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넓은 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국적의 시대악기 연주가들이 넘쳐나고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연주가는 어떤 식의 연주를 추구한다’는 사고가 이미 굳어져버린 것 같다. 예컨대 필리프 헤레베헤는 세련되고 정제된, 적당히 진중한 음향으로 고음악이 가진 음악의 결을 낱낱이 파고드는 연주를, 앤드루 패럿은 극도로 정제되고 군더더기 없는 동시에 감미로운 합창으로 청중을 매료시키는 연주를 지향한다는 등의 사고 말이다. 시대연주의 방식과 스타일이 점차 확장되고 다변화되는, 그리하여 동질적인 듯 들리지만 다양한 해석을 추구하는 연주가들이 활동하는 시대를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리처드 이가는 열정적이고 화려하며 유쾌한 연주를 선사하는 건반악기 연주자 겸 지휘자로 알려져 있다. 바로크 음악이 전달할 수 있는 기쁨의 정서를 더욱 과장하여, 그러나 효과적으로 들려주는 흔치 않은 우리시대 연주가이기도 하다. 2008·2012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들려준 이가의 (충격적일 정도로) 쾌활한 바로크 음악 연주는 아직도 우리에게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그런 이가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요한 수난곡’을 녹음했다. 왠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인다. 바흐의 가장 진중하고, 심오하고, 철학적임과 동시에 신학적인 작품이 ‘요한 수난곡’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연주회용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지 오래지만 수난곡은 정통 루터교의 전례음악이었다. ‘요한 수난곡’은 루터교 성금요일 예배의식의 일부로 작곡·연주된 음악이다. 성금요일 예배를 위해 작곡되었기에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체포·심판·죽음을 다루는 수난 내러티브가 가사로 차용되어 있다. 이 기록들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결코 가볍게 다뤄질 수 없는 메시지, 예수의 정체성과 인간의 구원이라는 문제를 담고 있다. 이를 음향으로 구현한 바흐의 음악 역시 다분히 무겁고 두껍다. 그러니 이가와 ‘요한 수난곡’의 조합이 어딘지 부자연스러워보이는 것도 과언은 아니다.
이런 사고를 이가는 단숨에 무력하게 만든다. 동시에 이가는 과연 우리가 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는지 되묻게 한다. 시작 합창의 경우, 이가의 템포가 여전히 빠른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로 인해 증폭되는 긴장감은 오히려 이 템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한다. 이어 등장하는 복음사가의 레치타티보는 시작부터 감동적이다. 일반적으로 바흐의 레치타티보 연주는 매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된다. 어떻게 노래하면 ‘음악적’으로 표현되는지 알기 어렵다. 그런데 복음사가를 노래하는 길크리스트는 일관성 없고 파편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레치타티보를 어떻게 ‘음악’으로 만드는지 잘 아는 연주가다. 이 작품을 연주하는 기악 앙상블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가가 참여하는 통주저음 성부의 화성도 정교하면서 풍성하다.
아리아와 함께 등장하는 오보에·플루트·바이올린 등의 독주 오블리가토는 아리아를 보조하는 역할을 넘어서 작품에 새로운 음악의 결을 더하고 있다. 아주 곱고 섬세한 결이다. 이가와 수난곡의 만남에 대해 조금이나마 부정적인 시각이 기우였음을 증명하는 음반이다. 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소통하며, 이것이 열려 있음을 청중에게 보여주는 연주자가 진정한 의미의 거장이라면 이 음반은 이가가 거장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글 이가영(음악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