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Part 1. 1984~2013 ‘객석’ 창간과 그 후 30년을 돌아보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3월 4일 8:00 오전

COVER STORY

 

Since 1984~2024

‘객석’이 함께한 대한민국 공연예술사

 

월간 ‘객석’이 창간 40주년을 맞았다. ‘객석’은 1984년 3월에 시작된 이래 국내외 예술 보도를 아우르며 명실공히 국가를 대표하는 음악·공연예술지로 자리를 지켜왔다. 출판한 권수는 지금까지 480권. 수만 장에 달하는 종이에는 그동안 변화와 성장을 거듭해 온 대한민국 공연예술사의 짙은 희로애락이 묻어있다. 활자를 넘어 기록으로 남은 ‘객석’의 40주년 역사를 돌아본다. 총괄 허서현 기자

 

PART 1 1984~2013년 ‘객석’ 창간과 그 후 30년을 돌아보다

PART 2 2014~2024년 젊어지는 공연계에 맞춰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다

PART 3 2004~2024년 공연 애호가들의 취향 변화에 관한 설문조사

 

40th ANNIVERSARY

 


PART 1 BIRTH & HISTORY

 

1980s

 

1984년 창간부터 2013년까지 ‘객석’의 30년을 돌아보다

 

1980년대는 이념과 냉전의 국경을 넘어 예술의 화합을 펼치고자 했고, 1990년대에는 급성장한 음악계의 흐름을 다양한 기획과 빠른 취재로 담았다. 2000년대에 새로운 세기가 펼쳐지며 정보는 온·오프라인으로 갈라져 흘렀지만, 『객석』은 깊이 있는 정보를 담고자 노력했고, 2010년대에도 21세기를 이끌 젊은 예술가들의 탄생과 활동을 기록해왔다. 1984년 3월에 창간호 이후 2013년까지 ‘객석’의 30년을 살펴본다.

 

1984

예음문화재단에서 『객석』 창간

『객석』은 창간호(1984년 3월) 창간사에 다음과 같이 적음으로써, 음악 및 공연예술 전문지로서의 초석을 다졌다.

“사람의 겉을 다스리는 것은 禮이고, 사람의 안을 다스리는 것은 樂(音樂)’이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이 이 시대의 우리에게 이어오기까지 음악은 항상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지도와 선각자들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 음악·공연예술지 ‘객석’을 창간하게 된 것도 예음이 지닌 뜻과 우리의 음악·공연 문화와의 조화를 함께 살펴보고 싶은 의지입니다. 또한, 음악의 수많은 형식과 내용도 결국 우주 안에 충만한 사람의 메시지로만이 영원할 수 있음을 함께 구현해 나가고자 함입니다. 앞으로 한권 한권을 창간호와 같은 열의와 마지막호와 같은 애정으로 펼쳐 보겠습니다. 뜨거운 성원으로 객석을 채워 주시기 바랍니다.”

『객석』을 창간한 최원영은 경영학을 전공했고, 음악이 좋아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해 플루트를 전공했다. 창간호의 표지를 장식한 플루티스트 알랭 마리옹은 발행인의 취향이 적극 반영된 선택이었다. 1991년까지 『객석』의 기획관리실장과 운영본부장 겸 이사, 편집인 겸 상무이사를 역임한 이상만은 창간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의 형 최원석 씨는 동아건설 사장이었고 당시 동아건설이 세력을 넓히는 시기였어요. 동아건설 국외사업은 최원영 씨가 도맡았죠. 그 결과 리비아 대수로 사업도 성공적으로 따내고.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유산을 자식들한테 분배를 해주는 시기였어요. 최원영 씨에게도 어느 정도 분배가 되었고 음악계를 위해서 새로운 사업을 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잡지 같은 거부터 출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판단했죠. 당시 서울음대 이성재 선생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성재 선생이 작곡가 김성태 선생을 천거해서 최원영 씨의 후견인 비슷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그런데 문제는 당시 잡지출판의 허가를 따내기가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당시 문화공보부에 출판과가 있었고 정기간행물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죠.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송지영 원장의 도움을 받았고, 중간에서 실무적인 진행은 당시 진흥원의 상임이사인 이종덕 씨의 역할이 컸어요. 그렇게 해서 주식회사 ‘예음’은 충무로에 자리 잡았습니다. 충무로에 ‘필하모니아’라는 음악감상실이 있었는데 이곳이 최원영 씨가 운영을 하던 곳이었죠. ”

창간호에는 시대와 예술, 음악과 문화, 사회와 인문을 연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지면마다 드러났다. 이념의 논쟁에서 금기시되던 윤이상이 기사로 전면화됐고, ‘죽의 장막’이라 불리던 중공(중국)의 음악 기행 등을 다루었다. 파리에 거주하는 윤정희는 최초의 통신원으로 다니엘 바렌보임의 현지 취재를 맡았다. 특별부록으로 오디오테스팅 테이프와 서울의 문화지도를 제공했다.

 

1980년대에 창간된 음악잡지들

“올 들어 1백80개 잡지가 새로 창간, 모두 1천 6백 24종의 정기간행물이 경합을 벌이고 있어 잡지 춘추전국시대를 이루고 있다. 지난해 1백84종에 이어 쏟아진 잡지 창간은 레저, 과학기술, 경제, 음악, 건강, 미술 등 전문분야별로 폭넓게 확산돼 잡지 전문화 시대의 문을 열었다.”(경향신문 1984.12.25) “전문잡지가 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지적, 문화적으로 성숙하고 있음을 보여줘 반가운 현상일 수밖에 없다.”(매일경제 1984.4.4)

사람들의 다양해진 취향과 문화를 소비할 수 있는 여유는 다종다양한 잡지 시대를 열었다. 1982년 9월 『피아노 음악』❶, 1984년 3월 『객석』, 같은 해 4월 『음악동아』❷가 창간호를 내놓았다. “음악의 경우 종래의 『월간음악』 『피아노음악』 『음악세계』 등은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가족 잡지 같은 성격을 띠어 왔다. 그러나 『객석』 『음악동아』 등은 일반 애호가들을 독자층으로 하고 있어, 예술가와 일반 독자들과의 사이에 보다 폭 넓은 교류 무대를 마련해 줄듯하다”(경향신문 1984.2.13).❸ 1985년 세광음악출판사에서 월간 『음악교육』을 창간했고, 1989년 『음악저널』이 창간되었다.

 

공연정론지의 틀을 잡아가다

1980년대는 『객석』이 틀을 잡아가던 시간이었다. 음악과 예술에 대한 정론(正論)지를 표방했고, 예술계에 대한 꾸준한 문제 제기를 진행했다. 1984년 9월호 특집 「음악원 탄생은 필요한가」 ❹새 교육기관의 필요를 논한 1984년 9월호로 전문화된 음악가 양성을 촉구했고(이후 1988년 10월호에도 음악원 설립을 주장했다), 10월에는 제1회 객석예술평론상을 제정·공모해 이론적 균형성을 추구하며 새 필진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평론상 제정은 1981년 서울대 음대에 이론전공이 신설되며 훈련받은 음악학도들이 평론가와 학자들이 되는 중요한 창구였다. 자장면이 500원일 때 1천만 원 고료는 큰 액수였다. ❺제1회 객석예술평론상 공모

1984년 12월호에선 한국과 세계의 공연예술계를 둘러보는 특집을 마련했다. 1983년과 1984년에 각각 창간된 『피아노음악』과 『음악동아』가 청각예술을 중심으로 한 클래식 음악이나 국악으로 국한되었을 때, 『객석』은 연극·무용계 등도 함께 살폈고, 미국·독일·영국·이탈리아·홍콩 등의 통신원을 통해 세계 예술계와의 동시대적 행보에 발을 맞췄다. 한 해를 결산하는 특집은 지금까지도 전통이 되어 매년 12월호가 되면 공연예술계 한해를 돌아보고 있다.

 

통권 2호 1984년 4월호 목차

창간호를 내놓고 두 번째 호(1984년 4월)로 자신의 존재감을 세상에 더 드러내고 싶던 『객석』은 세상의 많은 예술과 그 이야기들을 담고자 했다. 이 의지가 4월호 목차에서 느껴진다. 정경화의 오빠가 쓴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이야기, 소설가 최일남의 김소희 명창 이야기, 서우석 서울음대 교수와 경음악 평론가로 불리던 이해성의 심도 깊은 좌담, 이상만 평론가의 서양음악 100년사, 23살 작곡가 진은숙의 앳된 모습과 현재 무용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문애령이 발레 튀튀를 입고 있는 사진, 박용구 평론가가 쓴 아홉 쪽 분량의 특종 ‘윤심덕은 피살됐다?’, 시인 박두진의 글과 그가 단소를 불고 있는 사진, 가야금 명인 황병기가 쓴 ‘동·서양 악기의 만남’, 당시 중앙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고도원의 낙원동 악기상가 르포,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이 제기한 애국가 문제 등등. 해외음악 화제는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 마니아들을 총족시켜주는 소식으로 가득하고, 소설가 박태순은 민달수(멘델스존), 차갑석(차이콥스키), 변도변(베토벤), 박은오(바그너)가 등장하는 음악소설을 게재하기도 했다. 이처럼 공연예술에 관한 별별 사람들의 별별 이야기는 ‘객석’으로 모여 들었다.

 

 

1985

예술가들의 사회 진출과 독자들의 안목을 책임지다

『객석』은 1984년 3월호에 나왔기에 1985년 1월·2월호에서도 획기적인 기획을 보여주어야 했다. 1985년 1월호는 「예술대학 출신자들, 어디로 가나」와 신년 기획으로 음악·연극·무용계를 살폈다.

음악학도들을 위한 알찬 정보를 시리즈로 제공했는데, 1월호부터 「세계의 음악대학」을 통해 세계 명문을 소개했고, 「한국음악의 맥」 시리즈로 국내 음악·예술대학을 탐방했다. 특히 예술대학 졸업생들의 사회 진출 문제는 꾸준한 특집으로 등장했다. 1986년 12월호에 「예술대 졸업생, 어디로 갈 것인가」 ❻❼예술대 출신들의 진로 문제를 다룬 1986년 12월호를 선보였다. ‘전공 살려 일할 수 있는 미개척분야를 찾아라’를 서두로 레코드 기획, 무대미술, 큐레이터, 조명, 예술행정, 공연기획, 직업예술단 단원이 소개되었다. 지금은 공연예술계에서 비교적 일반화된 직업이지만, 정보가 부족하던 당시에 이러한 직업 소개는 대학생 독자들에게 큰 정보가 되었다. 1985년 2월호는 「세계의 현대예술, 어디에 와 있나」 ❽‘세계의 현대예술, 어디에 와 있나’(1985년 2월호)로 미국·독일·프랑스 등의 음악·연극·무용계를 살펴 독자들이 국제적인 안목과 감각을 갖도록 했다. 3월호에는 특집 「예술을 위한 예술행정가가 필요하다」 ❾특집 ‘예술을 위한 예술행정가가 필요하다’로 국내 예술계의 체질 개선과 행정 환경 변화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1985-86

정보와 부록 선물이 만든 쏠쏠한 재미

『객석』은 정보 제공 외에도 공연현장 기획에도 적극적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1985년 예음실내악 경연대회이다. 이듬해인 1986년에는 『객석』의 운영 주체인 예음재단이 실내악 전용공간인 ‘예음홀’을 개관했다.

독자들을 위한 서비스도 일품이었다. 1980년대 잡지는 신문물을 소개하는 잡상(雜商)적 나열과 정보 제공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알렸는데, 1986년 2월호에 「객석 가이드」를 통해 공연예술뿐만 아니라 문화강좌, 음반과 카세트, 오디오, FM, TV 등의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고, ‘별지 부록’으로 채동선의 가곡 「그리워」와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 악보를, 그리고 ‘권중 부록’으로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브로마이드를 제공하기도 했다. ❶‘객석’의 다양한 부록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여름호에 해마다 등장한 음악대학 입시 실기과제곡 소개는 중·고등학교 독자층을 위한 좋은 선물이었다. 서울대, 한양대, 중앙대, 숙명여대, 예원학교, 서울예고, 선화예술중·고교 등 국내 명문의 입시곡이 여름마다 권말부록으로 제공되었다.

1987

지역 예술계를 조명

『객석』은 지역의 예술을 조명하기도 했다. 수도권역에서 발행되는, 일명 ‘중앙지’의 지역 예술계 탐방과 조명은 지역 문화 알리기에 갈증을 느끼던 지역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1987년 4월호는 제2의 도시인 부산의 공연예술계 ❷지역 예술계를 최초로 조명한 1987년 4월호를 집중 조명하며, 지역 기사의 활성화를 알렸다. 지역 음악계에 대한 관심과 정보는 훗날 1989년 전국의 시립교향악단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교향악축제 같은 장을 위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

 

 

1987-88

서울올림픽으로 풍년을 맞이한 예술계 속에서

『객석』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을 빛내는 예술가들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1987년 11월 강수진이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 역사상 최초의 동양인이자 최연소 입단을 앞두고 있을 때, 7월호 표지 인물로 선정해 그녀의 포부를 담았다. ❸발레리나 강수진(1987년 7월)

1987년도에 한국음악가들이 표지를 집중적으로 장식했고, 1988년에는 내한을 앞둔 핀커스 주커만(2월), 로스트로포비치(3월), 안네 소피 무터(5월) 등 해외 음악가들이 대거 등장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인해 국제적인 문호가 개방되었고, ‘문화올림픽’을 표방하며 그 기운이 스포츠계를 넘어 문화예술계로도 흘러들어와 공연예술계는 풍년을 맞았다. 세계인들에게 내놓을 ‘한국적 예술’을 살펴보고자 6월호에 「집중기획-국악계에 새바람이 불고 있다」 ❹특집 ‘국악계에 새바람이 불고 있다’(1988년 6월호)를 마련했다. 국악 공연과 ‘양악기의 우리화’를 이룬 중앙국악관현악단의 소식, 국악계의 현실을 되짚어보는 「철야농성에 들어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을 전했다.

 

1988

이념과 냉전을 넘어 예술을 통한 ‘화합’으로

1988년 8월호 표지에 윤이상의 등장은 파격적이었다. 올림픽으로 인해 세계 각국은 냉전의 지대와 이념을 떠나 서울로 모이고 있었지만, 남·북한의 관계는 여전히 냉랭했다. 1988년 7월 정부는 금기시되어오던 월북작가 작품에 대한 해금(解禁) 조치를 취했고, 『객석』은 8월호에 특집 「남북통일을 위한 예술활동, 어떻게 할 것인가」 ❺특집 ‘남북통일을 위한 예술활동, 어떻게 할 것인가’와 목차(1988년 8월호)를 담았다. 민족적 뿌리의 동질성을 모색하고, 같은 처지의 동·서독 예술교류사(史)를 살폈고, ‘민족음악’과 ‘통일음악’의 역할을 대두하여 ‘대결에서 교류로’의 확대를 모색하는 특집이었다.

서울올림픽으로 인한 문화적 교류와 반경은 더욱 넓어졌다. ‘철의 장막’이라 불리며 사회주의·공산주의권으로 분류되던 소련은 음악사에 있어서는 위대한 작곡가와 연주자를 낳은 ‘음악의 왕국’이었다. 『객석』 9월호는 볼쇼이발레단, 드미트리 키타엔코와 모스크바 필하모닉, 모스크바 방송합창단의 내한 ❻소련 예술단의 내한 소식을 담은 1988년 9월호 소식을 재빨리 다루었다. 그러면서 냉전의 장벽을 무너뜨리지 못한 북한과의 민족음악과 통일음악의 담론적 모색을 꾀하며 「오늘의 북한음악, 그 시상과 작품들」(9월호)를 기사화하기도 했다.

1988년은 어느 해보다 이슈가 많았다. 연말특집 「88예술계를 전망한다」 중 「세계인 앞에 놓여질 한국음악의 상황」(김정길)이라는 부속 기사명에서 알 수 있듯, “세계인”이란 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의 예술과 만났고, 또 앞으로 만날 이들이었다. 이러한 기획과 기사는 앞으로 ‘‘한국적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창의적 화두를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이 특집에서는 공연예술과 미술은 물론 영화·방송·대중가요까지 당시 영향력을 점차 넓히던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파되던 예술까지 다뤄졌다.

『객석』은 이처럼 ‘한국적 예술’을 모색하는 가운데, 남·북이 만나지 않으면 그것은 ‘반쪽짜리 예술’이라는 명분 아래 ‘잃어버린 예술사’ 모색과 수집에 열을 올렸다. 일제강점기부터 음악평론가로 활약했던 「원로 박용구의 삶에 비춰본 한국예술사」가 1988년과 1999년에 걸쳐 연재됐고, 같은 시기에 원로 연극평론가 이강렬의 「잃어버린 공연예술사를 찾는다」도 연재되었다. 1988년 12월호에는 월북작곡가 김순남과 그의 가곡 ‘산유화’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1988-1989

미래의 예술교육을 위한 현황 진단과 대안

서울올림픽으로 인해 문호가 열리며 한국음악가들의 해외 진출에 대한 모색도 시도되었다. 사실 그전부터 한국은 경제성장과 함께 교육열이 높아지며, 예체능 교육의 환경이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84년 4월 창간호를 내놓은 『음악동아』는 「한국인이 판치는 줄리어드」라는 특집기사를 표지에 내걸 정도로 줄리아드 내에는 한국유학생 수가 최고조에 달했다. 1988년 1월호 특집 「심사위원들이 말하는 국제 콩쿠르 입상비결」 ❼특집 ‘심사위원들이 말하는 국제 콩쿠르 입상비결’(1988년 1월호)에서는 조상현(성악), 한옥수(피아노), 김창국(플루트), 박민종·이종숙·정경화·강동석(바이올린)가 자신들의 현장 경험을 공유했다.

중요한 것은 향후 음악가들을 성장시키기 위한 ‘교육’이었다. 『객석』은 창간 4주년 기념으로 「자녀의 음악공부에 대한 예술학교 학부모 의식조사」(1988년 3월호)를 대대적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매년 불거지는 음악·예술대학의 입시비리를 놓고 특집 「예술대학입시, 이대로 갈 것인가」(1989년 2월) ❽❾특집 ‘예술대학 입시, 이대로 갈 것인가’(1989년 2월)를 시작으로 이어진 3월호에서도 「예술대 입시와 교육 개선 방안은 없는가」를 특별 기획으로 마련했다. 그중 「콘서바토리, 이런 장점이 있다」에서는 이강숙 등을 비롯한 음악학자들이 새로운 예술학교의 모색과 기획을 논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론은 훗날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탄생을 위한 암묵적인 데이터로 쌓였다.

 

1989년 표지를 장식한 카라얀과 아바도

1989년의 표지를 가장 많이 장식한 이는 지휘자로, 제임스 러바인(2월), 주세페 시노폴리(7월), 카라얀(8월), 게오르크 솔티(9월), 클라우디오 아바도(11월), 정명훈(12월)이다. 특히 1989년 7월 16일, 카라얀이 서거하자 『객석』은 8월호에 카라얀을 집중조명했다. 그가 숨을 거둔 잘츠부르크 아니프 별장 현지 취재를 비롯해 서독(1990년 독일 통일)의 언론 기사들을 모았고, 카라얀/베를린필의 명반들을 분석했다. 차세대 베를린필의 후임에 대한 현지 언론도 신속하게 올렸다. 그리고 11월호 표지로 베를린필의 새 수장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곧바로 등장했다. 선출 배경, 아바도의 삶과 예술, 디스코그래피, 역대 지휘자들을 분석했다.

 


1980s

1990s

 

1980-89

오디오와 음반의 홍수 속 정보망 구축

오디오의 보급과 유행은 1983년 10월 『오디오와 레코드』 ❶‘오디오와 레코드’, 1987년 『스테레오 뮤직』 ❷‘스테레오 뮤직’으로 이어졌다. 오디오·레코드 전문잡지는 일종의 유행이 되어 “고만~3만부의 고정독자를 확보, 착실하게 부스를 늘”렸고, “이들 잡지의 성공에 힘입어 『계간 스테레오』 『프로사운드』 등 계간지와 『스테레오 가이드』 『오디오월드』 『하이비』 등 연간지”가 창간을 앞두기도 했다.(경향신문 1989.3.2.)

이러한 오디오 애호가들에 대해 이건용은 “그들에게 음악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개인적인 취미”라며, 이들의 음악적 관심은 국내 음악계로 이어지지 않고 있으며, “최고의 유명한 연주가들만을 기호하기” 때문에 “서양음악에의 종속을 낳을 위험을 지닌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한국의 음악상황에 대한 사회적 반성」).

하지만 『객석』은 이들의 밀실에서의 음악 문화도 공론화시켰다. 「나의 오디오 편력」은 물론 『객석』을 애독하는 개인 공간으로 들어가 「객석이 있는 집」 같은 시리즈를 통해 오디오와 독서라는 개인화된 음악 청취를 ‘상상의 공동체’로 엮어내는 기사를 꾸준히 진행했다. 또한 영상문화의 발달로 인해 1980년대 후반에는 수입되는 영상물(공연실황물)을 「아트비디오 시어터」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리뷰하고, 「새음반 새 테이프」 코너를 통해 신보를 꾸준히 소개했다.

 

1990

음악가들의 전성기를 담아 잡지의 전성기로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여행자유화가 시작되고, 1990년대가 되어 정치·경제를 비롯하여 문화의 보폭이 커졌다. 해외 유학생과 내한하는 음악가의 수는 더욱 증가했다.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한 CD는 고가의 미디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악감상의 주요 매체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음악잡지의 부록으로 유통되기도 했다. 1990년대는 이러한 독자들의 성향에 맞춰 다종다양한 잡지가 발간되었다.

1990년을 앞둔 1989년 12월호는 정명훈이 표지를 장식했다. ❾1989년 12월호 표지 정명훈 그해 5월 바스티유 오페라단에 입성한 해였다. 1990년의 화제는 정명훈/바스티유 오케스트라의 내한이었다. 7월호에 파리에서 만난 정명훈의 인터뷰가 실렸고, 8월호에는 내한 공연 리뷰가 실렸다.

1990년대가 되며 『객석』이 주목한 것은 클래식 음악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유럽과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이었다. 정명훈은 물론 1990년 8월호 표지를 장식한 금난새는 러시아의 「레닌그라드 심포니를 지휘하고 돌아온 금난새」 ❿지휘자 금난새(1990년 8월호)라는 제목으로 인터뷰가 나갔다. 같은 호에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최현수의 모스크바 현지 인터뷰도 게재되었다. 11월호의 특집 「세계무대에 진출한 한국과 일본, 아시아 음악가들」 ⓫1990년 11월호로 기세를 이어나갔다. 서양과 출발부터 다른 동양의 음악교육을 다루었고, 한국과 일본은 물론 그 외의 아시아권 음악가들의 세계 무대 진출을 소개했다.

표지 인물의 직군은 그 호의 특집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일례로 표지 인물로는 음악가들이 가장 많았으나, 1990년 12월호에는 자매 안무가 김복희·김화숙이 표지에 등장했고, 중요 기사에서도 무용의 비중이 높았다. 현대무용의 대가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의 첫 내한 공연(11월)의 리뷰와, 서울예술단의 ‘백두산신곡’ 등을 다루었다.

 

1991

음악으로 한민족 뿌리 찾기

1991년에 나온 『객석』의 기사 중 현장감이 높은 기사는 1월호에 게재된 「송년통일전통음악회」 리뷰 ⓬송년통일전통음악회(1991년 1월호)였다. 1990년 12월 분단 4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전통음악 교류를 위한 음악회가 예술의전당(콘서트홀)에서 개최되었다. 황병기의 초청으로 성사된 공연으로, 북한에서 전통음악가가 30명이 파견되었다. 1988년부터 윤이상을 필두로 내세워, 민족음악·통일음악 운동과 담론을 논했던 『객석』은 평양민족음악단 서울 공연과 무대에서 처음 선보인 북한의 개량(전통)악기들을 소개했다.

이러한 여파 때문이었는지 2월호의 표지 인물은 소리꾼 안숙선 ⓭소리꾼 안숙선(1991년 2월호)이 장식했다. 서구문화는 위협할 만큼 빠르게 유입되는 회오리 속에서 국악계의 대중스타였던 안숙선의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

『객석』은 이념이 갈라놓은 국경을 예술로 뛰어넘고 봉합하고 있었다. 1991년 6월호의 표지는 당시 36살의 북한 지휘자 김일진 ⓮북한 지휘자 김일진(1991년 6월호) 이었다. 도쿄에서 열린 환일본해 국제예술제에서 만나 인터뷰했고(환일본해_한국·중국·일본·러시아·북한으로 구성된 지역), 남북전통음악 합동연주회 기사가 실렸다. 1992년 3월호에는 도쿄 ‘한겨레 콘서트’를 지휘한 조총련계 지휘자 김홍재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1992-1993

예술과 기술이 만나다: 백남준·CD문화

한국의 공연예술계가 보다 넓어지고 다양함을 추구하던 때, 1992년 8월 12일 작곡가·전위예술가·예술철학자이던 존 케이지가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9월호에 「끝없는 변혁 시도했던 영원한 전위주의자」가 게재되었고, 원화랑에서 추모 전시를 열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을을 가진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이 표지를 장식했다.⓯

1990년대에 『객석』은 변화의 시류를 읽고 담아냈다. 1992년 12월호 집중기획 「CD 10주년-재생음악 소프트웨어, 오늘과 내일」로 콤팩트디스트가 바꾸고 있는 현주소를 살피는가 하면, 같은 호 표지에 등장한 로스트로포비치 기사에서 그의 걸작 CD들을 총망라하기도 했다. 또한 1993년 1월호에는 「음악과 과학」으로 전자음악, 현대음악, 컴퓨터음악, 디지털 기술, 활용실태 등을 통해 컴퓨터음악을 소개했다(1996년 1월호에 「국내 클래식 레코딩, 어디까지 왔나-250억 시장. 인력도, 교육도, 반성도 없다」를 담았다).

 

1990년대 음악잡지 전성시대

1994년 1월 『월간음악』❸이 복간(재창간)되고, 『레코드 리뷰』❹가 창간되었다. 『월간음악』은 1970년에 창간됐으나 263호로 종간했다가 통권 제264호로 복간된 것. “잡지 한권 값은 6천 5백원으로 기존 잡지와 비슷하지만 부록으로 ‘도이치 그라모폰 콤팩트디스크’ 한 장을 끼워주”었는데, “음반의 국내 최저 보급가가 7천 5백원선임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판매 방식”(한겨레 1994.1.16)이었다. 1995년 신년호에는 ‘재창간 1주년 특별부록’으로 30장의 CD를 제공하기도 했다.

악기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피아노에 대한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1995년 『리틀 피아노』가 발간되기도 했다. 1982년 발간된 『피아노음악』의 자매지로 음연(音硏)에서 발행했다. 1984년 창간한 『음악동아』는 판형을 바꾸어 1995년 1월호를 내어 제2창간을 단행했다. 이 호에는 영화예술 1백년을 기념해 최신 영화음악의 진수만을 골라 CD로 제작·배포했다.

1995년 『음악춘추』❺, 『클래식 피플』❼, 『레코드 포럼』이 창간되었다. 『레코드 포럼』은 레코드 전문지 디아파종(프랑스) 등과 계약을 맺고 각종 정보를 담았다. 1996년 『고전음악』이 창간됐다. 격월간 클래식음악 비평전문지를 표방했으나 창간호 이후에 발행되지 않았다. 1996년에는 『뮤지카 노바』❻❽가 창간되었다. 전문가들의 영역으로만 구축되다시피한 20세기 현대음악을 위한 격월간지로 존 케이지부터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를 다루기도 했다.

1997년 월간 『CD가이드』가 창간되었다. 오늘날 공연기획사로 잘 알려진 마스트미디어는 현악전문지 월간 『the Strad』 한국판을, 오순화(비올라·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비올라 전문지 『올라 비올라』를 창간하기도 했다.

 

1992 ‘춤의 해’ 목격자가 되다

1992년 무용의 대중화를 위해 국내 9개 단체장들이 모여 1992년을 ‘춤의 해’로 정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7월호 표지를 「춤의 해, 세계무대를 향해 뛰는 남정호」를 다루어, ‘춤의 해’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숨가쁜 힘겨루기, 누구를 위한 ’춤의 해‘인가」(2월호), 「‘춤의 해’ 내분추태, 누구의 책임인가」(3월호) 등의 비판조 기사가 많았다.

 


1990s

 

1994

정명훈·윤이상음악제· 세계 30대 오케스트라 스토리

1994년 정명훈의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직 사임은 취임(1989) 때만큼이나 큰 반향을 일으켰다. 8월호에 「바스티유 오페라 감독직 사퇴 압력받는 정명훈」과 9월호에 「바스티유 해임 조치에 제소로 맞선 정명훈-프랑스 언론도 부당성 시사」을 게재했다.

같은 해의 8월호의 표지에는 윤이상이 등장했다.❶ “이제 돌아가 고국의 흙에 입맞추고 싶다”라고 말한 그의 이름을 딴 음악제가 개최를 앞둔 시간이었다. 1994년 가을에 예정된 윤이상음악제는 『객석』을 발행하던 예음문화재단이 기획한 대형음악제였다. 윤이상은 한국 방문을 희망했지만 잘 이뤄지지 않았다.

『객석』은 풍성한 연재물로 독자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다. 1994년 1월호에 시작한 ‘세계 30대 오케스트라 집중탐구’는❷연재 ‘세계 30대 오케스트라 집중탐구’(1994년 1월호) 당시 음반으로만 접할 수밖에 없던 악단에 대한 세밀한 정보를 제공한 인기 연재였다(아시아 악단이 없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1995

한국음악가만으로 세계적인 무대가 완성되다

1995년은 광복절이 30주년을 맞은 해로 문화계가 대대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벤트를 제공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1995년 8월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잠실 주경기장에서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대향연이 열렸다. 정경화·정명화·강동석·조수미·사라 장(장영주) 등 스타 연주자들이 정명훈의 지휘로 호흡을 맞췄다. 세계적인 무대를 해외 연주자들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만들어낼 만큼 한국 음악계의 수준은 높아져 있었다. 1995년의 표지의 많은 수를 한국음악가들이 채웠다. 정경화(5월), 김영욱(6월), 김성태(11월), 그리고 ‘빅3 소프라노’로 신영옥·조수미·홍혜경(9월)이 등장했다.

더불어 『객석』도 광복의 의미를 음악사(史)에서 찾고자 8월호에 「해방공간의 음악, 월북 음악가의 현재」, 「해외동포 아리랑, 그 동질성을 찾는다」, 그리고 모스크바에 오른 한국 가곡의 밤 공연 소식을 담았다.❸광복 후의 음악사를 조명한 1995년 8월호

1995년 11월 3일 작곡가 윤이상이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창간호부터 윤이상을 집중조명해온 『객석』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객석』은 1990년 1월호부터 「바로크 시대부터 현대까지 작곡가 집중탐구」를 매호 선보였다. 첫 회는 바흐였고, 하이든(2월), 모차르트(3월), 베토벤(4월), 파가니니(5월) 등으로 이어졌는데, 1993년 12월호 마지막회 주인공으로 윤이상을 선정했다.

 

1996

내한 지휘자들의 향연·국립국악원 소개

1996년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이 유독 많은 해였다. 4월호 표지 인물로 샤를르 뒤투아(프랑스 국립교향악단),❹ 5월호는 볼프강 자발리쉬(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❺ 9월호는 리카르도 샤이(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❻가 표지를 장식했다. 11월호에는 존 엘리엇 가디너(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트)가 표지 인물로 등장했고, ‘고음악’이라 불리던 원전연주가 음반계를 통해 신선한 붐을 일으키고 있었기에 같은 호에 「원전연주의 모든 것」을 특집으로 수록했다. 같은 해 소극장만 있던 국립국악원에 대극장인 예악당이 개관했다. 그해 1월호에 김덕수가 표지 인물로 나왔고, 2월호에는 「한국의 인간문화재, 그 허와 실」로 전통예술계의 현주소를 진단했다.

 

1997

오페라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며

1997년은 위대한 작곡가들의 탄생과 서거를 기념하는 기사가 많았다. 1월호에는 탄생 200주년의 슈베르트와 서거 100주년의 브람스의 음악세계를 다루고, 8월호에 「탄생 200주년을 맞은 도니제티의 오페라 세계」가 실렸다.

무엇보다 오페라 탄생 4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오페라사상 최초의 오페라이자 지금도 공연되는 몬테베르디 ‘오르페오’에 앞서 현재 전승되진 않지만, 최초의 오페라로 빛을 본 야코포 페리(1561~1633)의 1597년 작 ‘다프네’를 기원으로 삼아 1997년은 일명 ‘오페라 400주년의 해’를 위한 여러 기사가 나왔다. 현재 풍월당 대표인 박종호는 당시 음악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몽세라 카바예와 호세 카레라스의 이야기를 담은 「오페라 무대의 명콤비」 첫 연재를 1월호부터 시작했다. 창간 13주년을 맞은 3월호의 특별 기획기사는 「오페라 400년, 탄생에서 미래까지」였다.❼오페라 400주년을 기념한 1997년 1월호 오페라 지휘자와 성악가는 물론 존 아담스(작곡)와 로버트 윌슨(연출), 그리고 한국 오페라의 현재와 미래를 분석하는 대대적인 특집이었다. 이 해의 표지에도 성악가들이 유독 많았다. 바바라 보니(3월), 체칠리아 바르톨리(6월), 알라냐와 게오르규(7월)가 실렸다. 11월호에는 「오페라 연출의 모든 것」❽특집 ‘오페라 연출의 모든 것’(1997년 11월호)을 담았고, ‘특별취재’로 베를린·런던·밀라노·뉴욕·서울·대전·대구 등 「5개국 화제의 오페라 7편」을 실었다.

 

세상의 변화-이념 대립의 종점 · 월드뮤직 · 탱고 집중 탐구

세상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IMF로 공연은 물론 문화예술 시장이 얼어붙었고, 이념에 따른 냉전 구도가 무너진 상태에서 『객석』은 1980년대처럼 ‘민족’ ‘통일’ 등의 구호를 내세운 행동적 음악론보다 통일 현장에 실질적으로 적합한 음악론을 담았다. 8월호의 「남북통일과 음악」이 대표적인 경우다.

12월호에는 「1997년 음반계 결산」을 담았다. 『객석』은 여전히 오디오 기기와 음반에 관한 정보를 담았지만, 오디오·음반 관련 잡지들의 성행과 음반사에서 발행하는 무가지로 인해 공연 보도에 보다 집중했다.

무엇보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앞으로 음악 청취의 방향성과 저변이 보다 넓어질 것을 예상했다. 『객석』은 5월호에 ‘집중탐구’로 「세상의 모든 음악-월드뮤직」을, ‘기획 특집’으로 「탱고음악」 편을 소개했다.❾월드뮤직과 탱고를 다룬 1997년 5월호 특히 월드뮤직은 음반으로 살펴보기도 했지만, ‘인터넷으로 본 월드뮤직’을 마련해 이제는 인터넷이 음악 청취와 정보로서의 중요한 도구가 되어가고 있음을 암시했다.

 

1998

IMF. 음악과 예술로 나라를 걱정

1997년에 시작된 IMF의 여파로 1998년의 경제권은 얼어붙었다. 문화예술계의 많은 활동이 축소되었다.

1998년 『객석』의 표지 인물로는 예전과 달리 한국 음악가들이 많은 호를 차지했다. 그만큼 급성장한 음악·예술계의 성과였지만, 한편으로 경제 한파로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고 용기를 북돋워야 했다. 사라 장(1월)을 비롯해 전국 9개 도시 순회 연주회를 갖는 백혜선(3월), 라벨 전곡 연주의 백건우(4월), 음악인생 25주년 맞아 독창회를 갖는 최현수(5월), 전국 7개 도시를 순회하는 서혜경(11월), 볼쇼이 오페라의 주역을 맡은 박미혜(12월)가 장식했다. 당시 전곡 연주나 순회 공연에 대해 분석해보면 유학과 콩쿠르를 통해 성장한 한국음악가들의 존재와 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해외 음악가와 악단들의 내한 공연이 IMF로 취소되면서 이러한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당시 내한하는 해외 악단이나 앙상블과 많은 협연 무대를 가졌던 김대진도 “당시 취소되던 빈 자리를 부지런히 메우며, 역시 나도 성장하던 때였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IMF로 인한 출연료 인하로 화제 모은 아쉬케나지의 인터뷰(3월호) 등이 화제가 되었다.❿아쉬케나지의 IMF 출연료 인하를 다룬 1998년 3월호

 

『객석』 표지의 최연소 인물은?

1994년, 한쪽에서는 정명훈과 윤이상 같은 거장의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다른 한쪽에서는 ‘영재’와 ‘천재’를 조명하는 기사가 실렸다. 대표적인 경우가 1994년 6월호 표지를 장식한 14살의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1980년생)였다. KBS교향악단과 협연을 앞두었던 장영주 기사는 지금까지 통틀어 ‘역대 최연소의 표지 인물’로 기록된다.

 

 

한 세기가 저물며, 한 세기를 정리한 연재물

1997년 1월호 표지를 장식했던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는 그해 9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한 세기를 일구고 풍미한 거장들이 시간의 노을과 함께 저물고 있었다. 『객석』은 1998년 2월호에 「탄생 1백주년 맞은 브레히트와 음악」으로 브레히트의 생애, 음악, 연극, 음반을 다루고, 5월호에 「탄생 1백주년 맞은 홍난파 음악세계 재조명」과 그를 둘러싼 논쟁들을 정리하며 역사 속의 위인들을 호출했다.

무엇보다 한 세기를 정리해야 했다. 이를 위해 『객석』은 「30인이 선정한 20세기 빛낸…」 시리즈로 10인의 지휘자(4월), 피아니스트(5월), 바이올리니스트(6월), 첼리스트(7월), 남성 성악가(8월), 여성 성악가(9월)을 선정했다. 이 시리즈가 끝나는 9월호에는 「다시 살아나가는 거장들의 명반 모음」을 통해 20세기에 기록되고 기억해야 할 ‘거장’의 시간을 재조명했다.

 

 


1990s

2000s

 

1999

밀레니엄을 향하며, 한 세기를 정리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정보통신망 고도화 추진계획 및 PC통신 및 인터넷 이용활성화 대책을 수립했다. PC통신 동호회가 만들어지고, 온라인 정보의 유입 속도와 폭이 넓어졌다. 수도권과 종이책이 독점했던 정보들은 통신망을 따라 전국 각지와 PC 화면으로 분화되었다. 다가올 2000년, 그러니까 21세기를 위한 밀레니엄 프로젝트가 진행되었고, 독자들의 경향이 바뀌고 있었다.

클래식 음악과 공연예술을 둘러싼 환경도 변화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는가 하면, ‘깊이에 대한 강요’를 통해 온라인 세상에 없는 심도 있는 지식을 다뤄나갔다. 『객석』도 「세계왈츠여행」(1월), 탄생 100주년의 풀랑크(2월), 「탄생 250년, 괴테와 공연예술」(3월), 「탄생 200주년, 푸슈킨과 공연예술」(5월)을 살펴 보았다.

1999년, 한 세기는 저물고 있었다. 1999년 3월 12일에 타계한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이 4월호 표지에 나왔고, 같은 호 특집으로 「서거 10주년, 카라얀을 다시 본다」가 실렸다.❶메뉴인과 카라얀의 서거를 다룬 1999년 4월호

그리고 새로운 세기가 열리고 있었다. 5월호 표지에 「쇼팽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 갖는 김대진」이, 6월호에는 「전국 6개 도시 순회연주 갖는 첼리스트 장한나」의 일본 현지 취재가 실렸다. 장한나의 인터뷰와 함께 6월호에는 특집 「무반주 첼로 음악의 세계」도 함께 실렸다. 7월호에는 카운터테너의 젊은 기수 안드레아스 숄이 표지에 등장했고, 같은 호에 「베를린 필 새 상임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실렸다. 지나온 세기든, 펼쳐질 세기든 한국의 음악가들은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2월호 ‘특집’으로 「세계 유명 악단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연주가들」을 다루었다.

‘밀레니엄 시리즈’를 통해 저물어가는 한 세기를 정리하던 『객석』은 「7인의 리뷰어가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명반 50선」(10월), 「50인의 평론가가 선정한 21세기를 향한 젊은 거장들」(11월)을 담았다.

 

2000

새로운 세기에 적응하며-일본문화개방 후 일본 클래식 시장 탐구

2000년, 21세기가 시작되었다. 『객석』은 그간 보여준 ‘집중 탐구’나 ‘집중 기획’ 같은 특집보다 공연 현장 중심의 취재 기사를 많이 담았다. 그러한 가운데 「새 천년 예술의 화두-즉흥과 변용」(2월)으로 음악·재즈·국악·연극·무용에 나타나 즉흥적 요소들을 살피기도 했다. 클래식 음악에 집중했던 예전과 달리 『객석』에서 연극과 무용의 비중이 더욱 풍성해졌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일본문화 개방정책에 따라 양국의 정식적인 교류가 활성되었다. 8월호의 「세계 최대 음악시장, 일본 클래식의 오늘」은 ❷일본 클래식계를 다룬 1998년 8월호 이러한 시류가 반영된 특집이자, 그간 등한시해온 일본공연계의 현황·연주가·작곡가·공연장을 세밀하게 살핀 기사였다. 여러 음악을 한데 모아 선보이던 송년음악회에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 주요 레퍼토리로 잡아가자 12월호 ‘송년 특별기획’으로 「자유와 화합의 메시지, 베토벤 ‘합창’」을 다루기도 했다.

『객석』은 연극·무용 외 레코드 코너의 비중도 높였다. 1990년대 대중적으로 보급되던 CD는 이제 일반적인 매체로 자리 잡았다. 특히 CD의 음향과 음질의 기술력 향상은 음악의 ‘이동’뿐만 아니라 음악의 ‘표현’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비평과 리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1980~1990년대에 오디오와 음반을 둘러싼 다양한 기사를 낳아오던 『객석』은 음반과 기술력에 집중하며 화제반을 골랐고, 인터넷 문화를 통해 더욱더 넓어진 월드뮤직과 재즈 음반에 대한 집중적인 리뷰도 시작했다. 12월호에 「올해의 음반 2000」을 마련했는데, 베를린필을 이끄는 사이먼 래틀이 최고 순위를 득점했다. 이 해 3월호에는 창간 16주년 기념 특별부록으로 「CLASSIC 2000·봄」 CD를 제공하기도 했다.

 

2001

베르디와 오페라 · 클래식 음악의 장르적 확대

플라시도 도밍고는 2001년에만 표지 인물로 두 번 등장했다(지금까지 볼 수 없는 기록이다). 회갑을 맞은 그가 1월호에 단독 인터뷰로 나왔고, 같은 해 6월 스리 테너(파바로티·도밍고·카레라스)의 내한으로 다시 한번 등장했다.

매호를 ‘오페라 탄생 400주년’에 초점을 맞췄던 1997년처럼, 2001년 1월호 도밍고의 등장은 서거 100주년을 맞은 ‘베르디의 해’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1월호의 특별기획은 「VIVA VERDI!」로, 베르디의 작품·생애·베스트 연출작·국내 공연사·스페셜리스트·명반 등을 소개했다. 같은 호에는 「오페라 연출의 거장 괴츠 프리드리히 타계」도 실렸다.❸

21세기가 되며, 장르적 횡단과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계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은 더욱 짙어졌다. 순수예술와 아카데미즘이 대중예술과 만났고, 「대중예술의 미학」을 저술한 박성봉 같은 대중예술 연구자나 평론가들이 여러 진영에서 순수/대중예술의 만남과 횡단을 논했다. 『객석』은 3월 창간 17주년 기념호의 특집으로 종주국의 클래식계가 처한 현황을 살핀 「클래식은 죽었는가?」 ❹특집 ‘클래식은 죽었는가?’(2001년 2월호)를 담았다. 표지에서는 대중 예술가들의 등장이 눈에 띄었다. 3월호에 기타리스트이가 영화음악가인 이병우가❺, 10월호에 김민기가 등장했다.

특집도 이러한 변화와 맞물렸다. 8월호에 「21세기 영화음악을 말한다」,❻‘21세기 영화음악을 말한다’(2001년 8월호) 9월호에 「아프로-쿠반 음악의 모든 것」, 12월호에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실렸다.

 

2002-2003

음반 해외 직구 · 통영국제음악제 · 말러 대장정

21세기를 맞이하던 흥분이 가라앉기 시작하던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세계는 뜨거웠다. 1998년 일본문화 개방정책 이후 일본과 가진 이벤트였고, 정보의 유통과 흐름은 인적·물적 자원이 직접 오가던 1988년 서울올림픽과 달리 인터넷을 통해 신속하고 다량으로 흘렀다. 음악과 예술에 관심이 있다면, 활발해진 인터넷을 통해 해외 소식을 국내 언론이나 정보 매체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접할 수 있는 시대였다. 「인터넷 온라인 음반 주문 대작전-컴퓨터 네트워크로 전 세계 음반을 구해보자」(2002년 5월) 같은 기사는 해외 음반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도를 높였다.❼‘컴퓨터 네트워크로 전 세계 음반을 구하다’(2002년 5월호)

『객석』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온 유산과 시리즈를 정리하며 ‘미래’를 준비해나갔다. 1999년 ‘윤이상 음악의 밤’과 2000·2001년에 열린 통영현대음악제를 모태로 하여,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통영국제음악제의 새로운 시작을 2002년 4월호에 「의미 있는 성공, 남아 있는 과제」 기사로 담았다.❽통영국제음악제(2002년 4월호) 2003년 10월호에는 임헌정/부천필의 「말러 결산 스케치」가 게재되었다. 20세기 말인 1999년 11월 27일, 그들은 교향곡 1번으로 그 시작을 알렸고, 2000·2002년(2001년은 임헌정의 건강 문제로 잠시 중단)을 지나 2003년에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시간이었다.

 

연극배우 윤석화. 『객석』을 인수하다

예음문화재단에서 발행되던 『객석』을 ‘돌꽃컴퍼니’가 인수하며 1999년 10월호를 시작으로 제2기로 돌입했다. 발행인은 1980년대에 통신원으로, 1990년대에 본지 연극 기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배우 윤석화가 맡았다. 표지에는 ‘객석’이라는 한글 제호와 영문명 ‘auditorium’이 병기되었고, 10월·11월·12월호 표지를 각각 안너 빌스마(바로크 첼로), 호세 카레라스(테너), 김광민(재즈 피아노)가 장식했다. 연말 호에는 『객석』 사옥이 위치한 대학로 ‘정美소’ 인근을 담은 『객석』 「동숭동 예술 지도」를 제공했고, 인수자가 주력해온 연극계도 돌아보고자 ‘밀레니엄 시리즈’의 마지막회로 「누가 21세기 연극을 말할 수 있는가」를 담았다.

 

 

2000년대의 음악잡지들

세계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문이 넓어지고, 소비의 방식도 다양해진 1990년를 지나 2000년이 되면서 인터넷 문화는 강력한 정보의 홍수를 만들었다. 온라인을 통해 다양한 정보들이 오갔다. 이와 함께 종이책의 운명을 점치는 ‘책의 죽음’, 정보를 제공받던 독자를 능동적 정보 탐색자와 편집자로 만들어주는 인터넷과 ‘검색 문화’ 등이 음악을 둘러싼 책과 읽기 문화에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2001년 영국의 음악전문지 『그라모폰』의 한국판이 나왔다. 영어판 번역 기사와 국내 기사를 각각 섞은 비율이었다. 같은 해에 나온 『에듀클래식』은 2016년 월간 『REVIEW』로 재창간되었다.

하지만 인터넷 환경으로 인한 미디어의 변화 속에서 잡지의 운명은 1980~90년대보다 폭과 양이 대폭 축소되었다. 과거에 전성기를 자랑하던 음악잡지들은 “최근 대형 음반사들이 새 음반 수입과 제작을 줄이면서 광고 수급의 차질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동아일보 2001.2.25). 2002년 『CODA』가 창간되었고, 월간 『the Strad』를 운영하던 마스트미디어는 2003년 『인터내셔널 피아노』 『콰이어어&오르간』 한국판을 펴냈다. 이후 음악잡지의 창간은 뜸했고, 정보의 공백은 인터넷이 대신했다.

 


2000s

2010s

 

2003-2006

음악·예술 페스티벌의 성행

2004년경부터 대학과 대학원에 문화콘텐츠학과가 신설되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1993 ~1998)에 본격적으로 실시된 지방자치제와 김대중 정부(1998~2003)의 문화 수준 향상을 통해 지역마다 공연장과 지역 콘텐츠, 그리고 이를 표방할 수 있는 축제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객석』도 1980년대부터 지역 예술계와 예술가를 조명해왔지만, 광역시(직할시) 중심의 기사가 많았고, 다른 장르에 비해 지역의 문화재가 중심이 된 전통예술에 비중을 많이 두었다.

2003년 지역 최초의 오페라전문 공연장인 대구오페라하우스가 개관하여 「대구오페라하우스 한국의 밀라노, 오페라의 르네상스룰 꿈꾸다」(2004년 1월호)를❶, 같은 해 대전문화예술전당이 완공되어 「대전문화예술의전당 개관-대전은 이미 새로워지고 있다」(2003년 11월호) 등을 통해 지역 예술계를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러한 바람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2006년 8월호의 표지를 장식한 이는 대관령국제음악제 예술감독 강효였다.❷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사라 장)의 스승이자 미국 명문에서 오랜 시간 교편을 잡아 온 그에게 『객석』은 한국 음악축제의 방향성을 묻고 들었다. 같은 호에는 콜마르, 아비뇽, 몽펠리에 등의 해외 축제 소식이 실렸고, 그 외 탄천페스티벌, 예술의전당 실내악페스티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주국제관악제, 서울프린지페스티벌 등의 소식이 담겼다.

 

2004-2008

젊은 피 수혈 완료!

『객석』 선정 유망주들의 활약 21세기 들어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다. 특히 1993년에 문을 연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영재교육은 음악 교육과 콩쿠르 입상에 큰 변화를 주었다. 특히 해외 유학을 거치지 않은 ‘토종’ 음악가 양성을 위한 노력은 몇몇 음악가들의 활약으로 빛을 보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2004년 10월호를 장식한 손열음이다. 1986년생인 그녀는 뉴욕필과의 데뷔를 앞두고 『객석』과 인터뷰를 가졌다.

표지에 젊은 피가 수혈되기 시작했다. 하버드 대학 입학으로 관심을 모으던 장한나(2005년 8월), 2006년 리즈 콩쿠르에 입상한 김선욱(2007년 2월)❸, 젊은 클래식으로 공연계에 불을 지핀 리처드 용재 오닐과 앙상블 디토(2007년 6월)❹, 신시내티 심포니 부수석 최나경(2007년 8월)❺, 세계 오페라극장을 장악하는 임선혜(2008년 6월), 젊은 연륜을 갖춘 임동민(2008년 9월)❻ 등이 표지를 장식했다. 연주 분야 외에도 작곡가 진은숙(2007년 9월)❼의 등장은 그간 유럽의 ‘고전’만 떠올리던 독자들에게 ‘새로운 고전’을 생산하는 예술가의 존재를 보여주었다. 2003년에 한국메세나협회가 발족되어 성장하는 새 세대에 대한 신개념의 후원과 지원을 실행했다. 『객석』은 특집 「한국 메세나의 현재」(2004년 8월)을 담기도 했다.

콩쿠르 입상과 이후의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추고, 음악계를 변화시킬 청년들의 대거 등장으로 『객석』도 2008년 1월호부터 「월간객석 선정 유망주 10인」을 특집으로 마련했다. 공연 현장과 학계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용해 음악뿐만 아니라 연극, 무용, 전통예술 유망주 10인을 선정해 그들의 활약을 주목하게 했다. ❽‘객석’의 유망주 선정(2008년 1월호)

 

2008-2009

인터넷에 없는 정보로, 더욱더 깊이 있게

독자와 관객들의 취향은 인터넷 세상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었다. 이에 반기라도 들 듯 『객석』은 2008년 11월호 특집 「아날로그의 부활, LP를 찾아서」를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LP를 아날로그 시대를 대변하던 유산으로 살펴보았다.

공연을 전후로 생산되는 기사들은 공연계의 흐름을 보여주었고, 꾸준히 진행되는 연재물들은 『객석』의 정체성을 잡아 나갔다. 2008년에 박종호는 「오페라 연출가 열전」을 연재했다.❾박종호의 ‘오페라 연출가 열전’ 첫편(2008년 1월호)이를 통해 독자들은 지휘자나 성악가의 전유물이라 생각되던 오페라를 ‘연출가’의 시선과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김주영은 2007년부터 2010년까지 「피아니스트 NOW」를 연재했고, 재즈 칼럼니스트 하종욱은 2000년부터 2011년까지 「재즈의 영웅」를 연재했다. 특히 하종욱의 연재는 10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현재도 이 기록을 깬 필자는 없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객석』 표지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내한 공연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는 성격이 강했다. 그만큼 정보에 굶주려 있었고, ‘연주 없는 글’을 통해서라도 서양 문화예술의 대표적인 클래식 음악계와 동시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문화적 욕망의 반영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활발해진 내한 공연을 앞두고 해당 예술가들의 인터뷰를 진행하기 시작했는데, 이처럼 국내 공연계를 둘러싼 내한 공연이 활발해진 것은 공연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와 기획사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객석』은 2009년 2월호에 「뮤직 비즈니스, 그들이 사는 세상」을 특집으로 마련했다.

 

2010

CD의 마지막 보고서·바로크 음악 조망 · 책 속의 책(CORE) 신설

2008년 1월호부터 신년호마다 유망주를 선정해온 『객석』은 2010년 1월호 표지 인물로 그해에 선정된 유망주들을 내세웠다. 실력을 다지며 콩쿠르를 준비하거나, 연이은 콩쿠르 입상으로 차세대 예술가로 물망에 오른 이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 경력에 ‘객석 유망주 선정’이라는 문구를 부지런히 넣었다.

2010년 8월호 표지인물은 취임 2주년을 맞은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 이소영이었다.❿ 그간 성악가가 단장직을 맡았던 과거와 달리 연출가 중심의 오페라단 운영과 작품 경향의 변화를 담았다. 8월호의 특집 「CD시대에 대한, 어쩌면 마지막 보고서」⓫CD 시대에 작별을 고한 특집(2010년 8월호)는 콤팩트디스크(CD)가 이끌어왔던 ‘뉴미디어 시대’를 정리하는 쓸쓸한 특집이었다. 종이책과 라디오가 인터넷이라는 시청각 디지털 미디어에 의해 아날로그 미디어가 되고 있던 때에 12월호는 KBS클래식 FM과 공동기획으로 「바로크 100-시작도 끝도 아닌 100곡의 바로크 음악」을 마련했다. 『객석』은 독자들에게 CD를 제공해 아날로그의 감수성을 오랜만에 제공했다.

21세기가 되고 10년이 흐른 2010년. 『객석』은 경량화된 인터넷 정보와 차원이 다른 ‘깊이’와 ‘무게’를 담은 기사를 다뤄야 했다. 이를 위해 10월호부터 ‘CORE’(코어) 코너가 생겼다.⓬인문학적 무게를 잡은 ‘코어’ 페이지 인터뷰나 공연 소식을 재빨리 전하던 페이지와 달리 인문학 정신으로 무장한 코너였다. 컬러 도판과 확연히 차이 나는 종이와 흑백 사진으로 코어 페이지는 ‘책 속의 책’으로 기능했다. ‘이영진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음악이 보낸 편지’ ‘재즈의 영웅’ ‘20세기를 빛낸 극작가’ ‘윤중강의 아트·아시아·아티스트’ 연재물과 현장의 각종 리뷰를 심도깊은 시선으로 읽어내 담았다.

그러면서도 시대의 변화를 등한시할 수 없었다. 대구·경주·울산·부산·창원의 공연장으로 이어진 철도를 체험하고 마련한 10월호 특집 「KTX 타고 떠나는 음악여행」은 여행과 문화가 결합된 기사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2011

변화된 환경을 다시 읽는 ‘특집’이 살아 숨쉬다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 알렉산더 리브라이히가 2월호 표지를 장식했다.❶ 1980~90년대에 윤이상을 집중 조명하던 『객석』은 그의 고장 통영에서의 음악제를 봄호에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시작했다. 같은 호에는 브루크너를 ‘이달의 작곡가’로 선정해 면면을 다루었다. 『객석』은 1990년대도 ‘작곡가 집중 조명’ 시리즈를 진행한 바 있다. 그때는 작곡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경로로 ‘음반’을 내세웠다면, 음악계가 급성장한 21세기에 『객석』은 작곡가의 작품들을 주요 레퍼토리로 내세우고 있는 공연 현장으로 안내하곤 했다. 그래서 브루크너 작품에 주력하던 제주도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이동호가 함께 소개되었다.

스승의날이 있는 5월호에는 첼리스트 양성원이 그의 스승 야노스 스타커를 직접 만나 인터뷰했고, 노장이 표지를 장식했다. 5월호 특집에서는 강충모·김남윤·김대진·박수길·신수정·양성원·정명화·정태봉·황병기 등의 인터뷰가 음악학도의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2000년대에 음악가들의 인터뷰와 리뷰로 다종다양한 페이지를 만들어오던 『객석』은 2011년부터 굵직한 특집으로 안방을 채웠다. 교향곡과 교향시(4월), 동요(6월), 국립국악원·국립극장의 창작국악 현주소(7월), 인터넷으로 들어가고 있는 클래식 음악 현주소(8월), 한국 오페라의 역사(9월),❷조수미와 오페라 특집을 다룬 2011년 9월호 종교음악(10월), 국내 클래식과 월드뮤직 축제(11월)가 특집의 중요 소재가 되었고, 12월에는 그간 정명훈/서울시향이 이끌어온 말러 열풍을 정리했다.

 

2012·2013

한국음악계의 ‘미래’를 담고, ‘세계’로 뻗어나가다

『객석』의 표지가 산뜻해졌다. 디자인과 분위기가 바뀌었고, 무엇보다 표지를 장식하는 음악가들의 연령대가 젊어졌다. 한국음악계를 이끌어나갈 차세대가 집중적으로 소개되었다. 장한나(1월)❸, 임동혁(2월)❹, 이자람(3월)❺, 손열음(5월)❻, 리처드 용재 오닐(6월)❼, 김태형(8월)❽, 클라라 주미 강(10월)❾이 2012년 표지를 장식했다. 2010년대가 되며 『객석』에는 젊은 음악가들의 콩쿠르 입상 기사가 많아졌다. 단신 기사든, 여러 쪽의 기사든 젊은 음악가들의 등장과 이들의 포부를 통해 『객석』은 그들의 목격자이자 기록자임을 자처했다.

2013년 4월 『객석』은 유럽판을 창간했다.❿ 그간 유럽 통신원으로 활약해온 영국인 데스먼드 추윈이 편집장을 맡았다. 유럽판에는 세계 콩쿠르와 오페라 극장, 공연 무대의 판도를 뒤바꾸고 있는 한국음악가들의 인터뷰가 영문으로 실렸다. 그만큼 한국 음악계와 예술계는 국경을 넘어 소개될 만큼 전문화되고 한층 성장해 있었다. 잡지 속 종이에는 당대의 문화, 사람들의 취향, 시대의 흐름과 유행이 스며 있다. 따라서 『객석』은 이 시대 예술계의 흐름과 시간을 담은 저장고이자, 시대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거울은 빛을 굴절시키고 반사하여 다른 곳을 비추기도 한다. 지금 이 시대의 음악잡지는 녹록지 않은 걸음을 걷고 있지만, 언젠가 시대의 빛을 받고 굴절시켜 우리가 보지 못하던 문화와 역사의 사각지대에 빛줄기를 던질 것이다. 이러한 믿음 아래 『객석』은 음악잡지의 전통과 역사를 껴안고, 도래할 미래를 예견하며 나아가고 있다.

송현민(편집장) 사진 객석DB

 

2009년 객석예술인상 신설, 객석예술평론상 부활

2009년에는 제1회 객석예술인상이 제정되었다. 첫 회에 첼리스트 양성원이 수상했고, 2010년에는 지휘자로 활약하며 수원시향을 이끌던 피아니스트 김대진이 수상했다. 1984년에 시작한 객석예술평론상은 『객석』의 새로운 필진은 물론 공연 현장에 밀착된 현장 전문가를 양산하던 등단 제도였다. 이를 거친 이들은 오늘날에도 공연예술계 현장 평론가와 학계 전문 연구자로 자리 잡고 있다. 1991년에 중단된 객석예술평론상이 2010년에 부활해 공모에 들어갔다. 『객석』은 이를 위해 2009년과 2010년에 「객석, 평론가를 만나다」 시리즈로 음악·연극·무용계의 원로 평론가들을 직접 만나 평론의 역사와 기능, 미래를 담았다. 2010년 방혜진을 시작으로 새로운 얼굴의 신진 평론가들이 공모작을 통해 등단했다.

 

2010년대의 음악잡지들

2015년 『La Musica』(현재 미발행)가 무가지로 창간되었고, 2016년 『월간 색소폰』, 2019년 『Classic J』가 세상에 나왔다. 오디오를 통한 음악감상의 환경도 인터넷과 유튜브, 어플리케이션의 등장으로 많이 바뀌었다. 그러한 가운데 2020년 일본 오디오 매거진 『Audio Accessory』(현재 미발행) 한국판, 무크지 『풍월한담』이 창간되었다.

 

양성원이 만난 87세의 야노스 슈타커 인터뷰(2011년 5월호) 중에서

1973년, 일곱 살 때 접한 야노스 스타커의 내한 공연은 내 생애 첫 첼로 연주회였고, 10년의 시간이 흐른 후 17세가 되던 해 스위스 로잔에서 그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했다. 이듬해 나는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 인디애나 음대로 갔다. 양성원 저도 선생님과의 잊을 수 없는 첫 레슨이 기억나는군요. 제가 17세 대 스위스 로잔에서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 1악장을 처음으로 선생님 앞에서 연주했습니다. 선생은 제 연주를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리며 “브라보!”를 외치셨어요. 그러고는 제 옆을 지나쳐 피아니스트를 안아주시면서 “이렇게 자기 맘대로 하는 첼리스트를 반주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실력이네!”라고 얘기하셨어요(웃음). 야노스 슈타커_그랬나요? 사람들이 예전엔 내가 좀 고약했다고 하더군요(웃음). 내가 바이너에게서 배운 것처럼, 그렇게 음악에 대한 겸손함을 배운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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