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출신 테너 가수지만 나폴리를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날린 요한 하세의 오페라 ‘시로에’가 드디어 파리에 입성했다. 이번 공연은 유럽 최고의 왕실 오페라극장이라 불리는 파리의 베르사유 왕실 오페라극장에서 그의 희귀작을 프랑스 초연한다는 데에도 의미가 있지만 세계적인 카운터테너 막스 첸치치가 기획·연출·주연까지 도맡은 작품이라 더욱 기대를 모았다.
당시 궁정 극작가였던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가 대본을 쓴 ‘시로에’는 1733년 볼로냐 말베치 극장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 작품은 대본만 본다면 중세의 구습을 타파하려는 근대 계몽주의 사상이 준동하고, 음악적으로는 18세기 중반까지 대유행한 로코코음악 양식에서 18세기 후반 성악 대신 관현악으로 오페라 무대의 효과를 높인 작곡가 글루크의 신경향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새로운 패기가 가득한 작품이다. 그러나 하세의 대표작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던져준 신선한 충격을 기대한 청중이라면 이번 ‘시로에’ 초연은 다소 실망스러웠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첸치치는 매우 지적이고 깐깐한 그만의 분석으로 새로운 ‘시로에’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폭군 코스로에의 낡고 두터운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민중의 기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군주상을 제시한 오페라 ‘시로에’의 주인공 시로에는 극작가 메타스타시오가 심취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부합하는 가장 이상적인 캐릭터로 보인다. 첸치치 역시 ‘시로에’를 ‘이상에 가득 찬 이야기’라고 정의한 후 무대 역시 마치 동화 속 삽화 같은 느낌으로 꾸몄다. 미니멀하면서도 동양적인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한 벽은 극의 주요 배경이 되고, 아라베스크 무늬 주변에는 꽃·별 모양의 모티프가 비디오 영상으로 투사되어 동화적 분위기를 더한다. 의상 역시 휘황찬란한 비단으로 페르시아의 찬란했던 영화(榮華)를 반영한다. 그중 코스로에의 침실 위로 쏟아져 내리는, 무대조명 예술가 다비드 드브리네의 빛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하이라이트는 3막. 해골들이 널브러진 무시무시한 감옥에서 사슬에 묶인 채 토해내는 시로에의 아리아 ‘죽음의 절망 속으로’는 그야말로 가극의 절정이다. 첸치치의 긴 프레이징과 이미 시로에가 되어버린 그의 절절한 감정 표현이 하나로 어우러진 순간이었다.
코스로에 왕의 애첩 라오디체 역을 맡은 러시아 소프라노 율리아 레즈네바는 떠오르는 신성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난이도 높은 다양한 아리아를 뛰어난 기교와 고음으로 소화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교묘한 솜씨에 슬쩍 반감이 끼어들었다. 마치 완벽한 고음이 세팅된 인형을 보는 느낌이랄까. 시로에의 충실한 벗 아라세 역을 맡은 소프라노 로런 스너퍼는 성량이 뛰어나게 풍부하지는 않지만 고운 감성으로 모범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여 주목받았다. 테너 후안 산초는 병약하면서도 악독한 기질이 번뜩이는 폭군 코스로에 역을 카리스마 넘치게 연기해 인기를 끌었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색감, 드라마틱한 정서로 하세의 수려한 멜로디를 관객에게 선물한 지휘자 게오르게 페트루도 하세의 위풍당당한 파리 입성을 도운 큰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