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Editor’s Note
현과 현이 마주한 순간
다니엘 도즈/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스(협연 양인모)
3월 8일 롯데콘서트홀
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맑고 투명한 루체른 호수. 이곳에서는 1938년부터 이어져 온 전통의 클래식 음악 축제, 루체른 페스티벌이 열린다. 1956년 루체른 음대의 볼프강 슈나이더한(1915~2002) 교수가 제자들을 선별해 창단한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스는 같은 해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데뷔 후, KKL 루체른 콘서트 시리즈와 루체른 페스티벌의 객원 앙상블로서 지금까지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올해는 모차르트부터 스위스 작곡가 리하르트 뒤부농(1968~)에 이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들고 한국을 찾았다.
3월 8일, 롯데콘서트홀의 무대가 현으로 가득 채워졌다. 현악 군의 특징을 살린 오케스트라지만, 악장이자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다니엘 도즈가 중간 규모의 교향곡 연주를 위해 오케스트라의 범위를 확장하여 지금의 체임버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자리 잡게 됐다. 첫 곡인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1번은 고전적인 느낌의 산뜻한 연주로 이날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어진 곡은 비외탕의 바이올린 협주곡 5번. 무대 한가운데 선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는 초반 2분 남짓 흐르는 현악 군의 연주에 간결한 고음과 특유의 감각적인 기교를 더해 현과 현의 풍성한 조화를 이뤄냈다. 앙코르로 선보인 이자이 바이올린 소나타 5번 2악장과 파가니니 카프리스 6번 역시 ‘현의 진검승부’를 마주하기 충분한 선곡이었다.
2부 첫 곡인 뒤부농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카프리스IV-그래야만 한다’는 베토벤이 현악 4중주 16번 마지막 악장 첫 페이지에 적어놓은 메모(“그래야만 한다”)를 모티프로 삼은 작품이다. 국내 관객에게 첫선을 보이는 곡인 만큼, 현악기의 파워와 이를 받쳐주는 악기 간의 조화가 잘 어우러지는 연주를 들려줬다. 마지막 곡은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K551로, 오랜 시간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온 악장 다니엘 도즈의 역할이 특히나 도드라졌다. 이번 공연에서 현의 앙상블을 선보인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스는 오는 6월,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와 내한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한다. 이들이 들려줄 베토벤은 어떨지, 앞으로의 행보에 기대가 모아진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롯데문화재단
단단한 균형이 주는 감동
윤한결/국립심포니(협연 장 에플람 바부제)
3월 9일 롯데콘서트홀
국립심포니와 지휘자 윤한결(1994~)이 2022년 교향악축제 이후 두 번째로 만났다. 윤한결의 성장이 기대되는 공연이었다. 또한 라벨의 두 피아노 협주곡을 하룻밤에 들려줄 피아니스트 장 에플람 바부제(1962~)의 협연으로 공연 전 로비는 이미 설렘이 가득했다.
윤한결의 지휘는 힘이 있고 명료하다.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뒷모습에서도 그 지시를 알아볼 수 있다. 가장 탁월한 점은 밸런스다. ‘풀치넬라 모음곡’은 현악과 목·금관이 자주 교차하는데, 모난 곳 하나 없이 음악이 유연하게 흘러갔다. 동시에 강조할 악구가 분명하여 실황으로 듣는 맛을 살려냈다. 강조되는 구간은 설득력이 있어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다만, 목·금관이 중심이 되는 제5곡 토카타부터 박자가 조금씩 무거워지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첫 번째 협주곡인 G장조 M83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지만, 스트라빈스키의 작품만큼 두드러지는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바부제의 연주는 그 모든 것을 가려주기에 충분했다.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로 여겨지는 2악장은 관객이 숨을 죽이고 감상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식지 않는 관객의 환호로 그는 피에르 상캉(1916~2008)의 ‘피아노를 위한 무브먼트’를 들려주고 내려갔다.
2부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에서 오케스트라 완성도는 더 높았다. 도입의 콘트라바순이 내는 음색을 피아노로 그대로 옮겨 내어 관객의 집중력을 깊게 끌어냈고, 대화하듯 등장하는 목·금관 패시지를 모방하는 피아노 선율은 선명했다. 피아노가 베이스 음역을 담당하여 저음역에서 구르는 소리를 낼 때, 든든한 울림이 홀에 퍼져 가슴이 떨렸다. 좋은 연주 뒤에 이어진 앙코르 라벨의 ‘물의 유희’와 마스네의 ‘토카타’도 훌륭했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모음곡은 첫 곡에서 보여주었던 윤한결 장점이 더욱 살아났다. 묘사적인 작품을 표현하는 능력이 탁월하여, 지휘가 작품과 잘 어울렸다. 그가 지휘하는 고전 작품은 어떨지 궁금해지는 것을 보면, 국립심포니와의 이번 만남은 성공적이었다.
글 이의정 기자 사진 국립심포니
삶을 위해 선택한 죽음
연극 ‘비(Bea)’
2.27~3.24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
방 안, 작은 침대. 혼자 눕기엔 충분하지만, 그것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세상의 크기가 되기엔 너무나도 좁다. 주인공 ‘비’는 그 작은 침대 위에서 경쾌하게 말한다. “사랑하는 엄마,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죽고 싶어.”
단출한 무대에 관객의 눈길을 끄는 건 단연 벽이다. 비가 생활하는 침대 뒤엔 ‘금이 간’ 회색 벽에 ‘반짝이는’ 귀걸이가 한가득 걸려 있는데, 만성피로증후군을 앓는 비가 ‘체력이 허락하는’ 날에 침대 위에서 귀걸이를 만들어 걸어두었다는 설정이다. 색색의 조명이 사용될 때면 벽과 귀걸이의 대비가 더 두드러진다. 찬란했어야 할 비의 인생과 그럼에도 무기력하게 삶을 흘려보내야 함으로써 상처받는 마음을 비유하고 있기에.
간병인 레이와 어머니 캐서린은 비가 도움을 받지 않으면 생활할 수 없다고 묘사하지만, 관객이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연극 시작부터 침대 위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며 등장하기 때문. 극의 중반, 돌연 힘없이 누워있는 비가 등장한다. 웃고, 떠들고, 춤추고, 소리치던 비는 그 어디에도 없다.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고 불분명하게 “레이”라고 부르는 것이 고작이다. 작품에 담긴 메시지가 비로소 드러나는 순간. 이후부터 ‘활기찬 비’와 ‘환자 비’가 교차하며 삶과 죽음의 의미와 무게를 느끼게 한다. 객석에선 훌쩍임 사이에 내내 작은 웃음이 터진다. 극을 무겁게 만들지 않고자 곳곳에 유머를 숨겨둔 덕분이었다.
캐서린과 레이가 준비한 ‘마지막 파티’가 시작되고, 비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염원하던 죽음에 이른다. 비는 처음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온 방 안을 누비다가 빛 너머로 사라진다.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연기 덕분에, 관객은 ‘손키스’를 날리며 떠나는 비를 막을 수 없다. 그가 더 나은 삶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음을 모두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살 권리가 있는 것처럼, 잘 죽을 권리도 있을까. 내가 내 생을 마감해도 되는 명확한 순간이 있다면, 죽음 바로 직전에는 허락되는 걸까. 안락사에 대해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지만, 작품을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할 뿐 그 답을 강요하진 않는다. 그게 이 작품이 지닌 다정함이다.(2월 28일 관람)
글 김강민 기자 사진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꾼’들의 극
소리극 ‘체공녀 강주룡’
3.8~17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소리꾼의 극답다. 전통공연예술단체 ‘판소리공장 바닥소리’가 2023년 초연으로 선보인 소리극 ‘체공녀 강주룡’이, 올해 재연으로 돌아왔다.
전통적 의미에서 소리꾼은, 혼자서 모든 요소를 감당하는 종합예술형 인간이다. 소리꾼은 춘향도, 몽룡도, 방자도 되어야 한다. 해설자도 되었다가, 쉬이- 부는 바람 소리 같은 효과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판소리의 맛은, 지나치게 몸짓을 부풀린 창극의 영역에서 잃어버리기가 쉽다. 무대미술과 동선, 조명이 곁들여진 창극은 화려한 흥겨움을 주지만, 소리꾼이 맡은 종합적인 예술 영역은 줄어들 게 되어있다.
그런 면에서 ‘체공녀 강주룡’은, 소리꾼다움을 잃지 않은 소리극(창극)임에 반갑다. 주인공 ‘강주룡’을 총 네 명의 배우(강나현·김은경·임지수·정지혜)가 맡는다. 여기에 네 명의 배우가 더 더해져, 그들 모두가 한 사람 강주룡이었다가, 여덟 명의 출연진이기도 했다. 그 경계를 넘나드는 연출의 얼개가 훌륭해서, 마치 작품 전체가 한 소리꾼의 내면을 가시화한 듯했다. 젊은 소리꾼들의 적극적인 동선과 훌륭한 창 또한 극의 완성도를 높였다.
‘체공녀 강주룡’은 소설 원작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고공 농성을 벌인 노동 운동가, 강주룡(1901~1931)이라는 실존 인물이 소재다. 소설부터 간도 사투리의 말맛이 살아있어, 어쩌면 소리극이 될 운명을 타고난 작품이다. 작품은 전통 장단 위에서 서사에 꼭 맞는 흐름을 탄다. 대본을 분석해 의미를 잘 표현할 장단을 정한 후에 멜로디를 입히는 순서로 작창 작업을 이어간다는 판소리공장 바닥소리의 방식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독립운동을 하는 저보다 어린 신랑을 먼저 보내고, 파업에 실패하여 을밀대 지붕 위에 오른 여성의 이야기. 눈물을 자극하는 신파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작품은 비장하지도, 쓸데없는 감상에 젖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린 신랑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항일 운동이지만 사람을 쏘는 것을 고민하는 섬세한 감정선과, 그 과정을 거쳐 조금 거칠지만 여전히 당찬 강주룡에게 편견 없이 빠져든다. 이토록 ‘쫀쫀한’ 몰입을 선사하는 음악극이라니. 진정한 ‘꾼’들의 솜씨에 한없이 감탄하며 극장 문을 나서게 되는 작품이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판소리공장 바닥소리
CLASSICAL MUSIC
정명훈/KBS교향악단 ‘Choral I – 베르디 레퀴엠’
죽음 앞에서 다시 마주한 거장의 음악 세계
3월 7일 롯데콘서트홀
올해 KBS교향악단은 정명훈과 두 번에 걸친 연주회에서 새로운 파트너십을 선보인다. 공연은 베르디 ‘레퀴엠’과 로시니 ‘스타바트 마테르’(7월 12일, 롯데콘서트홀)라는 대규모 레퍼토리를 정명훈의 해석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이미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더구나 객원 지휘자가 합창단까지 동원하는 대규모 공연을 두 차례나 진행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로, 그가 KBS교향악단의 제5대 상임지휘자를 역임(1998)하기 직전인 1997년, ‘오텔로’ 콘체르탄테를 진행했던 과거가 떠오르기도 한다.
우선 일찌감치 매진 사례를 기록한 이번 공연은 2016년 정명훈이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합창단을 이끌고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 전곡과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했던 공연장(롯데콘서트홀)에서 다시 선보이는 공연인 만큼, 그의 향기가 진하게 남아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더군다나 2013년 정명훈/서울시향의 전설적인 베르디 ‘레퀴엠’ 공연 이후, 11년 만에 접하는 연주인 만큼 기대감이 증폭된 것도 사실이다. 이번 공연의 솔리스트는 박미자(소프라노), 방신제(메조소프라노), 김우경(테너), 심기환(베이스)으로 모두 안정적인 가창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김우경의 활약이 대단했다.
제1곡 ‘레퀴엠과 키리에(Requiem et Kyrie)’의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Introitus)’에서 약음의 현악기와 합창단의 나지막한 울림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며 정명훈의 템포가 진중하게 변화했다. 동시에 레퀴엠이라는 단어의 합창 딕션만으로도 특징적인 호소력을 전달하는 합창의 어조, 첼로의 낭창한 운율감 등 현악 파트의 디테일한 표현력에 강한 집중력이 실렸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어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sion)’가 시작되며 솔리스트들과 오케스트라 각 파트들이 유기적인 대화와 함께 본연의 호소력을 발산했다. 곧이어 이 곡의 핵심인 ‘속송(Sequenza)’으로 넘어가며, 금관의 화력과 큰 북의 연타로 ‘진노의 날(Dies Irae)’이 시작되었다. 정명훈은 심판의 무서운 기운과 간절한 호소가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총주로 전달되게끔 전체의 움직임을 용트림하듯 거세게 밀어붙임과 동시에 세부 파트의 앙상블과 구분력 또한 흐트러지지 않게 컨트롤했다.
장면이 진행될수록 성숙하고 깊어진 정명훈의 작품에 대한 이해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기억해주소서(Recordare)’와 이후 제5곡 ‘하느님의 어린 양(Agnus Dei)’에서 펼쳐진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의 섬세한 음색, 울먹이듯 호소하는 현악기의 독백에 오페라 이상의 감동을 실어내는 지휘자의 의도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기록된 책(Liber scriptus)’에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호흡이 틀어지며 잠시 흔들리기도, 오케스트라 관악 파트에서 지속적인 실수가 보이는 등 기술적인 문제가 없진 않았지만, 정명훈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정면 돌파 앞에서는 그다지 큰 흠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범사에 숙연해지고 감사하게 된, 정명훈의 음악 세계에 다시 한번 감동할 수 있었던 이른 봄날의 밤이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든 정명훈과 KBS교향악단의 연주가 그의 다양한 음악 세계를 광범위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다양한 레퍼토리에 대한 청중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길 희망한다.
글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KBS교향악단
OPERA
오페라 ‘이상의 날개’
오늘의 정서로 노래한 시인 이상의 삶
3월 8~10일 국립극장 달오름
이상(1910~1937)의 작품을 문학 이외의 예술 언어로 바라보는 시도는 꾸준히 있어 왔다. 그의 작품에 사용된 언어가 일상적인 이해의 범위에 있지 않기에 해석의 자유도가 매우 높고, 이는 사고를 가두는 상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2023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지원 사업으로 제작된 창작오페라 ‘이상의 날개’도 그러한 작품 중 하나로, 오늘날의 정서를 담은 음악으로 이상의 삶을 노래했다.
‘이상의 날개’는 난해한 시로 대중에게 외면받고, 두 여성을 만나 삶의 기쁨을 누리다 고통을 받기도 하며, 새 삶을 위해 도쿄로 떠났지만, 사상범으로 오인되어 죽음에 이르렀던 이상의 모진 인생 여정을 그린다. 작품은 그의 시를 가사로 사용하며 삶의 순간들과 연결하는 시도를 한다. 한편으로는 그 반대이기도 하다. ‘김해경’(이상의 본명)이라는 실상과 ‘이상’이라는 허상으로 분리해, 그의 문학은 허상의 작품으로 규정된다. 사실 김해경이 생전에 상식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러한 설정은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다른 인물들이 분량에 비해 서사적으로 뒤에 있다. ‘금홍’은 서사의 절반을 담당하지만, 무채색의 무대에서 홀로 붉은색으로 두드러져 균형을 잃은 듯하고, ‘변동림’은 전체 서사에서 분리되어 있으며, ‘친구J’와 ‘친구K’는 주변을 맴돈다. 이렇게 설정한 이유는 주인공의 의존도가 높고, 시와 여성, 그리고 일제로부터 발생하는 갈등이 독립적이어서 극적 유기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필립 글래스(1937~)의 오페라 ‘사티아그라하’와 같이 각 장면의 미장센과 음악적 효과에 집중하는 것이 이를 효과적으로 구성하는 한 방법일 것이다. 반면, ‘경찰’은 선명한 캐릭터와 집중도 높은 가사로 극의 흐름을 이끌며 장면의 분위기를 주도해 깊은 인상을 주었다.
작품은 음악적으로 아리아·듀엣·중창·합창 등 익숙한 넘버 오페라의 형식을 바탕으로 한다. 클래식 음악부터 뮤지컬 넘버, 영화음악, 재즈, 국악, 그리고 민요를 넘나드는 음악적 표현을 들려주며, 단편의 반복을 통해 정서를 강화한다. 이러한 폭넓은 양식의 혼합은 이상을 바라보는 오늘날의 시각이겠지만, 정서의 흐름을 단절시킬 위험성이 있다. ‘이상의 날개’는 각 양식의 특징을 대비해 음악을 극적으로 만들기보다는, 이를 적절히 왜곡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데 성공하며 이 우려를 해소한다. 그리고 각 양식이 장면의 정서와 가사 등에 연결되어 캐릭터화되고, 캐릭터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드라마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일조한다. 반복 속에서 변화하는 이상의 시와 제스처의 반복으로 진행되는 음악 또한 적절히 결합한다.
하지만 대중의 이해도가 높은 보편적인 음악언어가 다다이즘에 입각한 아방가르드적인 작가(이상)의 문학작품에 적합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는 대중의 이해를 넘어 희화화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는 것은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음악의 활용뿐 아니라, 대상에 대해 공유된 정서를 연장 혹은 확대하는 방법으로도 구현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덧붙이자면, 객석 뒤에 있는 콘솔에서 소음이 발생해 감상에 방해가 되었다. 오픈된 콘솔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거나 공간을 차폐하여 무대의 소리 이외에는 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유경오
CLASSICAL MUSIC
바딤 콜로덴코 피아노 독주회
한길 깊숙한 마음속에서 일어난 감정들
3월 14일 금호아트홀 연세
깊은 물속에서 무언가 떠오르려 한다. 낯익은 것이지만 낯선 것. 이전에 알았던 것이지만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건져 올려야 할까,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어야 할까.
올해 금호아트홀 연세의 ‘인터내셔널 마스터즈’ 시리즈 그 두 번째 주인공은 피아니스트 바딤 콜로덴코(1986~)다. 우크라이나 키이우 태생의 콜로덴코는 2013년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콩쿠르 위너’의 이미지로 알려졌지만, 그의 음악은 하나의 테두리로 섣불리 재단할 수 없는 검푸른 물 같은 깊이를 갖고 있었다.
대중에게 익숙한 멜로디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1악장은 콜로덴코의 손끝에서 질감도 형체도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빚어졌다. 어스름한 물속의 ‘낯선 무엇’. 루바토와 드문드문한 공백은 ‘익숙한 것’을 기대했던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아무의 아무것도 아닌 베토벤, 누구의 무엇도 아닌 피아노 소나타. ‘월광’을 이렇게까지 다르게, 그럼에도 설득력 있게 칠 수 있을까 감탄하는 사이 1악장의 끝 음은 희미하게 자취를 감췄다. 2악장의 잔잔한 슬픔 또한 모든 음에 각각의 루바토가 있다고 할 정도로 강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3악장의 스케일에서는 악보에 인쇄되어 있으나 표현하기 힘든, 많고 긴 이음줄들이 끈끈하게 표현되었다. 특히, 흔히들 무언가를 생각하며 탁자를 두드리는 정도의 작은 움직임만으로 거친 포르테를 구현해 낼 때는 그 힘의 효율적인 사용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이번 공연에서는 총 두 작품이 연주되었는데, 앞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과 미국 작곡가 프레데릭 제프스키(1938~2021)의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에 의한 36개의 변주곡이었다. 2021년 타계한 동시대 작곡가의 곡답게 대중적인 요소와 현대음악적인 요소가 혼재되어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레시피도 훌륭한 요리사에게 가면 훌륭한 요리가 나오는 법. 휘파람까지 불며 연주해야 하는 이 복잡한 요리는 콜로덴코와 만나 번쩍번쩍하는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굉장한 음악으로 탄생했다. 짧고 강력한 주제 선율은 파편화된 퍼즐, 데칼코마니, 숨은그림찾기, 그리고 백남준의 ‘다다익선’(1988)과 같은 각기 다른 주장의 섬광이 되어 관객의 뇌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즉흥적인 연주를 포함한 36개의 변주곡이 차례로 등장했다 사라지고, 피아노의 거의 모든 건반과 음량이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모두 시험받은 후에야 콜로덴코는 조용히 멈추어 섰다. 36개의 변주곡이 끝나고, 작품의 시작을 알린 칠레 민중가요의 주제가 다시 들려올 때 사람들은 ‘단결’한 ‘민중’의 ‘승리’(혹은 패배하지 않음)를 조금 덜 의심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앙코르는 두 곡, 베토벤의 피아노를 위한 바가텔 10번 Op.119와 7개의 바가텔 3번 Op.33이 연주되었다.
글 양경원(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금호문화재단
DANCE
순헌무용단 ‘반가: 만인의 사유지’
고뇌에서 정화로 이어지는 몸의 여정
3.1~3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순헌무용단은 전형적인 프로시니엄 무대인 아르코예술극장에 색다른 시각을 덧입힌다. 예술감독인 차수정·이영일 연출이 의기투합한 이번 공연은, 입장부터 평소 스태프들만이 이용하는 숨겨진 통로를 거쳐야 한다. 로비에 옹기종기 모여 의식을 치르듯 시작해, 객석 아닌 무대의 가장 깊은 곳으로 안내받는다. 관람 인원 제한된 전시장처럼 줄을 서면 전혀 다른 공간감이 관객을 반긴다. 무대는 검은 막으로 좁은 길처럼 분리되어 있다. 관객은 세 구역을 ‘ㄹ’자 동선으로 따라가며, 살아 움직이는 그림들을 만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올해의신작’으로 공연된 ‘반가: 만인의 사유지’는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서 출발했다. 1,400여 년 전 유물을 주제 삼아 여러 이미지로 춤을 보여준다. 물·돌·모래와 같은 자연물을 이용해 때로는 고요한 번뇌를, 너그러움을 담아낸다. 사유하는 조각상, 즉 ‘생각하는 몸’의 변주들이다. 제시된 ‘생각하는 몸’에선 로댕의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이 먼저 떠오른다. 쪼그라들듯 웅크린 채 온몸으로 번민하는 형상이다. 거대 조각 ‘지옥의 문’ 일부인 만큼 발밑에 온갖 지옥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반면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경험과 인식의 범위를 벗어난 평온함이 사람들을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한다. 순헌무용단 ‘만인의 사유지’는 로댕에서 시작해 지옥 문의 반대 방향에 있는 숭고한 미소, 그 정화의 길로 나아간다.
로비에서의 짧은 의식을 거쳐 무대 뒤편으로 들어서면, 공중에 매달린 돌에 가장 먼저 시선이 간다. 무용수들은 제자리에 앉아 무거운 덩어리를 주시하거나 그 아래 허공을 허우적댄다. 손아귀에서 우수수 빠져나갈지언정, 돌 아래 소복이 쌓인 모래를 쥐어보기도 한다. 자기 내면을 향한 그 눈 속에는 번민과 고뇌가 똬리를 틀고 있다. 누군가는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린다. 그 각각의 피사체를 따라 심상을 들여다보며 무대의 반대편 끝에 다다른다.
코너를 돌면 전혀 다른 풍경이다. 온통 푸른 바닷속을 고래가 유영한다. 세월이 지나간 자리마다 폐허로 저물어온 육지와 달리, 바다의 장엄함은 변치 않는 가치와 영속성, 초월적인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 공간을 둘러싼 미디어아트 영상 안에서 무용수들은 해양의 일부가 된 듯 움직인다. 관객은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바다에 빠지듯 사유에 잠기길 바라는 창작자의 의지가 느껴진다.
긴 길의 끝에서 다시 방향을 바꾸면, 대형 수조가 등장한다. 찰박거리는 얕은 물 속에서 누군가는 앉고, 누운 채로 움직이며 젖어 든다. 이 공간은 객석으로 돌아가 관람하는 마지막 메인 무대가 되기도 한다. 그때 무용수들은 엄지와 검지를 맞붙인 채 반복적으로 수행하듯 움직이거나, 장대의 휘어짐을 핵심으로 하는 아주 느릿한 춤을 춘다. 거대한 부처상이 비치는 가운데 더디고 완만한 장면들은, 궁극적으로 명상과 정화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수조에서 연결되는 네 번째 구역은 출연자 대기실에 마련됐다. 준초이(최준) 작가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사진이 걸려 있고, 나무와 욕조 주변에는 갖가지 소원이 적힌 듯한 공이 가득하다.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뒤로 하고 다시 소박하고 세속적인 소원 기도를 바라본다. 그럼에도 출구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 가벼워진 듯한 해소의 기분은 착각일까.
글 윤대성(월간 댄스포럼 편집장)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옥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