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경이롭다. 녹음ㆍ해석ㆍ연주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는 음반이다. SACD나 다른 다채널 매체로 발매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흠이 될 만큼 빼어난 내용을 담고 있는, 거기다 다소 성의가 없어보이는 음반 디자인이 담고 있는 내용물에 비해 어딘가 초라해보인다는 것이 유일한 약점이 될 정도로 연주 자체가 압도하는 음반이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올해 초연 100주년이 되는 현대음악의 고전으로, 스캔들로 비하된 초연 무대의 충격으로 우리시대 음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초연 무대의 난장판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때문이 아니라 안무의 난해함 때문이었으며, 음악은 그 소란의 시의 적절한 배경음악이 되었을 뿐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지만, ‘봄의 제전’이 현대음악의 아이콘으로서의 역할이 문제시될 수는 없다. 하지만 지난 100년 간 차곡차곡 쌓인 수많은 음반만큼이나 작품이 가지고 있는 파격성은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초연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으로 출시된 래틀/베를린 필의 그것도 ‘기념’의 의미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기분 좋게 빗나갔다. 래틀은 베를린 필 취임 이래 이 작품을 반복적으로 연주회 프로그램으로 삼았으며 이미 두 종류 이상의 매체로 ‘봄의 제전’을 선보인 바 있다. 이들은 모두 평균 이상의 연주이긴 했지만 과거의 모범적인 해석들, 예를 들자면 살로넨(Sony Classics)이나 불레즈(DG)를 대체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거의 10년에 걸친 탐구를 통해 작품의 세부 하나하나를 자신이 구현하고자 하는 전체 구조 속에 빼곡하게 채워넣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래틀의 해석이 다른 이들의 것보다 특출하게 다른 점은 없다. 그는 기본적으로 ‘봄의 제전’을 완전히 고전적인 관현악 작품으로 보고 있으며, 또한 발레 음악의 성격, 즉 무대에서 구현되는 군무의 리듬을 따르고 있다. 도라티(Decca)처럼 템포를 극단적으로 비튼다거나, 불레즈처럼 음향의 기계적 배열 속으로 몰고 가지 않으면서 곡의 순차적 진행에 따라 긴장을 배가시켜 궁극에는 완전히 폭발시켜버린다. 래틀의 해석은 결국 가장 평균적이면서 모범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뿜어내는 상쾌함과 카타르시스는 실로 대단하다. 베를린 필은 반복적인 연주 경험을 바탕으로 ‘봄의 제전’을 완전히 자신들의 것으로 내재화시켰다. 카라얀 시대에 영웅의 생애, 아바도 시대에 말러 교향곡 9번이 그러했다면, 래틀의 시대에는 ‘봄의 제전’이 베를린 필에게 그런 작품이다. 도입부터 종결까지 베를린 필의 합주력과 독주 악기들의 명인기는 특별한 아우라를 풍길 정도다. 베를린 필의 과거 ‘봄의 제전’ 음반들, 카라얀이나 하이팅크 등과 비교해보면 이들이 얼마나 일취월장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여기에 매우 폭넓은 다이내믹을 보여주는 녹음 수준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디지털 콘서트홀의 전담 녹음팀이 만들어낸 음향 설계는 연주의 장점을 더욱 배가시킨다. 후반 필업곡인 ‘뮤즈를 끄는 아폴로’ 역시 빼어난 연주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다면적인 성격 때문에 고전주의적인 접근뿐만 아니라 슈트라우스 풍의 후기 낭만주의적인 접근도 가능한 작품인데, 이 연주는 카라얀의 그것처럼 후자에 가깝고 그 업그레이드 버전에 해당한다. 결론적으로 이 음반은 ‘봄의 제전’의 새로운 표준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으며 ‘봄의 제전’을 들어보고자 하는 초심자들에게 맨 먼저 권하고픈 음반이다.
글 송준규(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