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노이마이어, 발레의 새 언어로 빚어온 60여 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4월 29일 8:00 오전

COVER STORY

 

현존하는 최고의 안무가, 함부르크 발레 단장

존 노이마이어

 

환상적 이야기와 발레의 언어로 빚어온 60여 년

 

©Kiran West

1973년부터 독일 함부르크 발레의 역사를 만들어 온 단장이자, 51년간 이 발레단에서 140여 작품을 창작·발표하며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다져온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1939~)가 내한하여 자신의 대표작 ‘인어공주’를 국립발레단과 함께 선보인다. 노이마이어는 올여름 함부르크 발레 단장 겸 상임안무가로서의 긴 시간에 마침표를 찍는다. 은퇴를 앞둔 그가 무대와 함께한 시간들을 살펴볼 기회다.

박찬미(독일 통신원) 진행 김강민 기자 사진 함부르크 발레

 

 


 

은퇴를 앞두고 처음 한국을 찾다

 

©Kiran West

유럽 현지에서 존 노이마이어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함부르크에서 프랑스 툴루즈로 막 이동한 참이었다. 툴루즈 극장에서 선보일 그의 또 다른 인기작 ‘대지의 노래’ 리허설 때문이었다. 그가 2주 사이에 두 나라를 오가며 두 개의 다른 프로덕션을 준비할 수 있었던 건, 올여름 평생을 몸담았던 함부르크 발레에서 은퇴하는 덕이기도 하다. 시간과 자유를 얻은 그는 이제 세계 곳곳의 러브콜에 응할 수 있게 됐다. 오는 6월 함부르크 발레가 초연할 그의 마지막 신작은 이야기의 끝을 뜻하는 ‘에필로그’라는 제목을 얻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최고의 발레 안무가에게 은퇴란 없는 법. 존 노이마이어는 이제 프리랜서 안무가로 또 다른 이야기를 써 내려갈 참이다.

존 노이마이어는 5월에 국립발레단(단장 겸 예술감독 강수진)이 선보이는 ‘인어공주’를 위해 처음 한국을 방문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어공주’ 이야기의 결말은 사실 제각각이다. 사랑에 실패하고 바다에 몸을 던진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거나, 신의 감화를 얻어 공기의 정령으로 승천한다. 인어공주와 왕자가 사랑의 결실을 본다는 해피엔딩도 선택지 중 하나다.

존 노이마이어의 발레 ‘인어공주’는 그중 현실적인 결론을 취한다. 사랑에 실패한 인어공주는 그저 모두가 떠난 자리에 혼자 남겨질 뿐이다. 노이마이어에게는 이게 “진짜 삶의 모습”이다. 자기 신체의 일부를 희생하면서까지 누군가를 사랑할지라도 꼭 그만큼의 사랑이 돌아오는 건 아니라는 것, 또 사랑이 실패해도 맘처럼 어딘가로 쉽게 사라져 버릴 수는 없다는 현실을 직시한다. 자신의 생각과 세계를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철칙이다.

함부르크 발레 ‘인어공주’ 예고편 영상

‘인어공주’와 같은 동화는 노이마이어의 주요 소재 중 하나다. 물론 동화의 낭만은 늘 고전 발레의 주제였지만, 노이마이어의 접근 방식은 조금 다르다. 판타지로 여겨졌던 이야기는 그의 안무를 거쳐 현실 세계로 진입한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바탕으로 만든 발레 ‘신데렐라’는 행복한 사랑의 결말보다 주인공의 자아 발견과 성장에 초점을 둔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는 판타지가 현실의 문을 두드리는 장면이 재치 있게 연출된다. 100년 동안 잠들어 있다 깨어난 공주는 오늘날을 사는 왕자를 향해 여전히 마리우스 프티파의 고전적인 언어(안무)로 말을 건다.

‘인어공주’는 안데르센의 탄생 200주년을 맞은 2005년, 로열 덴마크 발레의 위촉·초연으로 탄생했다. 초연 이후, 노이마이어가 단장 겸 상임안무가로 재직 중인 함부르크 발레에서 개정판이 발표됐고, 이외에 조프리 발레, 샌프란시스코 발레, 스타니라프스키 네미로비치 단첸코 극장, 중국 국립발레단 등이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인어공주’로 처음 한국 관객에 인사를 건넨다. 이번 공연이 성사된 배경에는, 국립발레단 강수진 단장과의 인연이 한몫했을 것 같다. 강 단장이 무용수로 활약한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는 당신이 젊은 날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그가 슈투트가르트 발레 무용수였을 때부터 알고 지냈다. 강수진 단장은 ‘카멜리아 레이디’를 비롯한 내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국립발레단 단장 취임 직후 그가 처음 추진한 프로젝트 중 하나가 바로 ‘인어공주’였다. 그는 ‘인어공주’를 보기 위해 워싱턴까지 올 정도로 큰 열정을 보였다. 팬데믹으로 제동이 걸렸던 논의를 다시 끌어올린 것도 그였다.

2005년 덴마크 로열 발레에서 안데르센에 헌정할 발레를 위촉받았을 때, 많은 동화 가운데 ‘인어공주’를 택한 이유가 무엇이었나?

사랑에 대한 흥미로운 시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인어공주는 왕자를 너무나 사랑해 기꺼이 고통을 감내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 끔찍한 의례를 거치고, 신체 일부를 포기해 다리를 얻곤 인간처럼 걷는 연습을 하면서 수십 번 넘어진다. 그러나 동화는 이런 사랑이 꼭 보답받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진짜 삶의 모습이다.

사랑에 실패한 인어공주는 홀로 남겨진 모습으로 막이 내린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 그 이후의 모습이다.

‘인어공주’는 안데르센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는 번번이 사랑에 실패했다. 내가 만든 ‘인어공주’에 시인이라는 인물을 추가한 것은 이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막이 오르면, 슬픔에 가득 찬 시인이 바다로 몸을 던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어공주는 시인이 만든 상상의 산물인 것이다. 인어공주가 사랑에 실패하고 홀로 남겨지면 시인은 그를 감싸 안는다. 결국 안데르센이 스스로를 껴안는 것과도 같다.

국립발레단의 ‘인어공주’는 기존 프로덕션들과 어떻게 다른가?

이전 프로덕션과는 또 다르게 재창조하려고 한다. 다만 나는 언어로 표현하는 시인이나 작가가 아니라, 몸으로 표현하는 안무가이기에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 공연장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언어가 춤이 되기까지의 독특한 방법론

 

©Kiran West

‘인어공주’ 외에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 여러 동화를 각색해 발레를 만들었다. 동화에 특별히 매료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화는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삶의 교훈을 준다. 삶의 어느 단계에 있든, 이해하는 지점이 있을 거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도 굉장히 아름답다. 언젠가 그의 이야기로 발레를 만들어 보고 싶다.

동화뿐 아니라 고전문학, 신화에도 관심이 깊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문학이 발레 창작에 어떻게 도움이 되나?

안무의 재료를 찾는 데 큰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문학은 내게 굉장히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었지만, 더 중요한 건 이를 어떻게 비언어의 매체인 발레로 옮길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문학 작품 자체가 이에 대한 해답을 주진 않는다. 문학은 ‘요리책’이 아니다. 따라 한다고 바로 맛 좋은 케이크를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의 내용을 오직 감각만 있는 발레에 어떻게 옮길 것인지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안무를 위한 당신만의 방법론은 무엇인가?

문학에 기반을 둔 작품이라면 단어 자체가 아니라 단어가 쓰인 ‘이유’를 춤춰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단어 뒤에 어떤 동기가 있었는지 연구하는 것이다.

당신의 작품들은 발레의 신고전주의로 일컬어진다. 친숙한 스토리의 고전적인 전개와 틀을 따르면서도, 안무는 신선한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내 작품의 표현 수단은 고전 발레다. 그런 점에서 신고전주의라는 평가는 적절하다. 그러나 19세기 발레 작품들과 같이 고전적이지는 않다. 내가 만드는 움직임은 다양한 영향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니진스키’(안무 존 노이마이어)

안무를 발전시키는 과정이 궁금하다.

음악을 듣고 그저 거기에 몸을 맡긴다. 머릿속에 움직임을 구조화하지 않는다. 철저히 즉흥적이다. 이 즉흥적인 표현에도 안무가마다의 특징이 있다. 각각이 음악을 듣는 방식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의 감각을 표현하는 능력을 훈련으로 기를 수 있다고 보나?

함부르크 발레 학교의 경우, 안무가 양성 과정을 통해 학생들에게 객관적인 정보를 가르친다. 군무의 균형감, 공간 활용법, 군무와 독무가 각각 가져올 수 있는 효과 등이다. 그러나 이후에 안무가는 혼자 남겨져야 한다. 그가 무엇을 표현하길 원하는지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때로는 배운 것에 아주 반대되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 할 수도 있겠다. 오늘날 많은 현대 안무가 비슷한 모습을 띠는 것은 모두가 서로에게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어디에서도 발전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외부 영향을 받지 않고 철저히 독창적으로 서있기 어려운 시대인 건 분명해 보인다.

그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계속 질문해야 한다.

 

 

국립발레단 강수진 단장과의 인연

 

©Kiran West

미국 위스콘신의 작은 마을 밀워키에서 태어난 존 노이마이어는 탭댄스로 춤의 세계에 입문했다. 당시엔 발레단은 커녕 발레 공연을 볼 기회도 하늘의 별 따기 같은 환경이었다. 근근이 근처 극장에 발레단의 순회 공연이 열리면, 소년은 부모님을 설득해 맨 꼭대기 층 발코니석에서 면봉처럼 작게 보이는 무용수들을 바라보곤 했다.

동네 도서관에서 무용책을 찾아 헤맨 날들을 그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몇 안되는 무용책 중 노이마이어는 니진스키의 전기를 발견한다. 발코니 석과 무대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그에게서 동떨어져 있던 발레가 한순간 그의 세계가 된 순간이었다.

발레에 처음 발 들인 당시, 미국의 발레단 풍경은 어떠했나?

밝은 미래를 보기 어려웠다. 미국에 발레단이라고는 아메리카 발레 시어터와 뉴욕 시티 발레밖에 없었던 데다, 그중 하나는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었으니까. 발레를 배우려고 고향에서 149km나 떨어진 시카고까지 가야 했다. 발레를 더 알고 싶었고, 그래서 코펜하겐, 런던, 뉴욕으로 옮겨 가 공부를 이어갔다.

본격적인 커리어는 독일에서 시작됐다. 1963년 안무가 존 크랑코(1927~1973)의 초청으로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무용수로 입단하고, 이곳에서 6년간 활동하며 틈틈이 안무도 선보였다. 존 크랑코는 발레계의 위대한 스토리텔러로도 알려져 있다. 그가 이후 당신의 안무에 영향을 미쳤나?

그렇지 않다. 슈투트가르트 발레가 가장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한 시기에 함께한 것은 분명 엄청난 행운이었다. 하지만 존 크랑코는 꽤 직접적이고 단순한 움직임이 이어지는 서술적인 발레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슈투트가르트 이후, 스물일곱에 최연소로 프랑크푸르트 발레의 단장으로 임명됐다. 독일에서 활동을 계속 이어간 이유가 있나?

독일의 무용가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닌데, 기회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당시 독일 발레계가 흥미로웠던 건 분명하다. 안무가가 발레단 단장으로 일하는 게 흔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발레단들이 다른 안무가의 작품을 공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발레단들이 서로 비슷해졌다. 오늘날 무용수의 테크닉은 크게 발전했지만, 안무에 있어서는 신선함이 희석된 게 사실이다.

1973년 마침내 함부르크 발레의 부름을 받았다. 함부르크를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전막 발레의 현대적 형태를 찾고 싶었다. 이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함부르크 발레에서 140여 작품을 발표하며 안무가로서 꾸준히 창작할 환경을 제공받았다. 그것이 자신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생각하나?

우선 임기를 시작하면서 새 무용수들을 영입해 나만의 발레단을 만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 무용수 대부분과 계약을 연장하지 않아, 크게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내 작업 방식은 결국 발레단을 설득했다. 새 무용수들은 극장에 모여 비언어로 소통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결국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들여다 보고, 인식하는 데 큰 공을 들였다. 이게 내 작품들이 큰 사랑을 받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감정, 고민, 관계 등을 만나기 때문이다.

한국 발레단의 창작 환경 조성은 더딘 상태다.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할까?

국립발레단의 현대 작품들을 보면서 잘 훈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강수진 단장은 발레단 단원들과 함께 공연을 기획하고 직접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안다. 이를 더 발전시키려면 젊은 안무가들에게 기회의 장을 열어야 한다. 나도 젊은 시절에 내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훈련을 했다.

51년 동안 함부르크에서 당신이 만든 건 작품뿐만이 아니다. 함부르크 발레 학교(19 78~), 재단(2006~), 유소년 발레단(2011~) 등을 설립해 발레와 도시 커뮤니티의 확장을 도모했다. 재단 설립의 필요성은 무엇이었나?

안무가로서 임무 중 하나는 다양한 캐릭터와 운명에 공감하는 것이다. 함부르크 발레가 도시의 문화 인프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활용해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건 내게 당연한 일이었다. 함부르크 유소년 발레단은 특히 장애인과 공연하거나 교도소 방문 공연 등의 여러 사회공헌사업을 도맡는다. 이로써 무용수들은 2년의 활동기간에 극장 밖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도 있다. 젊은 무용수들이 소통 능력을 훈련하고, 자기 시각을 기르게 하는 데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재단은 수십 년간 쌓아온 당신의 개인 컬렉션을 관리하기도 한다. 당신이 수집해 온 약 5만 점의 오브제가 함부르크에서 전시되고 있다. 이런 아카이빙 작업을 이어온 이유는 무엇인가?

안무가로 살기 시작한 때부터 전 세계에서 발레 역사와 관련된 모든 것을 수집했다. 그림, 사진, 조각품, 무용책 등 다양하다. 내 비전이 어디로 향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컬렉션은 아름다우면서, 유용하기도 하다. 벽에 걸려 있는 옛 그림을 보면서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겠다는 동기를 부여받곤 한다.

함부르크 발레 단원의 80%가 함부르크 발레 학교 출신이다. 발레 학교 설립은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무용수를 길러내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내게 이상적인 무용수는 훈련된 고전 발레의 문법으로 스스로에 대해 말할 줄 아는 무용수이다. 어느 정도 수준의 테크닉을 훈련시키는 게 첫째다. 이게 그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51년의 시간에 마침표 찍고, 마침내 자유를 향해

 

©Holger Badekow

올여름 51년간 이어진 함부르크 발레 단장 겸 상임안무가의 삶에 마침표를 찍는다. 함부르크에서의 가장 큰 성취를 꼽자면?

발레단이 이 도시에서만 한 시즌에 90여 차례나 공연한다는 것이다. 또 유럽의 어느 발레단보다도 투어를 많이 한다. 우리만을 위한 공간이 있다는 것도 자랑스럽다. 발레단을 위한 공간, 학교, 학생 기숙사, 그리고 아홉 개 스튜디오까지. 함부르크 발레 학교 졸업생들이 여러 좋은 발레단에 진출하고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함부르크 발레에서는 은퇴하지만, 계속 활동을 이어나갈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계획들을 품고 있는지 궁금하다.

늘 프리랜서 안무가로서의 삶을 열망했다. 작품에 캐스팅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되니까.(웃음) 이미 많은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다. 행정 업무를 떠나면서, 전보다 더 집중적으로 창작을 위한 세계 곳곳의 요청에 응할 시간과 자유를 얻게 됐다. 한편으로는 바덴바덴에서 주립 유소년 발레단의 단장이자 축제 큐레이터로 일할 예정이다. 하지만 함부르크는 늘 내 고향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다음 세대 무용인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솔직해져야 한다. 어떤 효과를 내고 싶어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과 감정, 자신이 믿는 바를 표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동화나 고전, 신화 같은 전통적인 이야기 틀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결국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지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고전 발레는 굉장히 순수한 형태를 띤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이를 왜곡하려고 한다. 젊은 안무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움직임을 꾸미지 않고, 모든 동작을 정직하게 만드는 것이다.

박찬미(독일 통신원) 사진 함부르크 발레

 

존 노이마이어(1939~) 미국 마르케트 대학에서 영문학·연극을 전공하고, 덴마크 코펜하겐과 영국 로열 발레 스쿨에서 무용을 익혔다. 1963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무용수, 1969년 프랑크푸르트 발레의 단장으로 활동했다. 1973년 함부르크 발레 단장 겸 상임안무가로 활동해 올해까지 140여 작품을 창작했다. 최근 함부르크 발레에서 발표한 신작으로는 ‘베토벤 프로젝트’(2021), ‘도나 노비스 파쳄’(2022) 등이 있다.

 


 

존 노이마이어 안무작 살펴보기

글 김강민 기자

 

타티아나

C Major 737408(DVD), 737504(Blu-ray)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원작으로 여주인공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다룬다. 삶에 권태를 느끼는 귀족 청년 오네긴과 아름다운 여인 타티아나의 엇갈리는 사랑을 담아냈으며, 원작의 흐름이 잘 살아 있는 작품이다. 무용수들은 발레복이 아닌 일상적인 의상을 착용하며, 레라 아우어바흐(1973~)의 음악에 맞춰 연극적인 춤과 몸짓을 보여준다.

 

 

 

 

니진스키

C Major 744208(DVD), 744304(Blu-ray)

바츨라프 니진스키(1889~1950)는 전설적인 발레단 발레 뤼스의 솔리스트로 활약, 1911년부터는 안무가로서 ‘목신’ ‘봄의 제전’ 등의 명작을 남겼다. 존 노이마이어는 ‘바츨라프’(1979)를 발표한 이후 ‘니진스키’를 통해 다시 한번 그를 되살려냈다. 쇼팽·슈만 등의 음악이 사용됐으며, 존 노이마이어가 오마주한 ‘목신’ ‘봄의 제전’ 등이 무대 위로 펼쳐진다.

 

 

 

 

베토벤 프로젝트

C Major 753704(DVD), 753704(Blu-ray)

베토벤 탄생 250주년 기념작으로 베토벤의 삶과 음악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베토벤 프래그먼츠’ ‘인테르메초’ ‘영웅(에로이카)’,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토벤 에로이카 변주곡, 교향곡 3번 ‘영웅’ 등 베토벤의 유명 작품들이 각 장의 음악으로 사용됐다. 베토벤의 난청은 전자음악, 중단되는 피아노 소리 등으로 표현됐다.

 

 

 

 

고스트 라이트

EuroArts 2065818(DVD), 2065814(Blu-ray)

팬데믹을 겪은 함부르크 발레의 무용수들을 위해 만든 작품이다. 고스트 라이트는 리허설·공연이 끝난 후 무대를 비추는 조명을 의미하며, 과거 이 무대를 누볐던 옛 예술가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전통이다. 피아니스트 다비드 프레이가 무대에 올라 슈베르트의 작품을 연주하고, 무용수들은 팬데믹 기간에 겪었던 다양한 감정을 표현한다.

 

 

 

 

도나 노비스 파쳄

C Major 764708, 764804(Blu-ray)

바흐 b단조 미사 전곡을 사용한 작품이다. ‘도나 노비스 파쳄’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라는 의미로, b단조 미사의 마지막 합창곡 제목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줄거리가 없는 미사곡을 배경으로, 여행자이자 화자로서 전쟁의 비극을 실감하는 ‘그’, 전사한 남편을 기리는 미망인, 죽은 남편, 전쟁의 참화를 관찰하는 종군사진작가 등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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