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BUTE
마우리치오 폴리니 1942.1.5~2024.3.23
그와의 짧은 대화를 기억하며
거성(巨星)이 졌다. 많은 피아니스트가 늘 ‘존경 대상 1위’로 꼽았던 그의 생을 복기해본다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지난 3월 23일(현지 시각) 고향 밀라노 자택에서 영면했다. 향년 82세. 3월 26일 장례식이 열린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은 “우리 시대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이자, 50년 넘게 극장의 예술적 행로에 근본적인 참고가 된 폴리니의 죽음을 애도한다”라고 성명을 냈다. 라 스칼라는 폴리니가 생애 168회의 공식 공연을 가진 곳이다.
1986년부터 일본 내 폴리니 공연을 전담한 기획사 ‘가지모토’는 평소 공연 홍보물에 쓰던 문구를 그대로 부고에 옮겼다. “현대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자 클래식 음악계의 상징.”
고인의 위상은 1971년부터 생애를 함께한 전속 음반사 도이치그라모폰에 의해 정리되었다. “예술성을 기반으로 지난 60년간 비평가와 대중의 찬사를 받았다. 고상한 표현력, 건반을 다루는 총체적 기술, 다양한 음색과 곡조를 일구는 능력이 어우러져 고전과 현대작에서 심오한 통찰력을 드러냈다.”
피아니스트 미셸 베로프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지능, 피아니스트로서 완벽한 기술, 경이적 기억력으로 불레즈 소나타 2번을 마음먹은 대로 연주할 수 있었다. 문학을 이해한 정치적 인물이자, 신체와 정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완전한 형태의 예술가”로 추도했다.
정점에서, 더 높은 경지로 향하다
그는 건축가인 부친 지노 폴리니, 그리고 피아노와 성악을 익힌 모친 레나타 멜로티가 가꾼 예술적 가문에서 자랐다. 카를로 로나티, 카를로 비두소의 제자였고 밀라노 음악원에서 지휘와 작곡 과정을 들었다. 1957년 쇼팽 에튀드 24곡 연주로 고향에서 데뷔했고, 같은 해 제네바 콩쿠르 2위(우승 마르타 아르헤리치·도미니크 메를레), 1960년 쇼팽 콩쿠르를 우승했다. 생동하지만 프레이징과 템포가 흔들리지 않는, 균형 잡힌 다성음악으로서의 쇼팽은 폴리니가 후대에 남긴 계시 같은 해석이다. 10대 중반부터 피아노에 대한 심층적인 지식을 쌓고 독주회, 마이너 대회를 거쳐 쇼팽 콩쿠르로 이어지는, 일정에 맞춰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폴리니식 규율은 지금도 이어진다. 쇼팽을 연주하지만 모차르트식 안단테, 베토벤식 아다지오, 브람스식 인터메조에 통달한 10대의 등장은 심사위원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비롯한 거장들 사이에 일대 센세이션이었다.
쇼팽 콩쿠르 우승(1960) 이후 그해 4월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EMI에서 녹음했지만 1960년대 폴리니는 본격 콘서트 연주자로선 사실상 휴지기를 가졌다. 수상 직후부터 공연 제작자들은 팔꿈치 부상을 의심했고, 쇼팽 에튀드 음반의 성공을 두고 벌이는 공연과 음반 업계의 이전투구에서 본인은 휴식 선언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안식년에도 런던, 파리에서 간헐적인 독주회를 갖고, 1968년 EMI에서 독집을 냈지만, 주업은 학문과 배움이었다. 폴리니는 취미는 셰익스피어의 영문 강독이었다. 밀라노 대학에서 물리, 미학을 수강하고 아레초의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문하에 들어가 우아함과 절제된 스타일의 미켈란젤리를 관찰했다.
1968년 카네기홀 독주회, 1969년 시카고 심포니와 쇼팽 협주곡 2번 연주로 복귀를 타진, 이듬해 베를린필과 협연하면서 전문 피아니스트로 완전히 돌아왔다. 1971년 런던, 빈, 파리 리사이틀 투어 직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테크닉의 완성도, 날카로운 감각이 빚는 울림의 정밀한 조절, 뢴트겐의 X선이 연상되는 투명한 음색이 현지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쇼팽 콩쿠르의 우승 음반을 DG가 발매했지만 전속 계약은 1971년 이뤄졌다. 데뷔 음반에 담은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프로코피예프의 소나타 3번을 시작으로 한평생 바로크, 고전, 낭만, 현대까지 사조를 가리지 않았다. 2024년 4월 현재 100장이 넘는 CD가 DG 아카이브에 있다. 음반의 폴리니는 쇼팽, 브람스, 슈만에 통달했고,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드뷔시, 프로코피예프에 사려 깊은 해석을, 슈톡하우젠, 노노를 옹호하는 메신저이자 유명 인사였다. 정치적 입장은 달랐지만, 인간적 매력으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함께한 카를 뵘, 현대음악 확산 운동을 함께한 피에르 불레즈, 노동운동을 시작으로 고전부터 현대음악 전반에서 서로를 지지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자 가운데 우군이었다. 한국인 작곡가, 연주자와 특별한 인연은 없다.
그는 왜 내한하지 않았을까
생애 마지막 연주회는 2023년 10월 30일 취리히 톤할레 독주회가 됐는데, 악보가 놓인 대로 연주하지 않았고, 페이지터너에게 욕설을 한 게 객석에서 목격됐다. 말년엔 심장 문제로 빈번히 예정 공연을 취소했다. 2018년 산토리홀, 2019년 카네기홀 독주회를 마지막으로 아시아, 북미로 건너가지 않았다. 2022·2023년 내한 독주회는 공연장이 대관 된 상태에서 무산됐고, 2022년 주최사는 ‘연기’로 공지하며 대관 공연장에 의사 소견서를 전달했다. 하지만 5월 19·25일로 예정된 내한을 취소한 대신, 5월 29일 우크라이나 자선 독주회를 라 스칼라에서 가졌다.
이탈리아 공산당에 입당한 청년기 행적을 토대로 한국을 멀리했으리란 호사가식 추론은 오래됐다. 1974년을 시작으로 일본은 19회, 중국도 3회를 갔지만 한국은 찾지 않았다. ‘폴리니 프로젝트 인 도쿄’로 2002년 현지에 머문 폴리니를 필자는 ‘객석’ 기자 신분으로 만났다. 고인이 한국 매체와 만난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 인터뷰다. 오쿠라 호텔 라운지에 등장한 폴리니는 왜 한국행이 어렵냐는 질문에 “조건이 맞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본인 입으로 사상에 따른 서울행 기피는 아닌 점을 2002년 12월 ‘객석’ 지면으로 밝혔다.
당시, 60대에 접어든 폴리니는 연간 40회를 넘지 않게 연주를 조절했고, 줄어든 횟수를 상쇄할 만큼의 회당 출연료가 비례해 올랐다. 다만, 폴리니가 ‘객석’에 언급한 ‘조건’은 돈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폴리니 측을 대리한 기획사 ‘해리슨 패럿’의 제스퍼 패럿 전 대표는 2010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폴리니가 향후에도 한국에 오기 어려운 단서를 전했다. 첫째, 나이 든 기악 연주가는 노년에 새 도시 데뷔에 정서적 부담이 크다는 것. 둘째, 폴리니 측은 장기간 한 도시에 머물며 독주회, 협연, 실내악을 프로젝트로 펼치는 걸 원하지만, 한국의 제안은 늘 흥행 이벤트에 머무르는 점을 짚었다. 폴리니 부부가 서울에 한 달 가깝게 머물 매력을 찾을지도 의문이었다. 도쿄에는 불레즈 페스티벌(1995), 폴리니 프로젝트(2002·2005·2012·2018)로 보통 3주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 젊을 때부터 익숙한 도시와 국가가 21세기 폴리니의 공연 스케줄을 가져갔다. 도쿄 인터뷰에서 폴리니는 자신을 커버로 한 ‘객석’(89년 6월호)을 들고 포즈를 취해달란 요청은 거절했지만, 같은 호의 ‘객석’ 선정 ‘20세기 최고 피아니스트’ 1위에 올랐다는 전언에 슬며시 웃었고, ‘알프레드 브렌델은 몇 위인가’를 물었다. 폴리니와 브렌델은 생일(1월 5일)이 같았다.
글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사진 객석DB·마스트미디어
‘객석’이 기록한 폴리니
내한은 없었지만, 1985년 5월호 취재부터 오늘까지 그의 활동을 부지런히 담았다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활동해 온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내의 관객은 끝내 그를 만날 수 없었지만, ‘객석’은 그의 소식을 계속해서 좇을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를 돌아봐도 피아노계에 그만한 존경을 받는 자는 귀했고, 그러한 존경은 순수하게 그의 음악이 자아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쪽에서 비판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너무 완벽해서 지루하다’라는 언어는 그의 음악을 향한 선호가 여타 연주자처럼 개인의 취향 영역에 있다는 걸 역설할 뿐이다. 그를 피하기보다 택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면, 그는 시대의 정신이었으리라.
그의 죽음 앞에 애도하는 마음으로 ‘객석’에 담긴 그의 지면을 열어보았다. (※표기법은 원문에 따름)
정리 이의정 기자
1985년 5월호
냉철한 해석, 격정의 연주
“1975년 파리의 주간지 ‘르 프랭’이 세계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10명에게 물어 세계적 피아니스트의 인기 순위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때에 8표를 얻어 1위에 뽑힌 사람이 바로 폴리니이다. (…) 폴리니의 명성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1960년 바르샤바의 쇼팽콩쿨에서 입상할 때부터이다.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우승의 영예를 안았는데, 심사위원은 루빈스타인·카발레프스키·말쿠진스키· 블랑제여사 등이었다. 당시의 연주를 들은 루빈스타인은 ‘이미 우리들 누구보다도 잘 친다’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때가 폴리니의 나이 18세였다. (…) 폴리니의 음악은 명쾌하고 산뜻하다. 튼튼한 지성과 완벽한 테크닉으로 명석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폴리니의 음악에는 건강미가 넘쳐 흐른다. 그가 체스의 명수이며, 수학적인 두뇌가 발달해있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님은 그의 음악이 입증하고 있다.” ◎김영기 뉴욕 특파원
피아노와 대화, 그때 건반에 떠오르는 영상들
“한국의 음악인을 알고 있읍니까?
많은 한국의 음악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지요. 얼마전 TV를 통해서 서주희 양의 연주를 들었지요. 상당히 재능있는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합니다.
피아노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일이라면?
우선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깊이 감추어져 있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재능을 끄집어내어 다듬어 줄 수 있는 좋은 선생님 말입니다. (…) 흔히 훌륭한 연주자가 훌륭한 선생님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 자신도 간혹 연주 중에 느끼는 전신을 떨리게 하는 어떤 제 자신의 표현 기법을 누구에게 가르쳐 주기가 쉽지 않아요.” ◎김영기 뉴욕 특파원
1989년 6월호
폴리니의 완벽성과 호로비츠의 투명함을 좋아한다
“우리나라의 피아니스트들이 선호하는 현존 세계의 피아니스트 베스트 텐(10)을 선정하기 위해 서울과 지방에 있는 100인의 피아니스트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들이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들을 추천받았다. 이번 조사에 거론된 피아니스트와 그들의 지지도는 다음과 같다. 1위 마우리찌오 폴리니 (59표)”
크리스탈 같은 투명함 그리고 잘 다듬어진 힘
“여섯번째의 방일중 프로그램에 중복된 곡목은 슈베르트 소나타와 베토벤의 ‘함머클라비어’인데 ‘함머클라비어’에 관해 새로운 발견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한 인간, 어떤 예술가가 언제나 제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즉,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로서 연주에 변화가 생길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 폴리니의 연주를 좋아하고 말고는 감히 논하고 싶지 않다. 그의 연주는 브람스나 베토벤을 분석하듯 여러 피아니스트들에게 분석되며 연구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 때문이다. 피아노 연구의 참고서라고 할까? 끊임없이 사용하는 그의 페달링을 필자는 잘 이해할 수 없다.” ◎이승순 도쿄 특파원·피아니스트
엄밀한 계산 속에 분출되는 지성과 감정
“연주가에게 ‘완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너무 주관적이고 또 위험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폴리니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완벽하다’(이 표현이 너무나 강하다면) ‘완벽에 가깝다’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김용배 피아니스트
2008년 2월호
그 부담감마저 떨쳐낸, 우리시대의 교과서
“나를 포함한 1980년대 중·후반 피아노 전공 수험생에게 폴리니의 연주는 모든 것이 완벽한 ‘신’의 경지로 받아들여졌다.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에게 인기 1위는 폴리니, 2위는 침머만, 3위는 아쉬케나지 정도였다고 기억된다. (…) 특별히 우람한 손은 아니지만 근육이 골고루 분포된 긴 손가락과 키에 비해 잘 발달된 어깨가 자연스런 무게감을 주며 합리적인 주법을 구사한다. 손목의 위치도 건반에 밀착돼 많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는데, 이런 자세로 폴리니는 그 이전의 피아니스트는 꿈도 꿀 수 없었던 테크닉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김주영 피아니스트
2009년 4월호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폴리니의 시대
“필자가 지켜본 3월 7일 살 플리옐 연주는 독일 후기낭만주의 전통을 한눈에 엿볼 수 있는 자리로, 슈톡하우젠·쇤베르크의 작품과 브람스 피아노 5중주가 공연됐다. 올해 나이로 68세인 폴리니는 어깨가 좀 수그러지긴 했어도 여전히 고상한 자태로 무대 위에 등장했다. (…) 폴리니는 풍성한 페달과 터치의 유희로 미묘한 잔향감각의 아라베스크를 연출했다.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이 작품을 폴리니만큼 연주해낼 피아니스트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연주를 들으며 깨달은 명확한 사실, 폴리니의 시대는 현대진행형이다.” ◎배윤미 파리 통신원
2022년 5월호
“폴리니처럼 쳐라!”
“특정한 사람의 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보통명사처럼 쓰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음악계에서도 그런 ‘영예’를 누리는 인물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이 희귀한 예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폴리니처럼 쳐라!” 분명하고 구체적인 지시를 담은 이 문장의 뜻은 세대가 지나도 그다지 변색할 것 같지 않다.” ◎김주영 피아니스트
RECORD REVIEW
1960년 쇼팽 콩쿠르의 우승 음반 발매를 시작으로, 1971년 도이치그라모폰과의 전속 계약을 통해 100장이 넘는 음반을 발매한 폴리니는 피아노는 물론 DG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가 음반을 발매할 때마다 국내 음악계와 언론도 뜨겁게 반응했다. 대표적인 소개글을 옮겨본다.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 DG 459 645-2
“10, 17, 23번과 같은 빠른 변주들에서 뿜어나오는 거침없는 패시지들이 일품이지만, 31번 변주에서는 그의 쇼팽을 연상시키는 서정적인 선율미가 돋보인다.” (2000년 9월호)
쇼팽: 녹턴 DG 4775718
“형식에 있어서 폴리니는 ABA 형식의 데칼코마니적인 대비를 거부한다. (…) 형식에 대한 논란을 불식시킬 만한 설득력을 가진, 폴리니의 위대한 통찰력이 빚어낸 감성의 또 다른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2005월 11월호)
마우리치오 폴리니 에디션 DG E4713502
“디스코그래피를 살펴보면 표면적인 기교의 양상을 보이는 작품은 단 한 곡도 찾아볼 수 없다.” (2002년 1월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2·23·24·27번 DG E4744512
“도전, 완성, 그리고 해체, 베토벤을 향한 끝없는 항해” (2003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