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10개월의 제작 기간, 어린이 47명의 가창, 그래미어워드 레코딩 수상자 황병준의 믹싱과 마스터링, 초고음질(24bit 48kHz)의 녹음으로 빚어진 웰메이드 동요집이다. 봄·여름·가을·겨울 편으로 구성된 4장 CD에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1924년 창작동요 ‘반달’(윤극영 작곡)을 시작으로 근현대의 시간 속에서 불린 123곡의 창작동요들이 담겼다. 각 앨범에 붙은 계절명은 수록된 동요를 통해 느껴볼 수 있는 계절감이자, 어린 시절 각 계절에 즐겼던 놀이와 감성을 반추시키는 추억의 낱말과도 같다. 각 CD마다 첨부된 사십여 쪽 분량의 두툼한 해설지에는 동요 가사들이 따듯한 글씨체를 입고 적혀 있다. 동요는 엄마가 불러준 노래이자 친구들과 함께 부르던 노래였고, 부모가 된 자신이 아이에게 불러주고 싶은 노래였다. 앨범의 제목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에게’라 붙은 이유다. 그 노래를 부르고 들을 때 어린이들은 ‘아이다움’의 빛을 발하고, 삭막해지는 세상에는 동심의 윤기가 더해졌다. 그래서 동요는 일제강점기와 전쟁기에는 희망을 품은 ‘빛의 노래’였고, 어른이 되었을 때는 ‘추억의 노래’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동요는 멀어지고 있다. 아이들과 동요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어느 순간 ‘잃어버린 노래’가 되었다. 이러한 동요는 어떤 역사를 지나왔던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출반과 함께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 동요에 담긴 시대적 배경들을 살펴보고, 한 세기의 흐름을 추억해 본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1920
‘어린이’의 탄생 | 방정환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는 가사의 ‘어린이날 노래’(윤극영 작곡)는 1948년에 작곡되었지만, 어린이날이 처음 지정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던 1923년 5월 1일. ‘딸년’ ‘아들놈’ 등으로 불리며, 성인을 기준으로 아직 미숙하던 존재로 인식되던 아이들에게 ‘어린이’라는 새 이름과 세대명을 지어준 이는 방정환(1899~1931)이었다. 방정환은 1923년 우리나라 최초로 어린이를 위해 발간한 월간 ‘어린이’ 창간사에 다음 같이 적었다. “새와 같이 꽃과 같이 앵도 같은 어린 입술로 천진난만하게 부르는 노래, 그것은 고대로 자연의 소리이며, 고대로 하늘의 소리입니다. (…) 거기에는 어른들과 같은 욕심도 아니하고 욕심스런 계획도 있지 아니합니다. 죄 없고 허물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하늘나라! (…) 이 모든 깨끗한 것을 거두어 모아내는 것이 이 ‘어린이’입니다.” 방정환은 어린이를 성인이 되지 못한 미완의 존재가 아닌 문화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그 세대만의 독특한 감성을 갖고 있는 독립적인 인격체로 여겼다. 어린이야말로 장차 세상을 이끌어갈 꿈나무라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20·1930
창작동요 형성 | 전성기
우리가 창작동요를 부르게 된 것은 서양음악 도입 이후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전래동요가 있어 민요와 함께 오랜 세월 불려왔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강강술래’ ‘동무동무 씨동무’ 등이 전래동요에 해당한다. 민요나 전래동요 가락은 쉽고 단순해 어른들도 아이들도 쉽게 익히고 부를 수 있었고, 작사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채 구전되어왔다. 따라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기도 하고 일부는 변형되어 전해지기도 했다. 창작동요는 전래동요와 달리 새롭게 창작된 노래로 1930년대에 이르면 많은 작곡가와 아동문학인들이 동요의 전성기를 만들어나간다. 질적·양적으로 풍성해졌고, 동요를 통해 민족의 미래인 어린이들의 자생력을 키우자는 운동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일제 치하라는 어두운 시대 속에서, 미래를 짊어질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어른들이 갈망하는 ‘희망’과 ‘빛’이 담겼다. 한편, 동요는 아이들의 심성에 침투하는 세파의 방파제이기도 했다.
1930·1940
일제 치하 | 광복 | 새 나라
193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아이들은 전장에서 불리는 군가를 부르거나, 일제에 충성하는 노래들을 뜻도 모른 채 불러야 했다. 하지만 뜻을 품은 어른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우리 동요를 전파했다. 어린이들의 앞날에 대한 걱정, 동요를 통해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려는 열망이었다. 힘든 시기를 지나고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이했다. 이 음반에는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동요 19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새 나라의 어린이’(윤석중 작사·박태준 작곡)는 이러한 광복의 기쁨과 어린이의 다짐을 나타낸 곡으로, 광복 후 최초로 창작된 동요이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꿈과 희망을 지닌 어린이로서 어떤 삶과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를 가사가 잘 대변해준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서로 서로 돕습니다. 욕심쟁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해방과 함께 새 나라의 주역 어린이들은 더 많이 배우고 갈고 닦아야 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동요가 일제 치하의 현실에서 벗어나 상상이나 동화 속의 이야기를 노래했다면, 1940년대의 동요는 현실을 새롭게 만들 ‘똑똑한 어린이’가 되기를 노래하는 동요들이 많은 이유다. ‘새 나라의 어린이’ ‘졸업식 노래’ ‘어린이날 노래’ ‘어린이 행진곡’ 등이 그렇다.
1950·1960
한국전쟁 | 동요 전성기
1950년대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치유의 시기로, 마음을 순화시키는 동요가 다수 발표됐다.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방송공사(KBS)의 ‘방송동요’이다. 1948년 종달새동요회를 결성하여 이끌던 한용희(1931~2014)가 방송국 PD가 되면서 ‘새 시대의 새로운 동요’라는 이름 아래 방송을 통한 동요 보급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이러한 방송 동요를 통해 많은 문학인과 작곡가들이 한마음으로 동요 보급에 힘쓰며 동요는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본 앨범에 1950년대를 대표하던 ‘나뭇잎 배’ ‘파란마음 하얀마음’ ‘초록바다’ 등 28곡의 동요가 수록되어 있다. 그중 한용희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꼬마 눈사람’ ‘푸른 잔디’ ‘파란마음 하얀 마음’ ‘고향 땅’ ‘우리 유치원’ ‘흰 구름 푸른 구름’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동요의 전성기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1970·1980
대중음악 전성시대 | 밀려버린 동심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산업화가 시작되고, 자극적인 성격의 대중문화가 활성화됐다. TV·라디오 등이 신식 매체는 아니었지만, 여러모로 보급되며 국민 정서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가요·팝·CM송 등의 대중음악이 어린이들 정서에도 깊게 침투하기 시작했다. 1975년 5월, 국가는 긴급조치 9호를 실행한다. 대중가요에 금지곡의 딱지가 붙기 시작했고, 음반마다 이른바 ‘건전가요’를 한 곡씩 의무적으로 넣어야 하는 분위기였다. 위축된 대중가요 사이로 클래식음악이 교양음악으로 더욱 깊이 자리 잡았고, 동요가 건전가요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1970년대를 배경으로 어린이들의 노래경연 프로그램인 KBS의 ‘누가누가 잘하나’가, 1980년대에 방송창작동요대회가 동요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점차 증가한 경연대회는 참가자들에게 동요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육·보급하는 역할을 했고, 어린이들은 대회 참가를 목적으로 동요를 열심히 부르곤 했다. 이 음반에 수록된 1960~70년대의 동요들은 이러한 경연 프로그램에서 사랑 받던 동요들이다.
1990·2000·2010
잃어버린 노래 | 그리운 노래
1990년대에 들어서 시청률과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제일 먼저 폐지된 것이 어린이 프로그램이었고, 공백은 흥미 위주의 프로그램들로 채워졌다. 시대적으로는 풍족해졌지만, 어린이들은 동요 한곡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바빠졌다. 영어를 배워야 하는 국제화시대였고, 입시라는 관문 앞에서 생존을 위한 공부가 더욱 중요해진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1990년대를 지나면서 1970~80년대에 풍성했던 동요제도 급격히 줄었다. 2005년부터 방영된 KBS ‘누가누가 잘하나’가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동요프로그램이다. 음반에 수록된 123곡의 동요들 중 끄트머리를 노래들은 1990년대에 만들어진 동요들이다. 이처럼 동요는 일제강점기, 해방기, 전쟁기 등 시대와 함께 호흡해온 어린이들의 노래이다. 하지만 오늘날 ‘잃어버린 노래’가 되고 있다. 우리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그들만 노래’를 만들어주는 것이 이 시대를 살고, 미래를 내다보는 어른들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