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악회 연주의 장점은 순수 우리악기만을 쓴다는 점이다. 악기를 비롯해 목소리나 몸짓의 소재는 온전히 우리가 ‘전통’이라 인식하고 있는 도구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음악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이번 무대 역시 ‘평창 아라리’의 선율로, 현대성을 자각시켰다. 무엇이 그들의 음악적 시선을 광폭(廣幅)하게 하는가. 1월 31일~2월 1일, 서울남산국악당.
글 정우정 기자(wjj@) 사진 정가악회
“한치 뒷산에 곤드레 딱죽이 임의 맘만 같다면, 올 같은 흉년에도 봄 한 철 살지.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나. 모춘 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우나. 육백 마지기 돼지감자를 첫 찜 들여놓고 곤드레 쌈에 된장을 발라서 많이 드시고 가세요.”
“제 입에 염불”이라는 말이 있다. 강원도 사투리를 자세히 들어보면 말의 엮음이 있어 재미있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강원도에 말을 잘 하는 사람을 만나면 특유의 끊어지지 않을 듯한 재담이 있다. 이는 음악에서도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다. 다른 지역의 민요에 비해 선율이 간단하고, 가사가 많아 허무맹랑한 내용의 연속으로 노래를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광부의 노동이나, 험난한 산맥을 넘어가며 불렀을 이러한 민요는 삶의 노고에 대한 치유와 자생의 음악이었다.
정가악회가 강원도민요 ‘평창 아라리’에 주목했다. 2000년 서울대 국악과 재학생들이 소박하게 시작한 음악 동인 정가악회는 뜻이 맞는 연주자들로 탄탄하게 연대된 규모 있는 단체로 그들이 모여서 이십대에 치열하게 고민했던 국악의 방향성에 대해 이제는 현실적인 대안도 제시하고, 몸소 기업적 사안으로 단체를 이끌어가고 있는 신뢰를 구축하고 있다. 이번 주제는 ‘평창 아라리’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정가악회는 선율 이외에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큐멘터리와 음악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이번 무대는 영상이 실어온 인간의 스토리를 음악으로 포용하는 과정을 선보였다. 영상과 실연의 간격은 마치 섞이지 못할 물과 기름 같은 불안을 조장하지만 이들은 ‘평창 아라리’에 대한 ‘텔링’을 가지고 있는 김옥녀 할머니와 김유진 양을 통해 해결한다. 영상의 화법으로 만나는 실체에 대한 부재를 무대라는 요소에 옮겨 놓음으로써, 음악의 동력을 자아냈고, 서민의 노래를 통해 ‘음악을 한다’가 아닌 ‘노래를 부른다’는 원론적인 존재로서의 가치를 드러내게 만들었다. 이는 선율을 통해 그 속에 스민 이야기를 끌어낸 방법으로, 음악의 말초적(末梢的)인 역할을 부각시킨 셈이다.
우리 안에 치유로 자리했던 ‘음악’이라는 동력에 주목한 이들의 시선이 절반의 성공을 거두어냈음에도 그들의 강박은 ‘남도 계면조의 구음’에서 가로막힌다. 이것은 첫무대와 끝나기 전 90퍼센트 지점에서 등장했는데, 프로그램의 구성상 이 곡을 난데없이 만나야 하는 이유를 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광기 어리고, 다소 충격적인 발성법을 자랑하는 남도 계면길의 구음은 국악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생경’을 제시하고, 국악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실력’과 ‘몰입’을 유도하니, 젊은 연주자들이 좋아하는 음악 용어로 쓰인다. 그러나 이러한 작위적인 장르의 개입은 부분의 개연성을 상실시켜 전체를 무너뜨린다. 음악의 심연으로 굳이 인간을 담궈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연주자들은 왜 그러한 강박 속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어쩌면 비범하기를 자청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발견될 수 있는 위선은 아니었을까.
탈장르적 음악을 제시하며 걸어가는 리더이니만큼 또 하나의 법칙을 만드는 음악을 생산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활동은 위독을 품고 있다. ‘이야기’에 대한 소재가 자유로워졌으니, 이제 ‘음악적’ 강박에 대해서도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면 정가악회의 시선은 더 넓은 광폭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강원도에 살고 있는 유진이는 지금쯤 미탄의 개울에서 오늘의 기억을 품고 ‘아라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신 개념 ‘아리랑’ 자생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