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와 바그너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세계 주요 오페라극장의 2012/2013 시즌은 바그너 위주로, 2013/2014 시즌은 베르디 위주로 편성된 경우가 많다. 바그너는 5월, 베르디는 10월에 출생했기 때문이다. 피터 겔브가 총감독으로 부임한 이래 보수적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오로지 세계 최고의 가극장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메트’)의 경우는 2010년부터 2012년에 걸쳐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새 프로덕션을 일찌감치 준비하여 선보였는데, 그 결과물이 고맙게도 국내에서 한글 자막으로 출반되었다. 새 프로덕션의 목표와 개념은 명쾌하다. 다른 극장이 따라올 수 없는 물량공세로 메트만이 개발ㆍ유지할 수 있는 거대한 구축물을 설치함으로써 ‘무대 장치가 주도하는 반지’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피터 겔브가 초빙한 이가 캐나다의 작가이자 배우, 천재적인 무대 연출가인 로베르 르파주다. 1994년 ‘엑스 마키나’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그 이름처럼 기계 장치를 이용한 기발한 무대로 명성을 떨친 르파주는 두 번의 ‘태양의 서커스’ 연출을 통해 복잡하게 움직이는 무대 장치에 한층 통달하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메트의 새 ‘반지’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르파주 프로덕션의 무대는 4부작 공히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24개의 거대한 사각 기둥뿐이다. 이 기둥들은 쭉 연결되어 있으며, 전동식 유압 장치와 스태프진의 수동 조작을 통해 움직인다. 각각의 기둥은 한쪽 면의 가운데가 각이 지게 튀어나오고 반대편은 평면으로 되어 있는데, 기둥들은 함께, 혹은 몇 개의 그룹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움직인다. 여기에 첨단 장치를 활용한 영상 투사와 조명이 더해지면 16시간에 이르는 이 장대한 오페라에 나오는 모든 배경, 즉 라인 강, 니벨룽의 지하 공간, 불로 둘러싸인 바위산, 용의 동굴 등등이 압도적인 방식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이는 노래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이나, 연극적인 기반에 입각한 독일 오페라의 전통을 모두 무너뜨릴 수도 있는 것이어서 예술적 감동보다 볼거리 위주로 전락할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르파주는 이를 의식한 듯 자신의 무대 장치가 ‘반지’의 모체인 에다 신화를 품은 아이슬란드에서 직접 목격한 ‘움직이는 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밝힘으로써 인문학적ㆍ역사적 근거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음악적으로는 유럽 최고의 극장에 조금 못 미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메트의 음악감독 제임스 러바인의 건강 탓이다. 러바인은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까지만 힘겹게 마치고는 결국 이후의 일정을 포기하고 수석지휘자 파비오 루이시에게 넘겼다. 루이시는 이탈리아계임에도 독일 후기 낭만파에 정통한 지휘자이지만 ‘반지’는 처음 지휘하는 것인데다 준비 기간도 짧아서 러바인만큼의 성숙도를 보이지 못했다. 가수들이 노래하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솜씨는 최상급이지만 ‘반지’의 미덕인 넘실대는 오케스트레이션을 살리기에는 아쉬운 점이 없지 않은 것이다. 브륀힐데를 부른 데보라 보이트도 미국 소프라노 중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지만 비교적 작은 성량과 풍성한 느낌이 없는 음색 때문에 실질적인 주인공 행세를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긴급 대타로 투입된 제이 헌터 모리스가 혈기왕성한 지크프리트를 노래하며 공연 전반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공연 외에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제공된 것은 매력적인 보너스다.
글 유형종(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