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정살인은 베리스모(verismo) 오페라의 가장 흔한 소재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베리스모 오페라는 그 이전의 오페라들과는 달리 노동자나 농민의 가난하고 고된 현실을 날것 그대로 무대 위에서 보여주었고, 삶의 여유가 없는 이들의 사랑은 대상에게 미친 듯이 집착하는 어리석은 사랑, 곧 ‘치정(癡情)’의 형태로 표현되기 일쑤였다. 베리스모의 대표작인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푸치니의 ‘일 트리티코’ 3부작에 들어 있는 ‘외투’ 등이 그 대표작이다.
1892년 밀라노에서 초연한 ‘팔리아치(Pagliacci)’는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칼라브리아 지방의 몬탈토에서 한여름 성모승천대축일에 일어난 치정살인극을 액자극(극 속에서 공연되는 또 하나의 극) 형태로 보여준다. 대축일에 광장에서 팔리아치(유랑극단 광대들, Pagliacco의 복수형)를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의 흥겹고 들뜬 합창으로 1막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곱추 광대 토니오가 관객들 앞에 나서서 묻는다.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신사숙녀 여러분?”
바리톤 가수가 노래하는 이 프롤로그 아리아는 이제부터 관객이 보게 될 ‘팔리아치’라는 극이 현실을 토대로 만들어졌음을 일깨운다.
“배우의 눈물은 거짓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극본을 쓰는 작가는 관객 여러분에게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드리려고 지난날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일들을 무대 위에 옮겨놓는답니다. 광대들도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이며, 여러분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걸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프롤로그 아리아의 진중하고 깊이 있는 가사를 들어보면 토니오는 상당히 영리하고 이성적인 인물로 보인다. 남편 카니오가 곁을 비운 사이 네다에게 열렬히 구애하다가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완력으로 겁탈하려고 하는 토니오의 모습은 그런 이유로 프롤로그의 토니오와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극의 말미에 이르면 관객은 토니오의 교활함과 치밀함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유랑극단 배우들은 2막에서 이탈리아 전통희극 코메디아 델아르테 형식으로 ‘집에 온 남편’이라는 연극을 공연하는데, 남편 팔리아초(카니오)가 외출한 사이 여주인공 콜롬비나(네다)에게 하인 타데오(토니오)가 사랑을 고백했다가 무안을 당하는 연극 속 상황이 조금 전에 일어난 현실의 상황과 비슷하게 전개된다. 콜롬비나는 젊은 광대 알레키노(베페)를 집에 불러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사랑을 나누다가 하인 타데오의 고자질로 남편 팔리아초에게 들키게 된다. 알레키노는 마을 청년 실비오인 셈이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카니오가 무대와 현실을 혼동하며 무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칼을 집어드는 장면에서 많은 연출가들은 무대 뒤에 서 있는 토니오를 시켜 카니오에게 잭나이프를 건네게 한다. 원래 레온카발로의 대본 지문에는 그런 지시가 들어있지 않지만, 연출가들은 카니오가 아닌 토니오가 바로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인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심지어 두 사람을 죽인 뒤 카니오가 관객을 향해 말하는 “연극은 끝났다(la commedia e finita)”라는 최후의 대사까지 토니오의 입으로 말하게 하는 연출가들도 있다.
“이제 공연이 시작된다… 의상을 입어라. 그리고 얼굴에 분칠을 해라. 관객은 돈 내고 왔으니 웃고 싶어 한다. 알레키노가 콜롬비나를 네게서 빼앗아 가더라도 웃어라, 광대여! 슬픔과 고통을 감추고…”
주인공 카니오가 아내의 부정을 목격한 직후에 부르는 베리스모 특유의 절규하는 듯한 아리아 ‘의상을 입어라’의 가사다. ‘팔리아치’의 관객은 엔리코 카루소·마리오 델 모나코·루치아노 파바로티·플라시도 도밍고 등 최고의 테너들이 전설적인 녹음을 남긴 이 아리아와 배역에만 집중하기 쉽다. 그러나 이 극 전체의 기묘한 조종자이자 최후의 승리자인 토니오의 다중적인 심리를 중심으로 극을 바라본다면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페라 ‘팔리아치’ 줄거리 들여다보기
고아로 버려진 네다를 데려다 어릴 때부터 정성으로 키운 유랑극단 단장 카니오는 네다와 결혼해 함께 극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네다는 늘 자신을 감시하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과 불안정한 유랑극단에서의 삶에 염증을 느껴 마을 청년 실비오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한편 네다를 흠모해온 극단 곱추 광대 토니오는 사랑을 고백하며 욕망을 드러냈다가 네다에게 모욕당하고 채찍으로 맞기까지 한다. 복수심을 품은 토니오는 야반도주를 약속한 네다와 실비오의 관계를 단장 카니오에게 일러바친다. 연극 무대 위에서 배신당한 남편 역할을 하던 중 분노와 배신감을 주체 못해 현실과 무대의 경계를 혼동하기에 이른 카니오는 네다를 칼로 찔러 죽이고, 객석에서 달려 나온 실비오에게도 칼을 꽂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