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 TALK
피아니스트 허승연·이진상·박종해
나를 성장시킨 콩쿠르의 시간
세 명의 피아니스트가 모여, 올해 열릴 스위스 게자 안다 콩쿠르(5.30~6.8)에서의 경험과 미래를 나누다
2021년 서울시향은 그해 11월에 ‘쇼팽 콩쿠르 스페셜’을 예정했다. 연초에 공개한 협연자 명단에는 ‘제18회 쇼팽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라고만 공지했다. 그리고 우승자 브루스 류가 내한해 쇼팽의 협주곡 1번을 선보였다. 올해도 라일란트/국립심포니는 9월 공연의 협연자 소개란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 발표 이후 공지’라고만 기재해놓았다.
오늘날 콩쿠르는 공연 기획의 중요한 콘텐츠가 되고 있다. 입상자가 누군지 모른 상태에서 마련한 익명의 라인업일지라도 많은 이는 ‘새 얼굴의 탄생’에 진심어린 기대와 관심을 갖고 있다. 온라인으로 중계되는 콩쿠르 현장은 새 음악가의 탄생 과정을 보고 들으며 즐기는 이들도 늘고 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개최되는 게자 안다 콩쿠르는 피아니스트 게자 안다(1921~1976)를 기리고자 1979년 첫 회를 시작으로 3년마다 열리는 콩쿠르이다. 취리히 음악원 부총장이자 피아니스트 허승연이 2019년 스위스에 본사를 두고 설립한 소누스아트는 올해 이 콩쿠르의 공식 스폰서로 함께 할 예정이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게자 안다는 1943년 스위스로 이주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슈만·브람스·쇼팽 등 낭만기 작품은 물론 고국의 버르토크와 모차르트 협주곡으로 명성을 알리기도 한 그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최초’로 녹음한 인물로 기록된다. 영화 ‘엘디라 마디간’에 삽입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은 그가 연주한 것이었다.
1월 31일까지 지원자 접수를 마친 이번 콩쿠르는 5월 30일부터 6월 8일까지 열흘간 취리히에서 열린다. 게자 안다 탄생 100주년이었던 2021년 이후 3년 만에 다시 찾아온 콩쿠르에는 큰 변화가 보인다. 심사위원장이 마르타 아르헤리치. 준결승과 최종 결선에서는 각각 플레트뇨프(무지크콜레기움 빈터투어)와 예르비(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가 지휘봉을 잡는다.
한국 음악가로는 2009년 이진상이 우승한 바 있으며, 2012년 김다솔(2위), 2018년 박종해(2위)가 수상했다. 한국인 출전자들을 응원하는 마음에 이진상과 박종해, 그리고 취리히에서 날아온 허승연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콩쿠르 곳곳에 배어있는 게자 안다의 정신
게자 안다 콩쿠르는 어떤 콩쿠르인가?
허승연 “게자 안다의 부인 오르탕스 안다 뷔를레(1926~2014)가 남편(1964년 결혼)을 기리고자 1978년 게자 안다 재단을 설립했다. 그녀는 사업가이자 안목이 뛰어난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했다. 콩쿠르를 통해 젊은 피아니스트들을 지원하는가 하면, 2014년 사후에는 작품의 일부를 취리히 미술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진상 “부인의 적극적인 지원과 정성이 콩쿠르 곳곳에 녹아 있다. 무엇보다 고인이 즐겨 연주하던 곡도 경연곡 선정에 잘 녹아있다.” 게자 안다는 영화 ‘엘디라 마디간’(1967)에 삽입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진상 “그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녹음은 최초의 전곡 녹음이자, 피아니스트가 직접 지휘까지 맡아 녹음한 최초이기도 하다. 안다 부인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는데, 엔딩 크레딧에 남편의 이름이 나와 놀랐다며 에피소드를 들려준 적이 있다. 저작권 개념이 지금처럼 없을 때였으니 가능한 일이었다.(웃음)”
올해 게자 안다 콩쿠르에 한국을 대표하는 공식 파트너로 함께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허승연 “평소 눈여겨보고 있던 콩쿠르였다. 현재 부총장으로 재직 중인 취리히 음악원(Musikschule Konservatorium Zürich)은 스위스를 넘어 유럽 내에서 규모가 큰 학교로, 게자 안다 콩쿠르의 예선이 열리는 공연장(Concert Hall Florhof)이 내 연구실 바로 앞에 있다. 살펴보면 참가자 중 절반 이상이 한국인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대기하며 연습하는 소리를 듣고 ‘저렇게 연주해선 안 되는데…’하는 걱정이 들 때도 있었고, 화장실에서 몰래 긴장에 떨고 있는 참가자들과 마주할 때도 있었다. 지금 내가 운영하고 있는 취리히의 음악페스티벌에도 입상자들을 초청하는 특별 공연이 마련되기도 한다. 그렇다보니 이 콩쿠르는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무엇보다 나 역시 피아니스트로 성장하고 활동하고 있기에 콩쿠르 출전자들의 불안과 긴장감을 잘 이해한다. 그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 현재 스위스와 한국의 음악적 다리를 놓는 기획사도 운영하고 있으니, 때마침 공식 파트너로 참여하게 되었다.”
스위스와 안다의 정신을 배우는 시간
올해로 제16회를 맞이한 콩쿠르는 작년 11월 19일부터 1월 31일까지 온라인 신청을 받고, 참가가 확정된 이들은 취리히에서 5월 28일부터 본격적인 경연에 임한다.
취리히에 도착한 피아니스트들은 인근의 호스트 가정에서 묵게 된다. 마을이 콩쿠르를 축제처럼 즐기며 새 음악가의 탄생에 함께 하는데 그 과정이 부럽다.
이진상 “스위스의 물가는 상당히 높고, 그렇다 보니 취리히에는 부촌이 형성되어 있다. 그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예술 애호가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 피아노가 없는 집은 참가자들이 묵을 수 있게 피아노를 대여해 콩쿠르의 시간에 함께 하기까지 한다.(웃음)”
박종해 “많은 콩쿠르에 참가하다가 ‘마지막 도전’이라 생각하고 출전한 게 게자 안다 콩쿠르였다. 그런데 급한 마음에 성급하게 준비하다보니, 주최 측에서 정해주는 호스트 패밀리가 내겐 지정되지 않았다. 콩쿠르 기간에 거처는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장소다. 게다가 스위스의 물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싸다. 그래서 당시 취리히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 아카데미에 적을 두고 있었던 김한(클라리넷) 씨에게 잠시 신세지기도 했다. 이 자리를 통해 다시 한 번 감사를!(웃음)”
이번 콩쿠르는 1차 오디션(5.30~6.1)이 있고, 참가자들과 심사위원단의 토론(6.2)을 거쳐 12명의 리사이틀이 결정된다. 2차 경연(6.3~4)은 1인당 60여분의 독주회를 선보인다. 이 과정은 취리히 음악원 홀에서 진행된다.
콩쿠르 참가 기간은 스위스의 문화를, 그리고 게자 안다의 유산과 호흡하는 시간일 것 같다.
이진상 “입상자들은 콩쿠르 후에 게자 안다가 살았던 집에 묵기도 한다. 게자 안다가 연습하던 피아노를 쳐보고, 그가 애호하는 그림 아래서 연습하고, 그가 거주하던 방에 기거하는 순간들은 그의 유산을 접하고 느끼고, 영혼적으로 교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허승연 “음악가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특히 부부가 지녔던 예술에 대한 사랑은 생전에는 연주 활동으로, 사후에는 콩쿠르와 작품 기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사랑을 콩쿠르를 통해 더 잘 알리기 위해 주변인들도 많이 노력한다.”
준결승부터 지휘자/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순간이다. 3명씩 나눠 진행되는 1차(6.5)와 2차(6.6)의 준결승은 게자 안다가 생전에 즐겨 연주한 모차르트 협주곡을 연주해야 한다. 무지크콜레기움 빈터투어홀에서 열리는 준결승에는 플레트뇨프/무지크콜레기움 빈터투어와 호흡을 맞춘다(이 악단은 2019년 내한한 적이 있다). 이후 최종 결선에 임하는 3명은 파보 예르비/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와 최종 리허설(6.7)에 들어간다. 그리고 다음날(6.8), 취리히 톤할레에서 최종 결선과 시상식이 진행된다.
영재성보다 원숙함을 원하는 콩쿠르
게자 안다 콩쿠르를 준비하게 된 계기는?
이진상 “유학 시절부터 이 콩쿠르는 명성도 높았고, 쉽게 출전할 수 없는 콩쿠르로도 유명했다. 특히 참가자들에게 요구하는 레퍼토리가 방대했다. 여러 콩쿠르가 영재성이 빛을 발하는 음악가를 발굴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것에 비해, 게자 안다 콩쿠르는 원숙한 연주자를 찾고자 한다. 이러한 성격이 방대한 레퍼토리에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경연곡이 모차르트부터 낭만주의, 그리고 버르토크의 시대에 해당되는 곡들이었다. 게자 안다가 생전에 즐겨 연주했던 곡들인데, 나 역시 좋아하는 곡들이었다.”
박종해 “이진상 교수의 우승(2009)으로 이 콩쿠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경연곡이 많고, 입상 후 연주회 기회도 풍부하게 제공되는 게 게자 안다 콩쿠르의 특징이다. 그래서 연주와 도전을 즐기는 음악가들이 선망하곤 한다. 나도 콩쿠르 참가를 통해 많은 곡을 연주해보고 싶어 하노버 국립음대 재학 중에 도전했다.”
참가 당시 자신을 둘러싼 분위기는 어떠했나?
이진상 “최종 결선을 위해 두 곡을 제출하게 되어 있다.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베토벤 협주곡 4번을 준비했다. 브람스의 곡은 익힌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청년 브람스’의 작품을 나 역시 젊은 시절에 연주해보고 싶었다. 많이 긴장했지만, 1차부터 결선부터 나를 둘러싼 분위기가 긍정적이었다. 당시 심사위원장은 지휘자 조너선 노트였다.”
박종해 “우연인지 나 역시 브람스 협주곡 1번과 베토벤 협주곡 4번을 준비했다. 당시 여러 번의 협연 경력으로 브람스의 협주곡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경연곡은 콩쿠르의 성격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다. 한 가지 에피소드를 든다면 2010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할 때였다. 참가자들이 뮤직 사펠에 ‘감금’되는데, 이전 입상자의 작품을 준비하고 연주해야만 했다(현재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작곡 부문은 열리지 않는다). 누구의 작품인지도 모르고 연습했는데 작곡가 미팅을 통해 전년도 입상자인 전민재 선배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웃음)”
‘연주자로서의 삶’을 제공하는 부상
게자 안다 콩쿠르는 높은 상금으로 유명하다. 1위 4만 스위스프랑(약 6000만원), 2위 3만 스위스프랑(약 4500만원), 3위 2만 스위스프랑(3000만원)의 상금이 주어진다(병역면제에 준하는 예술·체육요원 편입인정대회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개 수상자들을 순위로만 기억하지만, 콩쿠르의 정신과 상징은 부상에도 잘 담겨 있다. ‘관객’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 이에겐 ‘관객상’을, 준결승 진출자 중 최고의 모차르트 연주를 선사한 이에겐 함께 했던 악단(무지크콜레움 빈터투어)이 수여하는 ‘모차르트상’이, 안다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버르토크나 리스트의 작품에서 남다른 해석을 보여준 이에겐 ‘리스트-버르토크상’을, 그리고 안다 부인의 이름을 딴 ‘오르탕스 안다 뷔를레상’은 참가자 중 한 명에게 수여하는 특별상이다. 3명의 수상자는 공식적으로 콩쿠르 직후부터 2027년까지의 연주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게자 안다 탄생 100주년이던 2021년은 펜데믹 시기였지만, 고인을 추모하는 특별한 콘서트가 열렸다. 11월 18일과 19일 밤, 취리히 미술관에 1979~2021년까지 아홉 회 콩쿠르의 수상자가 한 자리에 모여 7시간 동안 공연을 이어갔다. 이진상도 그중 한명이었다.
게자 안다 콩쿠르만의 특전이라면 무엇인가?
허승연 “이 콩쿠르는 입상자들의 공연을 잘 챙겨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서로 다른 연도에 입상한 이들의 네트워크도 많이 신경 쓴다.”
박종해 “입상했을 때가 5년 전인 2018년인데, 콩쿠르측이 잡아준 연주회를 지금도 소화하고 있다. 많은 콩쿠르가 우승자에게 집중 지원하는 경우가 많은데, 게자 안다 콩쿠르는 2위에 입상했던 내게도 여전히 많은 기회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가장 잊지 못할 연주회는 독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독주회였다.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있는 도시여서 동경해왔는데 콩쿠르 측의 배려로 그 무대에 오른 것이었다. 슈만이나 리스트 등 공들여 선곡했던 기억이 난다.”
이진상 “부상으로 주어지는 연주 기회가 어느 콩쿠르보다 많다. 우승 후 ‘직업 연주자로서의 삶을 몸소 체험하며 살 수 있었다. 루체른, 베를린, 빈 등의 유명 공연장에서의 독주와 협연 무대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입상했던 2009년 전해인 2008년에 세계 금융위기로 문화예술계가 위축되어 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연주 기회가 잡혔는데, 지금 계산해보면 1년에 약 80회 정도였던 것 같다. 상금으로도 살 수 없는 연주자로서의 삶을 살아보있다.”
입상만큼 중요한, 그 ‘이후’의 시간
콩쿠르 입상은 클래식 음악의 또 다른 요충지인 스위스 음악계로의 진입할 수 있는 관문이기도 하다. 스위스 음악계의 특징은 무엇인가?
허승연 “우승자를 향한 뜨거운 관심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스위스는 독특하게도 1등만 내세우거나 바라보기보다 여러 입상자를 초청하는 경우가 많다. 개성과 독특한 음악적 성향을 드러내는 음악가라면 콩쿠르 성적과 무관하게 충분한 예우와 러브콜을 보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연주자의 ‘개성’을 중요시하는 게 스위스 음악계만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이진상 “맞다. 사실 스위스인들은 유럽의 다른 국가에 비해 보수적이지만, 이러한 성향이 연주자에게 향하면 깊은 애정으로 변하는 것 같다.”
올해도 새로운 음악가의 탄생을 기대하며,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박종해 “콩쿠르는 계획의 순간들이 빚어내는 시간이다. 어느 콩쿠르보다 많은 곡을 연주해야 하기에 이를 위한 계획을 잘 세우기를 바란다.”
허승연 “입상으로 연주자로서의 시간이 활짝 피는 것도 있겠지만, 이후의 연주생활과 사회생활에서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11월에 게자 안다 콩쿠르 입상자들의 한국 투어 공연을 계획하고 있으니, 그들을 기대해 달라!”
글 송현민 편집장 사진 소누스아트(SonusArts)
허승연(1966~) 독일 하노버 음대와 쾰른 음대에서 수학했다. 취리히 음악원 부총장과 소누스아트 대표를 맡고 있다. 4월 아오이데 트리오와의 내한을 앞두고 있다.
이진상(1981~) 한국예술종합학교, 뉘른베르크 음대, 쾰른 음대,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수학했다. 베토벤 트리오 본 멤버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다.
박종해(1990~) 한국예술종합학교, 하노버 음대에서 수학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입상했으며,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2019)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