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페라 테너 임형주, 세상과 노래를 잇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2월 5일 8:00 오전

COVER STORY

 

팝페라 테너 임형주

세상과 노래를 잇다

 

25년 전, 시작에 불과했던 그의 길은 이제 후배들이 걷는 대로가 되었다.

한국의 클래식 음악을 넓히고, 클래식과 대중을 크로스한 그의 이야기

 

©김용호

 

어린 나이부터 대중의 관심을 받아 온 만큼, 지금까지 임형주(1986~)를 기록한 기사는 수없이 많다. 성악 크로스오버 장르를 대표하는 그의 음악 이력처럼, 교수·칼럼니스트·라디오 DJ까지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활동에 ‘임형주’라는 이름 석 자는 일간지의 문화면, 사회면 심지어는 정치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이번 호 커버스토리에서는 팝페라테너 임형주의 지난 25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25년을 바라보는 그의 음악 여정에 초점을 맞췄다. 가장 솔직한 임형주의 면면이 담긴, 가장 새롭고 오래된 그의 기록이다

홍예원 기자 사진 김용호·디지엔콤

 


 

한낮의 열기가 가라앉은 어스름한 저녁 무렵, 아스팔트 도로 위로 노란 택시가 하나둘 불을 밝히고, 거리엔 갓 만든 담백한 케밥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어둠이 내리면 더욱 반짝이는 도시 뉴욕 맨해튼의 57번 거리와 7번 대로가 만나는 이곳, 카네기홀의 연주자 전용 출입구를 빠져나온 소년은 이마까지 내려온 앞머리를 넘기며 작은 숨을 들이마셨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초여름의 바람이 지나고, 짙은 눈썹에 앳된 얼굴을 한 17세 소년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번졌다. 2003년 6월 30일이었다.

지난해, 그러니까 2023년에 세계 데뷔 20주년을 맞이한 임형주의 카네기홀 데뷔 장면은 2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가장 찬란했던 순간 중 하나로 그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미성의 소년은 그보다 5년 전인 1998년, 12살의 나이로 국내 데뷔 음반인 ‘Whispers of Hope’를 발매하고, KBS 음악 프로그램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출연하며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2003년 1월에는 팝페라 데뷔 음반 발매 후, 다음 달인 2월에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 최연소로 애국가를 선창하며 ‘애국가 소년’으로 이름을 알렸다.

국내외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2003년, 그때부터 임형주의 이름 뒤에는 굵직한 기록들이 새겨졌다. 카네기홀의 모든 홀(아이작스턴 오디토리움·젠켈홀·웨일 리사이틀홀)에서 공연한 최초의 한국인 음악가, UN 평화메달 역대 최연소 및 한국인 최초 수상 등 ‘최초’와 ‘최연소’라는 수식어는 언제나 그의 곁을 맴돌았다. 지난해 임형주는 데뷔 25주년을 맞이했다. 팝페라테너로서 긴 시간 동안 홀로 남긴 ‘발자취’는 고스란히 후배들이 걸어갈 ‘길’이 되었다. JTBC 오디션 프로그램 ‘팬텀싱어’로 전국에 크로스오버 열풍이 불었고, 이후 한국 성악 크로스오버의 계보를 이어갈 든든한 후배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임형주의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는 점차 ‘아시아 팝페라의 선구자’ ‘한국 크로스오버의 상징적 인물’로 굳어졌다.

 

음악 신동이라 불리던 소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당시 역대 최연소로 애국가 선창(2003년 2월)

1998년 5월 2일 ‘이소라의 프로포즈’ 무대 영상

임형주를 처음 만난 건 인터뷰 하루 전, 표지 촬영 날이었다. 그의 첫인상은 ‘예의 바른 월드 스타 임형주’였다. 현장에 있던 모두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고, 익숙한 듯 메이크업을 받으러 대기실로 향했다.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겪어온 촬영 경험 때문이었을까. 조명 아래에 선 그는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노래하는 듯한’ 포즈 요청에 임형주는 대표곡 ‘천개의 바람이 되어’의 한 소절을 그 자리에서 불렀다. 그의 맑은 미성이 스튜디오의 높은 층고를 가득 채웠다.

다음날 저녁, 임형주를 다시 만났다. 민낯에 뿔테 안경을 쓴 그는 전날의 ‘월드 스타 임형주’보다 한결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객석’을 빠짐없이 사서 읽었다는 자타공인 애독자인 그는 이번 인터뷰를 위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이 담긴, 500장 가까이 되는 사진을 정리한 묵직한 노트북을 꺼내 보였다. 관객으로 가득 찬 대통령 취임식 무대 위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어린 임형주의 모습이 모니터 화면에 떠올랐다. “예전에 비하면 이제 아저씨가 다 됐다”라며 장난 섞인 푸념을 늘어놓는 그였지만, 한껏 들뜬 그의 눈빛에서는 여전히 ‘소년 임형주’가 엿보였다.

“타고 나길 무대 체질이었나 봐요. 무대에 오를 기회가 있으면 늘 먼저 달려 나갔으니까요.(웃음) 그때부터 누가 장래 희망을 물으면 “오페라 가수요!”라고 답하곤 했어요.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제게 참 많은 행운이 따랐던 것 같네요. 재능을 발견하고, 첫 음반을 발매하고, 시기적으로 여러 타이밍도 잘 맞았어요. 평생 감사함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인 거죠.”

오랜 시간 노력과 연습을 거쳐 이 자리에 오른 겸손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운이 따르기도 했다.

“성악과 학생들에게는 목소리가 생명이에요. 특히, 청소년기에는 변성기가 찾아오잖아요. 저는 변성기를 아주 짧게 겪은 편인데, 목소리가 한 옥타브 정도만 내려가는 수준으로 6개월 만에 끝났어요. 예원학교 성악과 재학 당시, 또래 친구들이 변성기를 겪을 때 제 목소리는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였기 때문에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죠.”

그는 곧 자신의 목소리를 펼칠 수 있는 더 넓은 세계를 꿈꿨다. 학교에서 받는 좋은 성적에 만족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았던 임형주는 해외로 눈을 돌려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리고 얼마 뒤, 서울예고 입학을 앞둔 겨울방학, 덜컥 뉴욕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뉴욕에서 노래를 배울 선생님도 직접 구했다. 무작정 인터넷 창을 열어 구글에 보컬 튜터(Vocal Tutor), 보이스 티쳐(Voice Teacher) 등을 검색했다. 그때, 어느 성악가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메조소프라노 웬디 호프먼(1960~2005). 그의 음악 인생을 뒤흔들 운명적인 만남의 시작이었다.

 

테너, 팝페라를 만나다

 

“메트 오페라의 메조소프라노 웬디 호프먼! 바로 이분이다 싶었어요. 보통 메조소프라노가 테너를 가르치기도 하고, 한국에서도 소프라노에게 배웠기 때문에 주저 없이 맨해튼의 아파트로 달려갔죠. 그런데 그분은 온데간데 없고, 한 남성분이 피아노 앞에 앉아 계시는 거예요. 호프먼 선생님이 좀 늦으니 오늘 오디션에서 부를 노래를 미리 불러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당시 제 필살기였던 주세페 사르티의 가곡 ‘그리운 님을 멀리 떠나’를 불렀죠. 한 프레이즈 정도 불렀을까. 그가 잠시 자리를 옮기더니 “보석 같은 재능을 지닌 소년을 찾았다”라며 누군가에게 저를 알리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플라시도 도밍고(1941~)의 디렉터인 에드가 빈센트와 안드레아 보첼리의 디렉터인 토니 루소 등 쟁쟁한 클래식 음악계 에이전시 대표들에게 제 이야기를 한 거예요. 저는 30분 뒤에 오신 웬디 호프먼 선생님의 제자가 된 것은 물론, 호프먼 선생님의 남편이자 반주를 해주셨던 얼 바이스 선생님의 추천으로 유명 에이전시의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까지 얻게 되었어요.“

임형주가 줄리아드 예비학교를 다니며 뉴욕 생활을 시작했을 즈음, 미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 유럽 음반 시장을 강타한 안드레아 보첼리(1958~)와 사라 브라이트만(1960~)의 ‘Time To Say Goodbye’가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다. 오페라 무대 경험이 있는 두 스타가 부르는 팝 스타일의 음악을 일컫는 ‘오페라틱 팝(Operatic Pop)’이라는 용어도 이때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제 막 성악가로서 세계무대에 첫걸음을 뗀 임형주도 ‘크로스오버 전성기’를 맞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메트 오페라에서 활약하는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던 그에게 크로스오버 장르로의 제안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한창 고민에 찬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비 갠 뒤의 무지개가 링컨센터 분수대 물가에 비친 모습을 봤어요. 그 순간, ‘이렇게 낮은 바닥에도 무지개가 뜰 수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대중이 어렵게 느끼는 클래식 음악보다, 익숙한 크로스오버나 팝페라로 관객과 교감하는 음악가가 되는 건 어떨까’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소프라노 조수미 선배, 지휘자 금난새 선생님처럼 대중과 소통하며 클래식 음악을 전하는 음악가들이 당시 제 롤모델이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대중과 클래식 음악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는 신념 하나로 이 장르에 과감히 뛰어든 셈이죠.”

 

해외 무대에서의 눈부신 활약

 

카네기홀 데뷔 무대(2003년 6월)

대체 팝페라가 무엇이길래, 그의 인생에 이렇게나 깊이 스며든 걸까. 임형주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오래전부터 이 질문을 참 많이 받았는데, 팝페라테너로 활동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지겹지 않아요. 크로스오버 장르의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이 장르 자체가 낯선 분들도 있을 거예요. 팝페라는 성악 크로스오버의 대표 장르 중 하나로, ‘팝’과 ‘오페라’를 결합한 음악이에요. 팝 스타일의 창법이나 호흡을 오페라 가곡에 녹여낸다거나, 팝 음악에 성악적인 느낌을 가미해 보다 클래시컬하게 선보이기도 하죠. 특히, 팝페라는 성악 크로스오버 장르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많은 사랑을 받은 장르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어요.”

이제 팝페라는 그의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장르가 되었다.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팝페라는 태어나서는 안 될 ‘사생아’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그 비난은 임형주에게로 향했다. “지금은 웃어넘길 수 있는 말들인데 그땐 너무 어렸으니까, 그게 그렇게 가혹할 수 없더라고요.”

그럼에도 임형주는 계속 ‘팝페라테너’의 길을 걸어 나갔다. 2004년 초, 팝페라의 기반이 되는 오페라 공부를 위해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로 향했다. 피렌체의 산 펠리체 음악원 성악과에서 수학한 그는 유럽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베를린 심포니·바이에른 체임버 오케스트라·도쿄필·빈 심포니 등과 협연하며 나날이 실력을 쌓아가던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빈 슈베르트 음대에서 성악과 석사 과정을 밟게 된 것. “2006년 잘츠부르크 미라벨 궁전에서 있었던 유럽 데뷔 무대에서 함께 협연했던 잘츠부르크 솔리스텐 부악장의 추천으로 입학하게 됐어요. 감사한 일이죠.”

올해로 그는 일본·홍콩·대만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2004년 초에 진출한 일본에서 ‘Image 4’(2004)가 오리콘 차트의 클래식 및 크로스오버 힐링뮤직 부문 1위를 기록했으며, 2005년 12월 31일에는 일본의 연말 음악 프로그램인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해 ‘NHK 트로피’를 수상하며 아시아 전역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한·영 수교 140주년이었던 작년에는 영국왕립예술학회의 종신 석학회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늘 밝고 화려했을 것만 같은 그의 인생이지만, 그 역시 홀로 감내해야 했던 외로움이 있었다. 앞장서서 이끌어 줄 선배도 없는 낯선 장르에서 홀로 짊어져야 했던 ‘팝페라테너 임형주’라는 이름의 무게였다.

“제게는 음악적으로 조언을 구할 팝페라 선배가 없었어요. 제 위로 1980년대 유럽에서 활동하셨던 소프라노 키메라(1954~) 선생님이 계시는데 짧게 활동하고 은퇴하셨기 때문에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어요. 다만, 세계에서 처음으로 팝페라 장르를 창시한 키메라 선생님이 계셨기에 지금의 제가 있고, 제가 있기에 ‘팬텀싱어’를 비롯한 크로스오버 후배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자신해요. 자랑스러운 팝페라 종주국의 계보를 잇는다는 생각에 책임감이 큽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러 한국에도 크로스오버 붐이 찾아왔다. 2016년, 국내 K-크로스오버 장르의 숨은 개척자를 찾는 오디션 프로그램 ‘팬텀싱어’가 첫 선을 보였다. 시즌 1의 성공 이후, 지난해 6월 종영한 시즌 4까지 시즌을 거듭하며 장르의 융합을 통해 성악 크로스오버의 판을 키워나갔다.

“요즘은 크로스오버 남성 4중창 그룹인 ‘포르테 디 콰트로’ ‘포레스텔라’ 등 여러 음역의 가수들이 한 그룹 안에서 활동하다 보니 예전보다 크로스오버 시장이 훨씬 풍성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지금 미국 그래미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K-크로스오버·K-팝페라의 전성기를 꿈꿀 수 있는 여러 가수들이 탄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머지 않아 그래미상을 받는 한국인 팝페라 가수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여러분은 제가 못했던 많은 것을 하고 계시니,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믿어요.(웃음)”

 

시대와 함께한 목소리

 

세계 데뷔 10주년 기념 콘서트(2013년 10월)

임형주의 꾸준함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은 다름 아닌 그의 디스코그라피다. 데뷔 이후 25년간 총 스무 장의 음반을 발매한 그는 각 음반의 콘셉트부터 수록곡까지 모두 직접 결정했다. 그가 결정을 내리는 기준은 단 하나, ‘듣는 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평소 즐겨 들었던 음악 중에서 그의 오랜 팬들이 좋아할 만한 곡, 들었을 때 그의 목소리에 잘 어울리고 잘 표현할 수 있는 곡을 고른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난 음반이 바로 지난해 데뷔 25주년을 기념해 발매한 ‘Life On Air’(2023/4CD)다. 가톨릭평화방송 FM에서 2년 6개월간 ‘임형주의 너에게 주는 노래’ DJ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오프닝부터 클로징 멘트, 그리고 사전에 팬들에게 공모받아 그가 직접 읽어주는 사연까지 담긴 특별한 콘셉트의 음반이다.

“라디오 DJ는 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어요. 오랜 시간 외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주 5일 생방송 진행은 꿈도 못 꿨는데, 코로나로 인해 국내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도전하게 됐죠. 방송하며 팬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시간도 생기고, 행복했어요. 일본에는 라디오 콘셉트의 음반들이 꽤 있는 편인데, 한국에는 이런 콘셉트의 음반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마침 DJ 경험도 있으니, 새롭게 시도해 보고 싶었어요.”

스무 장의 음반을 발매하는 동안 임형주를 소개하는 대표곡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그의 어린 시절이 담겨있는 애국가부터 당대 인기 드라마였던 ‘쾌걸춘향’의 OST ‘행복하길 바래’, 그리고 올해로 10주기가 된 세월호 침몰 사고의 추모곡으로 널리 알려진 ‘천개의 바람이 되어’까지. 그는 2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음반 작업과 무대 활동을 이어가며 대중의 곁을 지켰다.

“저를 소개하는 말 가운데 아직도 감사한 표현이 ‘시대와 함께한 목소리’예요. 예전에는 국가 행사 무대가 대중에게 무거운 이미지로 느껴질 것 같아서 꺼렸는데 철없던 시절의 어리석은 생각이었죠. 국가의 역사적인 사건에 함께하고,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국민에게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지금은 참 각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져요. 그런 의미에서 국가의 경사(慶事)와 조사(弔事)를 아우르는, ‘시대와 함께한 목소리’라는 호칭은 제게 무한한 영광이에요.”

 

‘나’를 위해 살아온 25년, 이제는 ‘남’을 위해

 

©김용호

2023년 ‘국내 데뷔 25주년 기념 콘서트’ 무대 영상

2023년, 어느새 국내 데뷔 25주년을 맞았다. 지난해 국립극장 해오름(5.14)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9.16)에서 열린 두 차례의 콘서트도 성황리에 마무리했다. 그가 앙코르곡으로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부르자, 공연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스마트폰 플래시를 흔들어 보이며 화답했다. “객석을 가득 채운 수많은 불빛을 보는 순간, 갑자기 울컥하더라고요. 저의 지난 25년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 같았어요.”

이날은 세종문화회관의 모든 공연장(대극장·M씨어터·체임버홀·S씨어터)에 섰던 그가 통산 열 번째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 날이었다. 지난 25년의 파노라마. 이제 막 30대 중반을 넘긴 임형주의 나이를 감안하면, 흔한 스캔들 하나 없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세월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게 느껴진다.

“오페라 가수든, 팝페라 가수든 목소리를 사용해서 노래하는 이들은 진실해야 해요. 그래야 진정성이 음악에 오롯이 투영되고, 담길 수 있어요. 목 관리를 위해 술·담배는 금물이고, 체질적으로 카페인이 안 맞아서 아무리 피곤해도 커피·홍차·녹차는 입에도 못 댔어요. 말 그대로 금욕의 세월을 살았죠. 물론, 저도 세상의 유혹에 흔들릴 때가 많았어요. 그럴 때마다 스스로 ‘나는 왜 노래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버텼던 것 같아요. 게다가 저는 어린 나이에 유명해졌으니, 실수해도 될 나이에 실수하지 않는 법부터 배웠거든요. 10대와 20대의 임형주를 되짚어 보면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물론, 어릴 때부터 진로를 찾고 유명세를 탄 덕분에 지금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골라서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는 위치가 됐어요. 그래서 요즘은 ‘내가 이 역할을 하면, 앞으로 잘 해낼 수 있겠다’ 싶은 일을 새로 찾아보는 중이에요.”

어린 임형주가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나는 마흔이 되기 전에 은퇴할 거야. 나중에 나이 들면 ‘인간 임형주’를 위해 살 거야.” 마흔을 향해 가는 지금, 앞으로의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가장 중요한 대상이 바뀌었다.

“지난 25년이 ‘나’를 위해 살아온 시간이라면, 앞으로의 25년은 ‘남’을 위해 살고 싶어요. 서두에도 말했듯, 저는 사랑을 참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지금도 여러분들이 저를 기억해 주시고, 후배들이 “임형주 선배님 노래를 듣고 성악을 시작했어요”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제가 누군가의 꿈이자 롤모델이 되었다는 생각에 막중한 책임감이 들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받은 사랑을 문화예술계 후배들에게 돌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다가올 25년, 나아가 그 이후의 시간은 제가 겪어온 음악 여정의 여러 시행착오와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예술행정가로 일하고 싶어요.”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하며, 자신 있게 쓴 전문을 고칠지 말지 고민했다. 가장 새롭고 오래된 그의 기록이라 자부했지만, 한정된 지면에 그의 모든 기록을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인터뷰가 그의 새로운 기록의 첫 페이지가 되리라는 것. 임형주의 인생 여정은 지금부터다.

 

임형주(1986~) 1998년 첫 음반을 발표하며 국내 데뷔,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 최연소로 애국가를 독창하며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베를린 심포니·도쿄필 등과 협연했으며, 2005년 일본 ‘NHK 홍백가합전’에 한국인 크로스오버 가수로는 최초로 출연한 바 있다. 2010년 UN 평화메달 및 2015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상했으며, 2016년에는 미국 ‘포브스’지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30인’에 클래식 음악가로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현재 로마시립예술대학 성악과 석좌교수 및 미국 그래미상 심사위원, 영국 왕립예술학회 종신 석학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객석’ 독자들을 위해 임형주가 꼽은

‘나의 곡 TOP 3’

 

‘Lost In Memory’(2022) 

꽃 한 송이 “코로나를 겪으며 죽음에 관해 생각했어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인 죽음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죠. 사랑스러운 느낌의 가사지만, 사랑했던 사람을 잃은 할머니의 마음으로 이 곡을 들으면 새롭게 들릴 거예요.”

 

 

‘Life On Air’(2023)

소멸하는 밤 “이 곡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내용이 담겨있어요. 결국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돼요. 그런 의미에서 장송곡이 아닌, 웰 다잉(well-dying)을 생각해 보게 하는 힐링 곡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기억해줘요

“영국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시 ‘리멤버(Remember)’를 부분 개작 및 개사해 만들어진 곡으로, 곧 세상을 떠날 사람이 남겨질 이들에게 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이 곡이 많은 분에게 힘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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