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열음의 ‘라 발스’
뉴욕적인 에너지가 흘러넘친 시간
지난 11월 15·16일,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라벨 ‘라 발스’로 뉴욕 무대에 섰다. 양일간 현악 앙상블 뉴욕 클래시컬 플레이어스(New York Classical Players, 이하 NYCP)와의 협연으로 양질의 음악을 모두에게 장벽 없이 제공하는 NYCP의 취지에 따라 전석 무료 공연으로 열렸다. NYCP는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다국적 젊은 음악가들로 구성된 현악 앙상블이다.
2년 전 개관한 900석 규모의 리디머교회 콘서트홀에서 열린 첫날 공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들뜬 모습으로 연주를 기다리는 관객 중에는 고국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득 찬 상당수의 한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첫 무대는 NYCP가 올라 시벨리우스의 로망스 C장조 Op.42로 따뜻한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전문 콘서트홀이 아닌 공간의 한계로 현악기 음향이 제각기 흩어졌지만, 마치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처럼 연주를 이끌어나가는 앙상블의 모습으로 인해 마치 살롱에 초대되어 음악을 감상하는 것 같은 소박한 맛이 났다.
다음으로 손열음이 준우승을 차지한 2009년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연주됐던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울려 퍼졌다. 본래 오케스트라와의 협주를 위해 작곡된 곡인지라 현악 앙상블을 위한 맞춤형 편곡에도 불구하고 음향을 충분히 지원하지 못하는 홀의 환경으로 인해 현악 앙상블의 음향이 피아노와 ‘겨루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손열음의 연주는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던 2009년 콩쿠르 당시 연주에 노련함이 더해져 젊은 거장으로서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무엇보다 쇼팽의 곡들과 함께한 오랜 시간들이 그녀의 루바토에 깊이를 더해준 듯했다. NYPC의 음악감독 김동민은 손열음을 두고 “기치와 음악적 깊이를 함께 갖춘 몇 안 되는 젊은 피아니스트 중 하나”라고 찬사를 보냈다.
2부에서는 NYPC가 드뷔시의 현악 4중주 G단조를 편곡한 현악기를 위한 안단티노와 스웨덴 출신 작곡가 다그 비렌(1905~1986)의 현악기를 위한 세레나데 Op.11이 연주됐다. 신고전주의적인 조성음악으로 생기 있는 음향을 담고 있는 비렌의 곡은 NYPC의 연주로 작품 속에 담긴 위트가 잘 살아났다.
마지막으로 손열음의 뉴욕 공연 제목이기도 한 라벨의 ‘라 발스’가 이어졌다. 본래 관현악곡이지만 작곡가 자신이 피아노 두 대를 위한 곡으로 편곡한 바 있는 이 작품을, 이번 무대에선 솔로는 라벨의 피아노 버전을 그대로 살리고 현악기들은 오케스트라 원곡의 특징을 살리면서 NYPC를 위해 특별히 편곡된 스코어를 연주하도록 만들어졌다.
레퍼토리 기획뿐만 아니라 실연 모두 이번 무대의 하이라이트였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폭발적인 연주 기량이 ‘라 발스’를 통해 여지없이 펼쳐졌고 현악 앙상블도 피아노와 동등한 위치를 쟁취해나가며 강렬한 연주가 이루어졌다. 곡의 특성상 강렬한 투티가 많았기 때문에 쇼팽 협주곡에서 보이던 소리의 빈 공간들은 ‘라 발스’에서 모두 채워졌다. 연주가 끝난 뒤 관객들의 끊이지 않는 박수에 손열음은 쇼팽의 왈츠 Op.64-2로 화답했다.
뉴욕은 언제나 새로운 젊은이들의 문화가 창조되는 도시다. 이번 연주는 한국이 자랑하는 젊은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뉴욕의 젊은 음악가들이 젊은 홀에서 만나 전통적인 클래식 음악 환경을 넘어서는 자리이자 굉장히 ‘뉴욕적’인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