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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이지나
자기 앞의 생을 마주하다
뮤지컬로 재탄생한 소설 ‘파과’. 여성 킬러가 보여주는 냉철함과 뜨거움
이지나(1964~) 중앙대에서 연극영화학 학사, 미들섹스대학원에서 공연연출학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연극 ‘굿바디’ ‘버자이너 모놀로그’,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헤드윅’ ‘록키호러쇼’ 등의 연출을 맡았으며, 2009년 한국뮤지컬대상 연출상을 받았다. 현재 중앙대 연극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파과’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흠집 난 과실(破果), 다른 하나는 여성의 나이 16세를 이르는 이팔청춘(破瓜). 상처 나고 부서진 과일을 바라보며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맞이하는 60대 여성 킬러 ‘조각’의 이야기를 담은 구병모(1976~) 작가의 장편소설 ‘파과’가 뮤지컬로 무대에 오른다.
연출을 맡은 이지나는 이번 작품을 두고 ‘나이 듦에도 아직 살아있는 단맛을 은유하는 인간에 대한 찬양’이라고 소개했다. “연출에 독서는 필수적이며,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그는 소설 속 활자에서 자기 자신을 마주했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헤드윅’ ‘서편제’ 등 강렬하고 독창적인 스타일의 연출로 한국 뮤지컬계의 중심에 서 있지만,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자문(自問)하며 새로운 ‘이지나 스타일’을 구축해 가고 있다. 스스로 ‘마이너 감성’이라고 밝힌 그의 이번 신작 역시 범상치 않다.
오는 3월, ‘파과’ 초연을 앞두고 연습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단단함이 느껴지는 답변에서 얼핏 조각의 모습이 스쳤다. ‘강선을 통과한 탄환이 일으키는 회전의 감각이 팔꿈치를 타고 나선형으로 흐른다. 어깨를 흔드는 진동을 견디며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다.’ 조각의 10대 시절을 그린 구병모의 또 다른 작품 ‘파쇄’(2023)의 첫 문장이다. ‘파과’를 향한 이지나의 탄환은 이제 막 총구를 떠났다.
찰나의 예술이 될 ‘조각’의 이야기
원작 소설을 뮤지컬 작품으로 조명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새로운 창작 뮤지컬에 대한 소재를 찾던 중 구병모 작가의 소설 ‘파과’를 추천받았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작품인 만큼, 나 또한 소설 속에 등장하는 탄탄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에 매료되어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특히, 원작의 판타지성을 비롯한 다양한 요소들이 뮤지컬화 되었을 때 획기적이고 신선한 도전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작품을 준비하며 가장 기대되는 장면을 소개한다면?
몸은 점점 쇠약해지지만, 마음은 점차 세상을 향해 열리는 65세 킬러 ‘조각’의 이야기를 다룬다. 조각이 예전 같지 않은 늙은 몸에 슬퍼하고 있을 때,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뭉그러진 과일, 파과를 보며 감정이 터져 나오는 장면이 있다. 이 부분이야말로 작품의 제목과 잘 어울리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올해로 60세가 되어서 그런지 이 장면이 가장 와닿았다.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에게도 내가 느낀 감정이 전해질지 사뭇 걱정되지만, 작품의 감동이 무대에서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원작에는 한 편의 액션 영화를 보는 듯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가 담겨있다. 뮤지컬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중점을 두고 고민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영상 매체와 달리 뮤지컬은 편집할 수 없는 장르다. 어떻게 하면 무대 위 배우들이 영상 매체와 다른 매력으로 돋보일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 주로 신체 표현에 중점을 두고 연습 중이다. 연출가로 활동하기 전, 연기를 공부했던 경험을 살려 배우들에게 연기와 캐릭터에 대해 디렉팅하고 있다.
평소 일상에서 트렌드를 읽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도 궁금하다. 초기 구상 단계에서 영감을 얻는 요소가 있다면?
사람들, 특히 창작진들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는다. 물론, 책과 신문도 좋은 소재가 된다. 트렌드를 읽기 위해 노력한다기보다는 새로운 트렌드가 등장하는 순간, 그것이 언제 저물지에 대한 변별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이지나 스타일’의 뮤지컬 문법
창작 뮤지컬에 꾸준히 힘을 쏟고 있다. 연출가 이지나만의 스타일 혹은 추구하는 방향성이 있다면 무엇인가?
‘뮤지컬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최대한 피하려고 한다. 대중에게 익숙한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의 문법에 변칙을 주어 한국 작품만이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문법을 만들고자 한다. 세월이 지나 내 작품들을 돌아봤을 때 후회되는 작품을 만들지 않는 것이 꿈이다. 한때의 유행을 타지 않고, 보편성과 공감대가 있는 스테디셀러로 남길 바란다.
2015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헤롯왕 역으로 배우 김영주를 캐스팅하며 한국 뮤지컬계에 처음으로 젠더프리 캐스팅을 도입했다.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여성 배우는 왜 매력적인 역할을 할 수 없을까? 능력 있는 여성 배우는 넘쳐나는데 왜 그들에겐 기회가 드물게 주어질까? 대본에는 남성으로 되어있지만, 이 역할에 성별이 중요한 요소인가?’에 대해 스스로 물었을 때, 답은 ‘그렇지 않다’였다. 대부분의 작품 속 캐릭터는 특정 성별이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인간 내면’을 표현하는 인물이다. 성별이 아닌, 다양한 측면에서 캐릭터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와 작품을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다행히 반응이 좋았고, 편견 없이 봐주시는 관객들께 감사했다.
지난해에는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순신’의 연출을 맡기도 했다. 장르를 넘나드는 연출가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파과’의 조각처럼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최근 들어 내가 생각하는 바를 공유하고, 더 좋은 아이디어로 구현해 줄 수 있는 제자를 양성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창작자를 발굴해 나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내가 생각할 수 없는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은퇴할 때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동지로 삼을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제자들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창간 40주년을 맞이한 ‘객석’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객석’의 품격 있는 예술적 기사들이 나에게 굉장히 많은 영감을 줬다. 처음 ‘객석’과 인터뷰하게 되어 매우 기뻤던 순간이 기억난다. 세월이 흐르며 트렌드와 문화가 많이 바뀌겠지만, ‘객석’은 본래의 그 우아함을 끝까지 간직하고, 오히려 오랫동안 트렌디하지 않은 ‘객석’만의 길을 걸어가기를 오랜 팬으로서 진심으로 바란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클립서비스
원작 소설 속으로
소설 ‘파과’ 구병모 저|14,000원|위즈덤하우스
40여 년간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아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 한때 ‘손톱’으로 불리며 빈틈없고 깔끔한 마무리로 방역 작업(살인)을 해왔지만, 몸도 기억도 예전 같지 않게 삐걱거리면서 퇴물 취급을 받는다. 노화의 과정을 겪으며,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고 평생을 되뇌어 온 조각의 마음에도 지키고 싶은 것들이 생겨난다.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 이후, 삶의 희로애락을 외면하고 살아온 조각의 눈에 타인의 고통이 들어오면서, 그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이 싹트기 시작한다.
Performance information
뮤지컬 ‘파과’
3월 15일~5월 26일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원작 구병모, 연출 이지나, 극본 장혜정·이지나, 음악감독 이나영, 안무 김소희,
차지연·구원영(조각), 신성록·김재욱·노윤(투우), 지현준·최재웅·박영수(류/강박사), 유주혜·이재림(어린 조각)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