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IS NOW
정교하고 아름다운 러시아 피아니즘은 세계 피아노 음악사의 중요한 계보를 이끌어 왔다. 다채로운 음색과 탄탄한 테크닉, 섬세함으로 호평받아 온 피아니스트 한상일이 3년 만에 자신의 음악 프로젝트인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전곡 & 러시안 시리즈’의 세 번째 무대를 갖는다. 한상일은 15세에 국내에 데뷔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 과정 졸업 후 독일 뉘른베르크 음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지 않고 이례적으로 최고연주자과정에 진학했다. 귀국 후 모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연주자과정을 수학했다. 2015년 에피날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 2006년 미주리 서던 콩쿠르 3위, 2011년 부소니 콩쿠르 12명의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주목받았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이화여대·경희대·서울시립대·예원학교·서울예고에 출강 중이다. 끊임없는 열정으로 젊은 패기 속에 변하지 않는 진지한 메시지를 담아 왔던 그가 전하는 프로코피예프와 라흐마니노프의 아름다운 음악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자.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전곡과 러시안 시리즈 공연이 세 번째 무대를 맞았다. 그동안 진행하면서 새롭게 배우고 느낀 것들이 있을 것 같다.
라흐마니노프의 정통성과 프로코피예프의 진보적인 음악을 연구하면서 19~20세기 러시아의 문화와 그 배경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 동양인으로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러시아의 문화를 알아간다는 점이 의미 있었고 흥미로웠다.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연주하고 준비하면서 그의 음악 속에 교향적 요소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피아노 협주곡에 가장 큰 애착을 갖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피아노 독주곡에서도 그의 교향적 색채가 느껴진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즘은 피아노 그 이상을 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프로코피예프의 초기 작품은 후기와는 다르게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성이 강조된다. 그리고 아방가르드함에서 나오는 서정성이 더욱 빛난다. 특히 이번에 연주하는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런 대표적인 작품이다. 특히 그의 음악 속 특유의 그로테스크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예리하고 날카로운 통찰력이 필요하다.
이번 리사이틀에서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을 직접 개정(Revise)을 했는데, 어떠한 계기로 개정 작업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작품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레 작품부터 공부해야 할 것 같아 우선 10곡의 피아노 작품 Op.75와 피아노로 편곡된 발레 음악 스코어 Op.64를 같이 구매했다. 그리고 서로 비교하면서 연습을 했는데 피아노 작품 Op.75가 점점 허전하게 느껴져 다시 자세히 알아보니 프로코피예프가 발레 초연을 하기 전 음악의 홍보를 위해서 따로 모음곡으로 출판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1시간이 넘는 3편의 모음집인 오케스트라 버전(Op.64bis, Op.64ter, Op.101)은 드라마의 연결이 충분한 반면 피아노 작품은 약 30분 정도의 곡이라 스토리의 연결도 허술하고 가장 중요한 발코니 씬, 머큐시오와 티볼트의 죽음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프로코피예프는 점점 더 무대에 올리기 쉬운 다른 버전을 출판함으로써 더욱 무대에 자주 연주되며 음악을 홍보하는 계획을 세웠고, 그만큼 이 작품에 대한 애정도 많았다. 아쉽게도 Op.75의 10곡으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스토리가 부족하고 관객의 이해도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을 내려 이 고민을 백건우 선생님께 드렸더니 선생님께서도 드라마로 연주되면 더욱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해 주셨다. 감사하게도 선생님은 개정하는 과정에도 많은 도움을 주셨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발레 음악과 오케스트라 모음집을 기반으로 약 30분이었던 피아노 모음곡을 약 1시간으로 개정하게 되었다. 편곡은 아니고 약간의 개정과 편집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라흐마니노프와 프로코피예프는 러시아 피아니즘을 대표하는 작곡가들인데 이들 작품의 스페셜리스트들의 연주도 많이 사랑받고 있다, 특별히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있나. 호로비츠, 리히테르, 소콜로프, 백건우 선생님의 연주를 가장 좋아한다. 호로비츠의 음색과 드라마틱한 표현력, 리히테르의 묵직함, 소콜로프의 압도적인 스케일 그리고 백건우 선생님의 유연한 레가토와 서정성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시리즈 연주는 학구적인 연구도 이루어지기 때문에 연주뿐 아니라 교육을 할 때도 굉장한 도움이 될 것 같다.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아빈, 프로코피예프는 20세기 피아노 음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이며, 같은 시대에 활동했지만 각자 전혀 다른 길을 개척한 음악가들이다. 정말 매력적인 시대의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시각으로 러시아 음악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이 연주와 교육에 많은 도움이 된다.
시리즈 공연의 계획은 어떻게 진행될 예정인가.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전곡이 마무리되면 러시안 시리즈 리사이틀은 자연스럽게 마무리가 될 예정이다.
하지만 러시안 협주곡들도 꾸준히 연주할 계획이고 러시안 시리즈 리사이틀이 아니더라도 많은 러시안 작품들도 계속 무대에 올리고 싶다.
같은 세대의 훌륭한 음악가들과의 음악작업도 많이 하는 것 같다. 함께 하고 싶은 음악이나 무대들은 어떤 것인가?
같은 세대의 훌륭한 음악가들과의 작업은 늘 즐겁고 감사한 시간이다. 무대에서 함께 기쁨을 만들어 나가는 실내악을 더 공부하고 싶다. 여러 악기들과 공연을 하면서 얻는 배움도 무척 큰 것 같다. 실내악을 통해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작품을 바라보게 된다.
음악가로서 어떤 비전을 갖고 있나.
2008년 2년의 짧은 독일 유학을 마치고 만 24세에 귀국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한국에서 성장하는 음악인, ‘메이드 인 코리아’가 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 재학 중 국내 교육만으로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 당시 순수 국내파 피아니스트라고 불리던 좋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이신 김대진 선생님께서는 앞으로는 외국에서 한국으로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러 유학을 오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나 또한 연주자, 교육자로서 한국에서 성장해 가면서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과 교육이 세계로 뻗어 나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글 국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