영하고 있었다. 푸른 바다 대신 붉은 화산이 중심이 되는 무대는 화산의 나라 일본에서 더욱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법도 했다.

이윽고 시몬이 죽고, 무대 뒤에는 검은 태양이 떠올랐다. 모든 빛을 흡수할 듯 완전한 칠흑의 태양은 현존하는 가장 검은 색상의 도료로, 오로지 카푸어만 사용하도록 허락된 반타 블랙(Vanta Black)을 떠올리게 했다. 이번 세트에서도 반타 블랙을 썼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순도 높은 검은색의 이미지가 남긴 강렬한 잔상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아시아 오페라 발전의 초석을 다지다

창립 26년을 맞은 신국립극장은 변곡점에 이르렀다. 아시아에서 가장 선도적인 오페라 하우스라는 위치는 여전히 변함없지만, 팬데믹을 겪으며 어려워진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서 신국립극장 역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 세계 유수의 오페라 극장들과의 공동제작 프로덕션을 더욱 확대해 나가야 함은 물론이고, 공연의 시각을 세계로 넓혀나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신국립극장이 세계 각국의 음악평론가들을 프리미어 공연에 초대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신국립극장은 한국의 ‘객석’을 대표해서 참가한 필자를 비롯해, 독일의 ‘오페른벨트’, 프랑스의 ‘디아파종’, 이탈리아의 ‘클래식 보이스’ 등 음악 전문지의 평론가 7명을 초대해 피에르 오디와의 대담과 스테이지 투어, 오노 카즈시와의 오찬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다. 이번 공연을 계기로 신국립극장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오페라 예술자원들이 더욱 긴밀히 협업하는 기회가 확대되길 기대해 본다.

유정우(한국바그너협회 회장·외과 전문의) 사진 신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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