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찬 카네기홀 데뷔 리사이틀, 우아하게 떠오른 쇼팽의 영혼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3월 28일 8: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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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찬 카네기홀 데뷔 리사이틀 2.21

우아하게 떠오른 쇼팽의 영혼

 

청년은 차분했고, 관객은 환호했다. 뉴욕은 임윤찬의 성소가 되었다

 

 

©Chris Lee

2월 21일, 임윤찬이 카네기홀 데뷔 리사이틀을 가졌다. 그가 무대에 올린 두 개의 연습곡(Op.10·25)은 쇼팽을 대표하는 곡으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르고 걸러 순수함의 극치에 이른, 도저히 쇼팽일 수밖에 없는” 작품들이다. “리스트의 작품이 미래를 조망하는 음악이라면, 쇼팽은 과거를 돌아보며 동경하는 음악이다.” 최근 임윤찬(2004~)이 남긴 말이다. 그가 쇼팽을 관통하여 바라보는 세상이 궁금해졌다.

 

 

 

 

속주 사이로 빛난 선율(연습곡 Op.10)

검정 수트의 임윤찬이 피아노를 향해 걸어 나왔다. 박수가 쏟아졌지만, 무대 중앙으로 향하는 그 몇 걸음 동안 관객을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마치 아무도 없는 텅 빈 무대에 마지막 연습을 하기 위해 내딛는 걸음 같았다.

첫 곡은 쇼팽의 사후 출판된 ‘3개의 새로운 연습곡’이었다. 제목대로 세 개의 짧은 연습곡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다른 쇼팽의 연습곡들에 비해 현란한 기교를 보여주거나, 깊은 서정성이 부각되는 곡은 아니다. 오히려 단순하고 제한된 소재로 뼈대를 올린 건축물과 같다. 연주자의 입장으로 보면 굳이 여지가 별로 없는 이 작품을, 왜 출발 지점으로 삼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습곡 Op.10은 후반부에 연주된 Op.25에 비해 대중 친화적이다. 임윤찬은 가장 많이 알려진 3번의 톤을 적절한 어둠으로 잡았다. 폭풍과도 같은 제4번을 질주한 후, 일명 ‘흑건’으로 불리는 제5번에 안착했다. 빠르게 템포를 잡은 임윤찬이 바라보는 ‘흑건’의 방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기민함이 아닌, 우아함에 찍혀 있었다. 그는 한 걸음 떨어져 세상을 조망하듯 오히려 여유를 가졌다. 왼손 속주에 숨겨진 찰나의 여유를 이런 식으로 재현할 수 있을 연주자가 누가 있을까.

임윤찬은 가장 깊고 무거운 제6번의 호흡을 느리게 잡음으로 서사의 설득을 도왔다. 제7번은 오른손이 뿌려대는 수많은 음 중에 주선율을 얼마나 선명하게 부각하는지가 화두인 곡이다. 순간을 관통하는 수많은 건반 가운데 중요한 음을 골라내 ‘노래’라는 수레에 얹는다. 여기에 극과 극을 넘나드는 왼손의 드라마틱한 움직임까지 더해졌다. 전반부에서 가장 마음을 두드렸던 순간이었다.

제11번 역시, 주선율을 돕는 수많은 음으로 이루어졌다. 짧은 음형들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멜로디와 함께 여전히 빛났다. 마지막 제12번은 임윤찬의 완급조절 능력을 제대로 보여준 곡이다. 사라진 줄 알았던 폭풍이 다시 휘몰아치며 막을 내리자, 환호 속에 잠시 천장을 응시한 그는, 청중에게 고개를 숙인 후, 유유히 어둠 속으로 빠져나갔다.

 

운명적 피아니스트의 부활(연습곡 Op.25)

무대를 오가는 그의 모습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카네기홀이 주최하는 시리즈에서 연주한다는 것은 모든 연주자가 기다리는 순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18세 예브게니 키신의 데뷔 리사이틀은 카네기홀 역사상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이다. 랑랑 역시 19세에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카네기홀 데뷔 무대를 가졌다. 조성진의 데뷔는 그가 20대 중반이었던 2017년 2월 22일이었다. 이로부터 정확히 7년에서 하루 모자란 2024년 2월 21일, 임윤찬이 같은 무대에 섰다.

후반부에는 Op.25를 연주했다. 첫 곡은 마치 멀리서 바라보는 잔잔한 저녁 바다 풍경이었다. 오른손의 선율은 평온하게 흐르고 이를 돕는 아르페지오는 잔물결처럼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제6번은 이날 연주했던 곡 중 절제미가 가장 돋보였다. 왼손 저음부에 놓인 주선율이 확 다가오며 부각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소리가 흩어져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피아니시모는 작지만 큰 울림이 있었다. 그는 후반부로 갈수록 몇 곡을 한 번에 이어 붙여 연주했다. 제8번과 제9번이 그랬다.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옥타브 속주의 향연이 펼쳐진 제10번은 성급하게 치고 나가지 않았다. 중간중간 세심하게 마련한 장치들을 활용해 현란한 기술보다 음악을 앞세웠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제11번으로 넘어가는 첫 음 ‘E(미)’의 타격이었다. 이 곡은 화려함과 깊은 서사를 자랑하는 걸작이다. 잡아 삼킬 듯 호령하던 제10번의 마지막 b단조 코드가 공중에 흩어지자, 그는 곧바로 E음을 외롭게 띄워 올렸다. 이는 곧 태풍으로 변해 제11번을 관통하여 절묘하게 접붙인 제12번에 이르자 임윤찬은 혼신의 힘을 쏟았다. E플랫 음이 내내 주도하는 c단조인 제12번은 엔딩에서 C장조로 탈바꿈한다. 바로 제11번의 첫 음으로 던졌던 외로운 E의 영광스러운 부활이다! 그는 작품 안에 켜켜이 얽힌 감정의 꺼풀들을 들춰냈고, 관객들은 그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뉴욕 중심에 인상 깊은 흔적을 남기다

©Chris Lee

임윤찬은 음을 정교하게 조각하는 능력은 물론, 이를 가지고 큰 흐름을 만들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묶어내는 데 탁월했다. 그의 음악이 특별한 이유는 뛰어난 재능에 앞서는 서사와 구현 방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설계도가 없이 무대에 오르는 연주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음악적 장치들을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대로 재현하는 타입의 연주자가 아니다. 듣는 사람의 가슴에 박혀버리는 음악, 말이나 글로 설명되지 않는 음악. 이것이 임윤찬의 특별함이다.

이 공연을 보기 위해 한국에서 날아온 팬들도 적지 않았다. 티켓 구매로 거액을 들였는데, 3층 꼭대기층이라는 사실을 알고 허탈했다는 서울에서 온 관객도 있었다. 한국의 저명한 대기업 대표나, 이름만 대면 알만한 소설가도 카네기홀을 찾았다. 작년 가을 뉴욕 필하모닉과의 데뷔로 임윤찬과 인연을 맺은 뉴욕필의 바이올리니스트도 그를 찾았다.

‘임윤찬 신드롬’에 카네기홀은 발 빠르게 다음 연주를 확정했다. 내년 3월 6일에 카네기홀을 찾는 런던 심포니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며 뉴욕 관객을 맞는다. 4월 25일 ‘건반의 거장들’ 시리즈의 리사이틀도 예정되었다. 올해가 ‘연습곡’이었다면, 내년은 ‘변주곡’이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베베른의 피아노 변주곡 Op.27을 카네기홀에 올린다. 연주를 끝낸 그에게 관객들이 다가가 무대 위로 꽃과 선물을 건넸다. 카네기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차분했다. 청중의 환호에 쇼팽의 작품으로만 4곡의 앙코르를 연주했다. 열성 관객은 여전히 홀을 떠날 의지가 없었지만, 마지막 앙코르였던 Op.25의 제1번을 연주한 다음에는 무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피아노 옆에서 감격으로 상기되었던 그의 얼굴이 벌써 그립다.

김동민(뉴욕클래시컬 플레이어스 음악감독) 사진 카네기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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