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야외무대에 세계의 춤이 어우러지다
해운대 모래축제가 남긴 거대한 조형물 옆 백사장에서 제12회 부산국제무용제가 개최됐다. ‘춤추는 부산, 흥겨운 세상’을 주제로 5월 20일부터 6월 7일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이 서막과 폐막을 장식하는 중간에 개막 공연이 진행되었다. 6월 3일, 개막식에 참가한 서병수 부산시장이 ‘댄싱 퍼레이드’ 우수 단체를 시상하면서 축제의 막을 열었다. ‘댄싱 퍼레이드’는 부산 16개구 공연단이 용두산 공원과 광복로를 행진한 대중적 행사다. 이어진 메인 무대(6월 3~5일)는 세상의 모든 춤을 한자리에 모은 듯 다채롭고 화려했다.
필자는 해운대 바다를 배경 막처럼 활용한 야외무대를 3일간 지켜봤다. 공식 초청 공연은 주로 외국 단체가 맡았고, 부산 지역의 중요무형문화재 동래야류나 여러 대학무용단이 본 공연 전에 관객의 주목을 끌었다. 첫날은 아르헨티나 탱고, 티베트 민속무용, 인도 전통무용, 프랑스·덴마크 등지의 다양한 현대무용, 한국 팀의 발레가 공연되었다. 둘째 날은 우천으로 인해 후반부 공연을 진행하지 못했다. 이런 일이 야외무대에서는 드물지 않고, 콩쿠르나 유료 공연이 아닌 경우에는 환불 같은 큰 문제도 없다. 특히 다행스럽게도, 거의 모든 외국 단체를 이틀 공연으로 배정해 도쿄 시티 발레를 제외한 모든 팀을 셋째 날에 다시 볼 수 있었다. 전통예술에서 힙합까지, 어린이 북춤에서 볼룸댄스까지, 관객 참여용 막춤에서 미학의 맥을 짚는 창작품까지 총망라한 무대는 무용의 다양한 형태와 의미와 목적을 객석에 전했다.
전통 분야에서는 중국의 간쯔 민족가무단과 인도 나드루프가 자신들의 민속춤을 소개했다. 1958년에 설립된 티베트의 간쯔 민족가무단은 ‘강바 렌’과 ‘전다 궈좡’을 공연했는데, ‘강바 렌’의 ‘강바’는 ‘강바 사람’을 의미하며, ‘전다 궈좡’은 ‘전다 지역의 고전’을 의미한다. 티베트족의 호방한 성격을 강조하며 행복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남녀 12명이 출연한 역동적인 무대는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티베트 전통 복식으로 우선 눈길을 사로잡았다. 땋아 내린 긴 머리, 털 장식 모자, 검정 치마에 노랑 자수 장식, 붉은 상의, 장삼, 검정 부츠가 화려했다. 남자들의 춤과 여자들의 춤, 그리고 모두가 합세한 절정이 민요와 타악 장단에 전개됐다. 장삼을 날리는 빠른 회전기와 발동작의 신명으로 갈채를 유도했다.
인도 무용단 나드루프의 ‘나드’는 타악기 소리를, ‘루프’는 시각언어를 의미한다. 단체를 이끄는 샤마 바테는 35년 이상 활동해온 안무가로 첫날 공연 ‘파람파라 케 파다친허’는 ‘전통의 발자취’, 두 번째 작품 ‘파리나티’는 ‘춤 인생의 결실’로 해석된다고 한다. 긴 치마와 속바지를 입은 맨발의 무용가들이 열을 지어 이동했다. 느린 손동작, 발 구르기, 손가락의 작은 변화, 목놀림, 상체를 사선으로 눕힌 회전 등에서 한국 춤이나 플라멩코의 느낌이 언뜻 스쳐가기도 했다. 한국 단체 중에서는 리을무용단의 ‘진도북춤’이 맥을 같이했다. 흰 치마에 빨간 저고리를 입은 여인들이 양손에 굵은 북채를 들고 독무, 3인무, 7인무로 고인이 된 명인의 남성적 리듬을 재연했다.
예술적 측면이 돋보인 작품으로는 프랑스의 르 게트르-뤼크 페통&시에의 ‘오스카’를 우선 꼽고 싶다. ‘감시인’을 의미하는 이 단체는 1994년 창단되었고, 단장 겸 안무가 뤼크 페통은 유럽과 미국의 현대무용을 다양하게 경험한 이력을 지녔다. 기계적 움직임을 고안한 독일 안무가 오스카 슐레머의 1927년 작 ‘막대 무용’에서 영감받은 1997년 작 ‘오스카’는 원래 4명이 출연하는 40분짜리 작품이나 이번 무대에서는 남자 파트만 공연했다. 검정 반바지 타이츠를 입은 두 남자의 몸에는 여러 개의 막대가 달려 있었다. 양손에 가장 긴 막대 2개, 양 무릎에 짧은 막대 4개, 양팔에 중간 길이 2개씩, 총 10개의 막대에 싸인 인체의 운동 선은 자연미를 크게 벗어났다. 걷거나 가볍게 뛰면서 탈인간화한 동작 이미지를 드러냈다. 노 젓기, 나비 모형, 날개 짓, 막대 나눠 갖기를 통해 작은 소품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비약 효과를 실험하듯 보여주었다.
1999년 창단된 덴마크 뮤트 컴퍼니 피지컬 시어터의 ‘자두와인, 고속도로, 레몬’에는 2014년 초연 때부터 한국 음악가들이 출연해왔다. ‘피지컬 시어터’란 정형화된 무용을 탈피한 온갖 몸짓의 공연물에 쓰이는 명칭으로, 뮤트 컴퍼니는 연극, 현대무용, 크래쉬 댄스, 라이브 음악, 무술 등을 아우른다. 캐스퍼 라븐외이가 안무하고 출연도 겸한 작품의 분위기는 괴기스러웠다. 출연진의 몸짓은 곡예적이며, 몸을 사리지 않고 내던졌다. 미스터리·전설·신화와 유령 이야기를 끌어내는 가야금·해금·대금·타악기 연주는 분주하고 난해했다. 한국 악기의 감춰진 음색을 탐한 안무가의 실험적 시각이 돋보였다.
부산을 대표해 출품한 박은화 무용단의 ‘순간을 춤추다’는 해운대 무대에 익숙한 안무가의 이점을 십분 살렸다. 바다와 만난 몸의 에너지는 백사장에 가득 꽂힌 흰색 깃발의 휘날림, 제례적 음악, 무술적 몸짓의 조화로 대체되었다. 이 밖에도 경희대 출신 이정인이 안무를 맡은 불가리아의 아톰 시어터,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보디트래픽, 최고 수준의 아르헨티나 탱고를 소개한 레안드로 올리버와 라일라 레스크,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단체 LDP 등이 축제를 빛냈다.
부산국제무용제 운영위원장 김정순은 “날씨가 좋지 않았던 점을 제외하면 대만족한 행사”라 자평했다. 초청 단체들의 수준이 높았고, 서울에 의존해온 프로그래머를 부산에서 찾았으며, 안무가 배출 창구 역할을 강화시켰다. 특히 올해 처음 시작한 ‘댄싱 퍼레이드’와 ‘스쿨 투어’는 시민 참여와 외국인들의 재능 기부라는 점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로 꼽았다. 재정 여건에 비해 행사 규모(11개국 57개 무용단)가 크고 성과도 월등한 이유는 운영위원들의 희생적 참여 덕이라며, 이런 사실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제12회 부산국제무용제는 예술성과 대중성, 교육적 연계 효과까지 고루 챙겼다. 사심 없는 봉사 정신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외국 단체 웹 사이트에 부산국제무용제 출연 일정이 올라갔다는 자체만으로도 부산은 이미 대단한 홍보 효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수혜자는 물론 관객들이다. 짐작과 달리, 조용하고 단조롭지만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에 열광하는 관객 반응을 통해 이 무용제가 추구해야 할 대중성을 가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술가들에게 예의를 갖추지 못한 공연 환경은 큰 결단이 필요한 문제다. 한국 무용계의 주요 행사 중 하나로 자리 잡은 부산국제무용제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만한 특별한 자연 조건을 갖췄다. 이 조건을 완벽하게 활용할 수 있는 날이 언제일지 궁금하다.
사진 부산국제무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