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5일~2017년 1월 22일
드림아트센터 2관
노래로 만나는 시인의 사랑
뮤지컬은 원작이 따로 있는 경우가 흔하다. 실제 역사이거나 실화인 경우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실존했던 사건보다 더 감성적이고 감동적으로 포장되는 경우도 많다는 점이다. 노래와 춤, 무대가 주는 환상성 때문이다. 상상을 자극하는 극적 변환은 실화보다 큰 감동을 경험케 만들 수도 있다.
창작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도 그런 경우다. 공연명을 시인 백석의 시 제목 그대로 차용했다. 무대는 백석과 그가 사랑했던 자야 김영한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가난한 시인은 동향 출신인 기생 자야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져 동거를 하지만, 집안의 극심한 반대로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하고 결국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헤어져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시 못 만나는 비극적 삶을 살았다. 백석을 평생 그리워하던 자야는 당대 최고 요정으로 손꼽혔고 대원각을 운영하며 큰 재산을 모으지만, 결국 말년에는 이를 조계종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사찰로 쓰이게 된다.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가 그곳이다. 평생 모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세상의 질문에 “1000억 재산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뮤지컬에는 길상사에 한번 들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무대는 사실적 묘사보다 상징적이고, 압축된 맛을 적절히 활용한다.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을 넘나들지만 분장이나 의상 교체 대신 목소리 톤과 연기, 몸과 움직임의 동선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특히 자야는 이 뮤지컬을 이끌어가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자 감성의 중심이다. 관객들은 그녀의 심리 변화와 대사, 실제 마음과 반대로 퉁퉁거리며 내뱉는 사랑스런 투정들을 통해 속 깊은 교감을 이룬다.
연극과 뮤지컬 무대를 오가며 작가이자 각색자, 연출가로 활약한 오세혁이 이 작품의 산파다. 그는 백석을 좋아해 가방 속에 시집을 넣고 다녔는데, 연희단거리패의 ‘백석우화’를 보고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는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극작과 작사는 박해림, 작곡은 채한울이 맡았다. 한 대의 피아노만으로 수수하고 담담하지만 격정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내는데, 뒷맛이 긴 여운을 남겨준다. 무엇보다 흐뭇한 미소와 안쓰러움이 담긴 ‘힐링’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소극장 뮤지컬 특유의 작지만 아담한 무대도 인상적이다. 디자이너 서숙진의 손길이 만든 이미지다. 하얀 대나무가 펼쳐진 풍경은 구체적인 장소라기보다 백석과 자야의 마음속에 있는 그들만의 정원을 형상화했다는 설명이다. 백석의 시처럼 종반부에는 함박눈이 하얗게 내리기도 하는데, 진짜 눈이 아닌 대나무 숲을 환히 비추는 조명으로 상황을 묘사한다. 어찌나 맑고 아름다운지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감성을 자아냈다. 이야기의 극적 구성에 어울리는 무대의 시각적 효과가 얼마나 감동스러울 수 있는지를 실감하게 만들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결혼 정보회사의 스펙으로 점수를 매기고 계약을 하듯 짝을 만나는 요즘 사람들에게 더욱 울림이 큰 작품이 아닐까 싶다. 세상을 살아내게 하는 가장 큰 힘은 역시 ‘사랑’뿐이라는 생각이 쓸쓸한 늦가을을 더욱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시집을 다시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사랑스런 창작 뮤지컬이다.
사진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