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 약한 존재와 더 약한 존재의 연대

뮤지컬, 노래의 인문학_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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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1월 13일 9:00 오전

응답할 수 없는 시간

복고 소재로 시즌마다 성공을 거둔 드라마가 있으니 ‘응답하라’ 시리즈다. 1997년으로부터 1994년을 거쳐 1988년까지 드라마가 복구한 옛 시절은 추억과 낭만으로 가득하다. 어리숙한 설렘으로 꽉 찼던 학창 시절, 옹색했지만 이웃의 정이 오갔던 좁은 동네, 함께 어울렸던 어릴 적 친구들. 하지만 복고의 낭만을 허락하는 시점은 딱 요만큼이다. 1988년 이전은 정치적 파탄의 시간이고, 1998년부터는 경제적 파탄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IMF 이후 국가는 부도났고 은행은 망했으며 기업은 문을 닫고 사람들은 내쫓겼다. 만약 1998년을 향해 응답하라고 외쳤다면 덕선이 아버지는 해고됐고 나정이는 비정규직이 되었으며 시원이는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답했을 것이다. 낭만으로 되돌아볼 과거의 시한은 진즉에 끝나버렸다. 남은 것은 경제적 몰락의 후유증이다. 얼어붙은 취업 시장, 빈번한 정리해고, 벌어지는 빈부 격차, 늘어나는 자살률 등 ‘어려운 시절’은 지금껏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사이에 사람들은 잉여가 되어버렸다. 실직자는 직장을 찾으면 뗄 수 있는 꼬리표이지만, 잉여는 아예 사회적 용도를 부여받지 못한 존재라는 점에서 더 절망적이다. 사회적 무용지물이 돼버린 이 시대의 잉여들을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신 없이도 잘할 수 있고, 당신이 없으면 더 잘할 수 있다!’ 오로지 실용을 잣대 삼아 인간을 대하는 무례함은 그 선을 훌쩍 넘어버렸다.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자리를 아예 없애버린 사회에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드라마의 시간은 1997년에서 그쳐버렸다. 1998년의 시간을 흐르게 하는 동력은 아마도 예술이 될 것이다. 절망의 현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상상력은 언제나 예술의 몫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주제가 항시 인간임을 기억하자면, 이런 비인간적인 시간이야말로 예술이 포착해야 할 장면일 것이다. 그때로 돌아가서 그 절망의 시간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무엇으로 응답해야 할까. 만약 응답할 말을 찾지 못한다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여전히 몰락의 과거에 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다행인 것은 이런 경험이 비단 우리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계 곳곳이 이렇게 무너져 내렸고, 그곳의 많은 사람들 역시 잉여가 되었으며, 그 절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그 절망 안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예술적 응답 또한 켜켜이 쌓여왔으니,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이 중에서도 백미로 꼽을 작품이다.

두 개의 싸움

뮤지컬로서 ‘빌리 엘리어트’의 만듦새는 정말이지 탁월하다. 드라마의 구조에서도 어디 하나 빈틈이 없고, 음악의 대중적인 면모 또한 모자람이 없다. 무엇보다도 뮤지컬에서 안무가 얼마나 중요한 공연언어인지를 이 작품만큼 분명하게 각인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공간을 만들어내는 전환의 상상력은 또 얼마나 능수능란한지. 한 마디로 이 작품은 왜 반드시 뮤지컬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증명인 셈이다. 뮤지컬이란 장르를 향해 의심이 생길 때마다 이 작품을 보고 나서 다시 장르에 대한 믿음을 회복했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더라. 2001년에 발표된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 리 홀과 감독 스티븐 달드리가 2005년 웨스트엔드의 뮤지컬 창작자로 자리를 옮겨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놀라움은 배가된다. 영화도 대단한데 뮤지컬 역시 뛰어난 거다. 장르를 오가는 창작자는 종종 있지만, 장르를 막론하고 완성도를 일궈내는 창작자는 거의 없다. 똑같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장르를 바꾸면 그 결이 흐트러지기 쉽건만 이 작품에서는 천만의 말씀이다. 이 작품은 뮤지컬다운 미덕으로 뮤지컬답지 않은 무게를 만들어낸다. 그 무게의 토대는 리얼리즘이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영국의 광부노조가 파업 투쟁을 했던 시기이다.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광부노조는 선봉에 섰고 가장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유서 깊은 영국의 노동계급은 하층계급으로 전락해버리고 실업자 양극화 등등 사회적 갈등의 뿌리는 점점 깊어져 지금까지 이어지는바, 이 작품은 바로 이 시절에 가장 아프게 스러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작품은 파업의 시작을 선언하는 희망으로 시작하고 파업의 실패를 마주한 절망으로 끝난다. 이기는 싸움이 아닌 지는 싸움의 이야기인바. 그 패배의 기억을 되살리는 이 작품의 결은 때로 신랄하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마을잔치에서 매기 대처를 조롱하고 저주하는 노래를 들어보시라. 마귀할멈 같은 대처의 인형을 저마다 손에 끼고 흔들며 사람들은 흥겹게 외친다. 대처, 네가 죽을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네! 어둡고 어려운 시절을 대하는 이 작품의 입장은 분명하다. ‘이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고발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 작품은 오히려 평범해졌을 것이다. 이 작품의 관심은 고발이 아니라 질문에 있다. 인간의 조건을 먹고 사는 것에 묶어버린 채 그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잉여로 취급하는 이 무례한 시대를 향해 이 작품은 진지하게 묻는다. 정말 먹고 사는 것만이 전부인가? 우리의 고발이 단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보이는가? 우리가 결코 잃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는가?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 이 작품은 두 가지의 방식으로 싸움을 건다. 첫 번째의 싸움은 실용의 명목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한 생존의 싸움, 광부들의 투쟁이다. 이 싸움의 승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실직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패배를 선언하기는 이르다. 진짜 싸움은 그다음부터니까. 이 작품은 쓸모 있음을 내세우는 세상에 대항하기 위해 가장 연약하고 쓸모없는 것을 붙잡는다. 이 싸움이 무엇을 지키기 위한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이 작품은 한없이 깊어진다.

 

아이가 춤춘다!

이 작품은 광부들과 아이들을 자주 교차시킨다. 비장하게 투쟁을 다짐하는 광부들의 다리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놀고, 경찰과 노동자가 대치하는 긴장 가운데로 발레를 배우는 아이들의 경쾌함이 끼어든다. 극의 시작에는 사탕을 입에 문 채 파업의 기록영화를 보는 작은 꼬마가 있고, 극의 마지막에는 친구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소년이 서 있다. 이 작품이 붙잡은 ‘연약함’, 그것은 바로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원래 약한 존재이지만 여기 이 아이들은 더욱 약해 보인다. 남성적인 탄광촌에서 여자 옷 입기를 좋아하는 소년이나, 재능이나 기회와는 거리가 먼 발레소녀들이 사회가 원하는 실용적인 존재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을까. 그 안에 이 작품의 주인공 빌리 엘리어트가 있다. 빌리의 꿈은 하나다. 춤을 추는 것. 가난한 탄광촌의 소년이 발레를 꿈꾼다. 탄광촌이라는 현실과 발레라는 꿈 사이에 간극은 크다. 단지 계층의 차이와 경제적 곤란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두 세계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시작을 여는 두 개의 넘버는 이 다름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두 발은 무겁고 영혼은 지쳐가며 두려움 속에 홀로 서 있기도 어렵지만, 이 어둠 속에도 별빛은 빛나니 그 빛 아래 우리 함께 서리라!’ 절박한 광부들의 투쟁가(‘The stars look down’)는 세상과의 싸움을 다짐하는 결의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그다음에 이어지는 발레 선생 윌킨슨의 넘버(‘Shine’)는 앞의 노래와는 완전히 다르다. 흥겹고 신난다. ‘키도 머리도 재능도 없으면 뭐 어때, 실직자라고 해도 상관없지, 내 삶을 눈부시게 만드는 건 바로 나 자신이야. 그러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인생을 빛나게 하자!’ 폐쇄 위기에 몰린 가난한 탄광촌에는 어울리지 않는 긍정이요 밝음이다. 빌리는 이 세계에 점점 매료되기 시작한다.

지금껏 빌리는 ‘복싱’의 방식만을 배워왔다. 가진 건 몸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승부의 방식이다. 인생은 맨주먹으로 맞붙어 상대방을 때려눕혀야 이기는 피투성이의 게임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 맞서는 또 다른 몸의 방식이 여기 있다. 한없이 유연하고 부드러워야만 하는 ‘발레’의 방식이다. 내 옆의 사람들은 싸워 이겨야 할 상대가 아니다.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소중한 사람들인 거다. 빌리는 권투글러브를 벗고 신발을 고쳐 신는다. 하지만 그 신발이 빌리로 하여금 곧바로 하늘을 날게 하지는 못한다. ‘발레’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빌리는 많은 장벽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족도 벽이고 세상도 벽이다. 그 벽을 돌파하려는 빌리의 무기는 이제 주먹이 아니다. 끈질기게 들러붙는 현실에 맞서 소년은 크게 발을 구르기 시작한다. 아직 발레는 아니지만, 그의 발은 이미 다른 세계를 향한 첫걸음을 떼고 있다. 춤은 몸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술이요, 남은 게 몸 밖에 없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무기이다. 그래서 이 시기를 배경으로 삼은 이야기에 춤은 빠지지 않는 소재인 거다. 철강노조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풀 몬티’에서도 실직한 노동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춤을 춘다. 한 겹씩 옷을 던지다가 마지막 허물까지 벗어버리는 주인공들에게서 해방감이 느껴진다. 그들의 춤은 사회의 통념과 시선을 깨뜨리며 스스로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유쾌한 자기선언이기 때문이다. 광부노조의 싸움에 동참했던 성소수자들의 실화가 담긴 영화 ‘런던 프라이드’에서도 게이와 광부들은 춤을 춘다.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탄광촌 사람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이 성소수자들이건만, 이들은 춤을 통해 마음을 열고 서로의 손을 맞잡는다. 이들에게 춤은 소통의 통로를 여는 열쇠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쾌한 함성이 터져 나오고, 불가능한 관계에서 따뜻한 마음이 오간다. ‘빌리 엘리어트’의 발레 역시 마찬가지다. 빌리에게 발레는 현실의 바닥을 사뿐히 딛고 날아오르는 놀라운 경험이다. 처음으로 느끼는 짜릿함, 이것은 자유임을 깨닫는 거다. 그 순간 소년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춘다. 분노로 발을 구르고 환희로 도약하는, 어떤 틀에도 매이지 않은 자기만의 춤이다.

 

©신시컴퍼니

 

 

 

 

 

 

 

 

 

 

 

 

서로를 비추는 빛 영화는 빌리가 유명발레단의 주역 무용수로서 성공했음을 짐작하게 하지만 뮤지컬은 발레 공부를 위해 동네를 떠나는 빌리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그는 성공한 발레리노가 됐을까? 아무도 모른다. 뮤지컬은 빌리의 후일담을 다루지 않으니 말이다. 뮤지컬의 관심은 빌리의 미래가 아니라 빌리의 현재에 있다. 지금 이곳에서 빌리가 무엇을 꿈꾸는지에 주목하는 것이다. 명장면이 여기서 탄생했다. 홀로 마을회관의 연습실에 남은 빌리가 미래의 자기 자신과 듀엣을 이루는 ‘백조의 호수’가 바로 그 장면이다. 이 작품에서뿐 아니라 뮤지컬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만한 명장면이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 터, 빌리의 발레는 판타지처럼 펼쳐진다. 부드러운 도약으로 하늘로 날아오른 소년은 마음껏 아름다워진다. 이 아름다움이야말로 모든 성공을 압도하는 성취가 아닐까. 그렇기에 빌리를 아름답게 비추는 빛은 극장의 조명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멋진 무대에 선 빌리가 화려한 조명을 받지만, 뮤지컬에서 빌리를 비추는 빛은, 어두운 땅 밑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광부들의 불빛이다. 아이와 광부들은 서로를 향해 마주 선다. 누군가는 자기의 길을 떠나야 하고 누군가는 자기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하지만 그들의 세계는 어느새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설 자리는 없어지겠고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어둡겠지만, 나 자신으로 우뚝 서는 자유를 얻기 위한 싸움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광부들은 싸움에서 패배했다. 이제 그들은 갈 곳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패배라는 결과에 투쟁의 의미가 희석될 수는 없다. 그들은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광부들이 그랬듯이 소년도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을 거다. 마을을 떠나는 소년의 여정이 같은 목표를 위한 같은 싸움이라는 사실을 광부들은 안다. 그 싸움을 먼저 싸웠기에 이제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건 불빛으로 아이를 비춘다. 이 아이야말로 ‘우리가 본 새 땅’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파업으로 싸웠지만 아이는 아름다움으로 세상에 맞설 것이다. 빵이 전부라고 말하는 세상을 향해 우리에겐 장미도 필요하다 말할 것이다. ‘빌리 엘리어트’라는 평범한 제목은 이래서 특별해진다. 작품의 제목이 되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마틸다도 애니도 올리버도, 누구 하나 평탄치가 않다. 그런데 세상에 필요한 쓸모를 하나도 갖추지 못한, 고아와 다름없는 이 어린 것들이 세상을 돌파해나간다. 솔직함과 선량함과 순수함에 놀라운 힘이 있음을 이 아이들이 보여주는 거다. 빌리의 이름에는 아름다움이 실려 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아름다움은 약하고 쓸모없어 보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무용(無用)함만이 세상에 매이지 않을지니, 예술과 사랑과 아름다움은 여기서 한자리에 모인다. 삶을 귀하게 가꿔줄 모든 것들은 약한 존재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은 바로 그곳에 있음을 빌리의 이름은 말해주고 있다. 돈키호테의 이름으로 시작한 1년 동안의 여정이 빌리의 이름으로 끝을 맺는다. 뮤지컬 안의 많은 이름들을 부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 이름들을 만날 때마다 여러분들도 부디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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