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 국립극장의 바그너 ‘발퀴레’

‘반지’를 빛낸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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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5월 1일 12:00 오전


▲ 소녀에서 정치적인 투쟁자로 성장하는 면모가 부각된 브륀힐데 ⓒLudwig Olah/Staatstheater Nurnberg

연출가 게오르크 슈미들라이너는 ‘발퀴레’에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부각시키면서 암울하고 폭력적인 무대 장치를 통해 연출 의도를 강조했다.
극 전체 흐름에 관한 시선이 아쉬웠음에도 뛰어난 기량의 극장 소속 성악가들과 음악감독 마르쿠스 보슈의 조화 덕에 호평을 받았다


▲ 젊은 보탄의 등장을 알린 테너 양준모 ⓒLudwig Olah/Staatstheater Nurnberg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들’로 유명한 독일의 고도(古都) 뉘른베르크 시 중심가에는 세기말 건축 양식으로 고풍스럽게 지어진 국립극장이 위치하고 있다. 약 1천여 석의 오페라극장 이외에도 현대적으로 지어진 연극 극장에서는 거의 매일 같이 오페라·연극·발레 외에도 실험적인 현대극 전반을 아우르는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오페라의 경우 대부분 전속 가수들로 이루어진 출연진은 앙상블만의 장점을 잘 살리고, 유명 연출가와 신진 연출가를 고르게 섭외하여 전체적인 균형을 잘 맞춘 시즌별 프로그램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유럽 공연예술계의 재정난은 비교적 안정적인 시스템을 자랑하는 독일 극장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차츰 중소 도시 극장의 존폐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와중에 작년 12월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중 ‘라인의 황금’을 시작으로 현재 진행 중인 뉘른베르크 국립극장의 ‘니벨룽의 반지(이하 ‘반지’)’ 새 프로덕션은 급조된 스타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 극장 자체의 기량으로 승부한 용기 있는 기획력으로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여기에는 전속 극장 시스템으로 상징되는 독일 공연예술계의 저력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유럽문화계의 따뜻한 격려가 담겨 있기도 하다.
‘라인의 황금’에 이어 지난 4월 5일 첫 공연의 막이 오른 ‘발퀴레’는 극 전체의 큰 흐름을 관조하는 시선이 부족한 연출에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뛰어난 기량의 극장 소속 성악가들과 오케스트라, 그리고 음악감독 마르쿠스 보슈의 조화가 빛난 한 편의 수작(秀作) 프로덕션이었다.

피폐한 무대장치로 처절하게 표현된 1막 무대

총 4부작으로 구성된 ‘반지’를 한 사람의 연출가가 연출할 경우 네 개의 작품을 하나의 드라마로 보는지, 또는 서로 다른 네 개의 에피소드가 엮인 형식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연출의 방향이 크게 달라진다. 이번 뉘른베르크 국립극장의 연출을 맡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중견 연극 연출가 게오르크 슈미들라이너는 전자의 길을 택했다. 그는 ‘반지’의 전체 이야기를 ‘자본주의 사회의 몰락 과정’으로 바라보았고, ‘라인의 황금’에서 신들의 세계인 발할을 ‘겉보기에만 그럴 듯한 억지스러운 낙원으로, 실제로는 추악하게 멸망해가는 세계’로 해석하여 자본주의의 양면이 공존하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자 했다. 이어 ‘발퀴레’에서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암울하고 폭력적인 무대 장치를 마련했다.
‘발퀴레’에서 내용상 논쟁이 되는 부분인 지크문트와 지클린데 남매 간의 사랑을 “잔인한 폭력과 약탈, 혼란만이 존재하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더욱 사랑과 안락함을 갈구하게 되는데, 결국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자신과 피를 나눈 상대뿐이기 때문이다”라고 명쾌하게 설명한 슈미틀라이트너는 1막의 희망 없는 상황을 피폐한 무대장치를 통해 더욱 처절하게 표현했다.
극중 배경인 훈딩의 집은 뼈대만 남은 채, 수북한 폐타이어 무더기 한가운데 덩그러니 세워져 있고, 2막 보탄의 거처인 발할 역시 좁은 창문 몇 개가 전부인 철벽 벙커다. 구석구석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을 것 같은 숨 막히는 벙커 속에서 20여 년 넘게 알베리히와의 냉전을 진행 중인 보탄은 초라하다 못해 안쓰럽게 보일 정도다. 3막에 등장하는 여덟 명의 발퀴레는 보탄의 딸들로, 전쟁 영웅들을 발할로 데려오는 임무를 맡은 여신들인데, 연출가 슈미들라이너는 이들을 남성들의 전력을 고취시키기 위한 포르노 산업의 일환인 핀업걸들로 분장시켰다.
슈미들라이너의 이러한 연출 의도는 각 장면별로만 보았을 때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각각의 연출 아이디어들이 하나의 비전으로서 통일감 있게 연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발퀴레’라는 작품이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 일례로 3막 발퀴레들이 끌어온 소년 병정 시체들은 무언가 사회고발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듯하지만, 극적인 개연성이 부족하여 이유 없는 피범벅 무대에 그쳤다. 2막 호른 반주로 진행되는 여주인공 지클린데의 악몽 장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악몽에 괴로워하는 지클린데의 등 뒤로 호른 연주자가 수소 뿔을 쓰고 선혈이 낭자한 반나체로 등장한다. 시종일관 피를 뒤집어쓰고 나오는 훈딩의 모습이 지클린데의 무의식과 연결된 것이겠지만, 전체 흐름과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연출의 당위성에 대한 의문만 증폭시켰다. 연출가가 작품 전체를 관조하지 못하고 대본의 지시문에만 의존하여 좁은 안목으로 연출한 경우를 독일에서는 흔히 ‘초견 연출(Blatt-Inszenierung)’이라 칭하는데, 이번 슈미들라이너의 ‘발퀴레’ 역시 초견 연출의 한 예로 평할 수 있을 것 같다.


▲ 전쟁 영웅들을 발할로 데려오는 임무를 맡은 여신들은 무대 위 핀업걸로 등장했다 ⓒLudwig Olah/Staatstheater Nurnberg

뉘른베르크 국립극장 소속 가수들의 뛰어난 기량

다소의 의문점이 남은 연출과 달리 음악적 성과는 놀라웠다. 전반적으로 빠른 템포로 공연을 지휘한 뉘른베르크 국립극장의 음악감독 마르쿠스 보슈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오케스트라와 극장 음향 효과를 염두에 둔 듯 지나친 포르테를 자제한 인상을 주었다. 그럼에도 각 막의 전주곡에서 들려준 장쾌한 사운드와 큰 극장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울 듯한 주인공들의 독백 장면에서의 피아노시모가 서로 좋은 대비를 이루며 음악적 완성도를 높였다. 프리미어 공연 직후 바이에른 국영 라디오 방송국으로부터 “빛나는 보탄”이라는 극찬을 받은 보탄 역의 양준모는 이번 프로덕션을 통해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젊은 보탄의 등장을 알렸다.
반세기 전 보탄 역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테오 아담이 연상된 양준모의 강건하고 압도적인 음색과 명석한 딕션, 진중한 연기는 더 큰 무대를 위해 준비된 보탄으로서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프리카 역의 로슈비타 크리스티나 뮐러에게도 찬사를 보낸다. 또렷한 가사 전달력과 무대 위에서의 아우라가 인상적이던 뮐러는 최근 필자가 접한 ‘반지’ 공연 중 가장 주목할 만한 프리카였다. 2막에서 보탄과 긴 대화를 이어가는 프리카는 엄격한 캐릭터와 낭송체의 음악 탓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지루한 역으로 인식되기 쉬운데, 이번 공연에서처럼 돋보이는 프리카를 보는 것은 분명 드문 일이었다.
훈딩 역의 란달 야콥쉬, 지크문트 역의 빈센트 볼프슈타이너 역시 음악적으로나 연극적으로 흠잡을 데 없었다. 필자가 관람한 두 번째 공연에서는 지클린데 역으로 본래 캐스팅 된 예카테리나 고도바네츠 대신 최근 유럽 주요 무대에서 바그너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각광 받고 있는 이름가르트 빌스마이어가 무대에 올랐다. 빌스마이어는 풍부한 성량과 훌륭한 프레이징으로 차세대 바그너 가수의 진면모를 보여주었다. 다만 연기 리허설 기간이 충분하지 못했던 듯 일부 동선에서 어색한 모습을 보인 점이 아쉽다.
브륀힐데 역의 레이철 토비는 폭넓은 음역으로 작곡된 등장 장면의 ‘호요토호’를 너무나도 손쉽게 노래하며 무대를 압도했다. 차후 브륀힐데로서 많은 활동이 기대되지만 이번 연출에서 시도 된 ‘소녀에서 정치적인 투쟁자로 성장하는 브륀힐데’의 모습과는 약간의 괴리감이 있었다. 극 초반 말괄량이 소녀가 아닌 ‘조숙한 맏딸’로 연출됐더라면 연극적인 면에서 더욱 설득력 있었을 듯하다.
뉘른베르크 국립극장의 ‘니벨룽의 반지’는 단기 흥행을 목적으로 한 스타 시스템에 치우치지 않고 극장 자체 역량으로 잘 기획됨으로써 세계 최고의 큰 극장만이 예술계의 미래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줬다. 이번 연작이 앞으로 이어질 ‘지크프리트’와 ‘신들의 황혼’에서 훌륭히 마무리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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