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추천하는 무용 영상
공연장을 잃은 당신에게 추천하는 명음반·영상·희곡 36선
무용평론가 문애령
Road to the Stamping Ground(1983)
이르지 킬리안(1947~)이 오스트리아 원주민들의 움직임을 보고 현대무용 ‘스탬핑 그라운드’로 만드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발로 땅을 구르거나 나무로 내리치는 등 원주민들의 움직임 속에는 모두 그들의 삶이 묻어나는 다른 의미가 담겨있다. 그들을 직접 찾아가 관찰한 킬리안은 그 몸짓에 담긴 의미는 제외하고 외형만을 가져와 현대무용에 접목했다. 이를 통해 원시무용이 현대무용에 주는 자극은 물론, ‘전통의 현대화’가 지니는 진정한 의미와 방향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가장 인간답고 순수한 몸짓이 주는 힐링 또한 느낄 수 있다.
무용평론가 심정민
① 빌리 엘리어트(2000)
어린 소년이 남성성을 강조하는 취미를 강요받는 가운데서도 예술성을 따라 발레를 선택하고, 가부장적이던 아버지가 아이의 꿈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꺾는 등 감동적인 장면이 눈물짓게 한다. 마지막 장면, 매력적인 남자 백조로 등장하는 애덤 쿠퍼(1971~)는 매슈 본 ‘백조의 호수’(1995)의 실제 주인공이자 당시 남자 무용수로서는 드물게 대중적인 팬덤을 일으켰다. 삶이 꼭 나의 의지대로 흘러가진 않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며 우리 인생과 오버랩 되는 영화로 뮤지컬 등 다른 장르로도 확대되었다.
② 태양의 서커스 ‘바레카이’
1984년 캐나다에서 설립된 태양의 서커스는 기존의 서커스에 예술적인 면을 강화해 현대에 서커스의 예술화를 가져왔다. 그들이 선보인 여러 공연 중에서도 ‘바레카이’(2002년 4월, 몬트리올 초연)는 한계를 벗어나는 장면과 시각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특히 주인공 소년, 소녀의 아름다움에는 넋을 놓게 된다. 그리스 신화 속 이카로스의 이야기에 근간을 두고 있으나, 여기에 연출가 샹파뉴의 새로운 상상력이 더해졌다. 꿈과 현실의 경계선을 넘는 낭만적 모험이 화려한 무대와 의상, 그리고 환상적인 움직임과 함께 전개된다.
③ 백야(1985)
발레리노와 탭 댄서의 만남과 우정, 그리고 그들이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이야기다. 소련에서 예술적 자유를 찾아 서방세계로 망명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1948~)의 삶과 그가 연기한 주인공 발레리노 니콜라이의 이야기가 오버랩 되며 몰입감을 준다. 또 다른 주인공인 흑인 탭 댄서 레이먼드를 연기한 그레고리 하인즈 또한 실제 탭 댄서로 영화 속 캐릭터와 닮았다. 영화 속 그의 부인으로는 유명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1915~1982)의 딸인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등장한다. 50~60대에게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무용평론가 장인주
① 내 인생의 발레 (My favourite things)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세 무용수가 각각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선정했다. 작품 감상 전 이들이 직접 들려주는 코멘트가 흥미롭다. 말라코프(1968~)의 ‘여행(Voyage)’에는 자유롭고 현대적인 감성이, ‘마농’에서는 강렬한 열정이, ‘장미의 정령’에서는 요정의 신비로움이 배어난다. 라카라(1975~)와 그의 남편 시릴 피에르가 함께 추는 백조 파드되는 환상적 호흡을 자랑하고, 드라마가 강조된 ‘카멜리아 여인’에서는 섬세한 발동작을 눈길을 끈다. 기요코 기무라(1982~)는 바흐·모차르트·브루크너의 음악에 맞춘 세 편의 모던발레를 춘다.
② 파리 오페라 발레 ‘아파트’
마츠 에크(1945~)는 스웨덴을 대표하는 모던 발레계의 거장으로 고전 발레의 재해석을 통해 현대적 시각에서 고전을 풍자하고, 발레 동작의 동시대적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데 천재적 자질을 보였다. 파리 오페라 발레를 위해 안무한 ‘아파트’(2000)는 전자악기로 연주하는 플래쉬 콰르텟의 서정적이면서 빠른 템포의 라이브 음악과 인간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춤 동작이 하나가 된다. 파리 오페라 발레 무용수들 또한 고전 발레에서는 표현하지 못했던 연극적 감정 표현을 발산한다. 일상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한 편의 재미난 드라마를 보듯 깊숙이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압도적이다.
무용 칼럼니스트 정옥희
① 댄스메이커(1999)
댄스메이커(Dancemaker)는 미국 출신의 댄서 겸 안무가인 폴 테일러(1930~2018)와 그의 무용단의 일상을 담담하게 담아낸 다큐멘터리다.?신작을 안무하고, 레퍼토리를 점검하고, 해외 공연을 타진하고, 연간 계획을 집행하는 과정 등 하나의 무용단이 존속하기 위한 노력을 다각도로 조망하고 있다. 출근길에 상념에 잠기는 테일러의 모습이나 연습실에서 그와 무용수들이 어렵사리 동작 하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다. 테일러를 ‘미국의 위대한 안무가’가 아닌 ‘매일같이 춤 만드는 사람’으로 바라보며 더욱 큰 공감을 자아낸다.
② 터닝 포인트(1977)
발레리나를 통해 여성의 커리어 문제를 보여주는 헐리우드 영화다. ‘발레리나’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대상화하지 않는 데다 ‘워킹맘’과 ‘전업맘’의 이분법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결혼과 육아를 선택한 여성은 발레단 단장이 된 친구에 비해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고, 커리어를 선택한 여성은 직업적 위기감과 외로움에 고통받는다. 소련에서 망명 후 처음 영화에 데뷔한 바리시니코프(1948~)의 파릇파릇한 모습을 볼 수 있고, 전설적인 발레리나 앙투아네트 시블리(1939~)와 알렉산드라 다닐로바(1903~1997)도 볼 수 있다.
연극평론가 배선애
①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소설 ‘광장’의 작가 최인훈(1936~2018)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이력을 보면 1970년대는 소설이 아닌 희곡으로 채워져 있다. 작가의 예민한 감각으로는 그 시대를 직접적으로 담아낼 수 없어서 작가 대신 희곡의 등장인물을 내세워 그들의 입을 통해 시대에 대한 발언을 한 것이다. 그의 전집 중 열 번째는 최인훈의 희곡만을 모아놓았다. 1970년 창작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부터 마지막 희곡인 ‘한스와 그레텔’까지 총 7편의 희곡이 실려 있는 희곡집은 우리에게 계승되어 온 이야기의 풍성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작가의 상상력과 희곡의 문학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최인훈은 우리 전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끌어왔다. 바보온달설화(‘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아기장수설화(‘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호동왕자설화(‘둥둥 낙랑둥’), 심청가(‘달아 달아 밝은 달아’) 등 다양한 이야기를 가져왔지만 그것을 본모습대로 희곡화하지 않았다. 바보온달이 평강공주와 결혼해 장군이 되는 성공신화는, 그렇게 장군이 된 후 전쟁에 나간 온달의 죽음 소식부터 다룬다. 심청이는 인당수에 빠진 것이 아니라 중국으로 팔려간 것으로 변형되었고,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의 도움으로 자명고를 찢고 승리했다는 자책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렇게 설화를 가져오되 다양한 방식으로 비틀면서 시대에 공명하는 작가의 감각을 여실히 드러낸다. 거기에 마치 시 같은 지시문과 대사는 희곡이 문학의 한 장르임을 증명하면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다양한 이야기의 풍성함, 거기에 활자로 느껴지는 매혹을 겸비한 최인훈 희곡집은 어떤 작품을 선택해서 읽어도 내용과 형식 어느 면에서든 든든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② 그리스 비극 걸작선
하루하루가 참 고되고 버겁다고 느낄 때, 보통의 경우 지금의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보면서 위로를 얻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반면교사(反面敎師),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최첨단 과학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모든 일상이 피폐해지고 있는 요즘, 과학이 아닌 신의 세계 속에 살던 인간들의 이야기가 반면교사로 역할하며 여러 의미의 위로를 준다.
그리스문학의 원전 번역가인 천병희가 번역하고 엮은 희곡집에는 총 6편의 그리스 비극이 실려 있다. 신의 섭리가 지배하는 세계, 인간의 모든 영역에 신이 관여하던 시대에 살아가던 인간의 비극은 그들이 지녔던 욕망만큼이나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인간을 위해 불을 가져다주었으나 결국은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의 절망, 신이 내린 신탁을 피하려고 평생을 노력했으나 결국 신탁대로 살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의 각성, 사랑하는 이의 배신으로 자신의 손으로 자식들을 죽인 메데이아의 슬픔 등은 그리스 시대는 물론 지금도 커다란 충격이고 고통이다.
동정과 연민, 그리고 카타르시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비극에 대한 감정의 변화는 현재도 여전히 유효하며, 그들의 불행을 보며 내가 그 상황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안도감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위로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으로 그리스비극을 공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치유와 위로의 이유 때문이 아닐까.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요즘, 한 번쯤은 오래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보자.
연극평론가 김옥란
① 3월의 눈 (배삼식 희곡집)
해마다 3월이면 올라가던 공연이 있었다. 극작가 배삼식이 국립극단 원로배우 백성희(1925~2016)과 장민호(1924~2012)를 위해 쓴 ‘3월의 눈’이 그것이다. 2011년 초연 이후 매년 봄 공연되었지만, 두 배우 모두 세상을 떠나고 이제는 기억 속에 남은 공연이 되었다. ‘코로나 정국’이라는 전례 없는 이상한 봄을 지나면서 ‘3월의 눈’을 다시 떠올려 본다. 오래된 한옥 툇마루에 머물던 햇빛과 구름의 흔적처럼 사라진 두 원로배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젠트리피케이션 개발에 밀려 이리저리 팔리고 헐리고 있는 북촌 한옥마을. 장오의 집 또한 팔렸다. 아비 없이 혼자 자란 손주 내외 빚잔치를 위해서다. 팔순 노부부 장오와 이순은 곧 헐릴 집이지만 문틀에 입으로 물을 뿜으며 창호지를 바른다. 작품은 별다른 사건 없이 장오가 이 집에 머무는 마지막 하룻밤을 담담하게 그린다. 시간이 흐르면서 함께 창호지를 바르던 이순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장오가 불러낸 기억 속에서 이순은 ‘3월의 눈’처럼 사라져버린 아들 영돈을 부른다. 3월 어느 날 눈 녹듯이 사라진 아들은 30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 “나한테는 그런 자식 없어! 그런 빨갱이 자식 둔 적 없어!” 호통을 치는 장오의 목소리는 아직도 서릿발 같다. 장오는 젊었을 적에, 그 무섭다는 서북청년단이었다. 이순은 월드컵 때 구제역으로 ‘살처분’했던 돼지들을 묻으며 정신을 놓아버린 노숙자 황씨가 찾아올 때마다 아들을 떠올린다. 다시 눈이 내리고, 장오 또한 이 집을 떠난다. 아무 위안도 없는 쓸쓸한 결말이다. 장오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는 것은 말을 잃어버린 황씨다. 마지막까지 절제된 결말은 서슬 퍼랬던 시간들을 조용하게 응시하게 한다. 역사의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도, 개인의 시간은 깊게 패인 구멍 속에 그대로 멈춰있다.
② 화염
‘화염’은 1970~80년대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레바논 극작가 와즈디 무아와드(1968~)의 2003년 작품으로, 원제 ‘Incendies’는 모든 것이 불타버린 잿더미, 전란과 재난을 뜻한다. 이 작품은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전쟁터 한복판으로 들어간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다. 그녀의 이름은 나왈이다. 작품은 나왈의 죽음 이후 시작한다. 나왈의 유언을 집행하는 공증인 르벨은 나왈의 쌍둥이 아이들에게 3통의 편지를 전달한다. 쌍둥이 딸 잔느에게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아들 시몽에게는 형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쌍둥이에게 편지를 남겼다. 그러나 잔느와 시몽은 혼란스럽다. 그들에게는 아버지도, 형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왈은 지난 5년 동안 죽음과도 같은 깊은 침묵을 지켜왔다. 이곳은 캐나다다. 나왈이 마지막으로 입을 닫은 곳은 레바논 내전 당시 일을 다루던 전범 재판소에서였다.
잔느와 시몽이 레바논에서 알게 된 사실은, 아버지와 형제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일종의 ‘오이디푸스’ 모티프인 셈. 나왈은 이교도 난민촌 남자와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나 빼앗겼다. 나왈은 아들을 찾아 전쟁터로 걸어 들어갔고, 레지스탕스가 되었고, 감옥에서 만난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잔느와 시몽은, 크파르 라야트의 72번 수감자 나왈을 성폭행한 고문기술자 아부 타렉의 아이들이었다. 아부 타렉은 나왈이 잃어버린 아들 니하드였다. 나왈은 ‘목 속에 박힌 칼’과 같은 침묵을 깨뜨리고, 세 아이들에게 편지를 썼다. 나왈의 편지는 남겨진 아이들이 각자 증오와 수치심 속에서가 아니라 오랜 사랑의 약속에서 태어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홀로 수치심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이디푸스’에서 지워진 이오카스테의 목소리가 복원되고, 남겨진 자들을 껴안고 그들을 회복시킨다.
소리꾼 김보라
① 창작가곡집 ‘첫마음’
지금의 스승인 강권순(정가) 선생님을 만나게 해준 음반이다. 20대 시절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이 음반을 듣고 큰 위로를 받았다. 한국 시에 창작곡을 붙인, 정가 특유의 여백의 미가 돋보인다. 음악적으로 화려하거나 풍성하진 않으나 여성 보컬·피아노·거문고의 구성이 조화롭다. 특히 깊이 있는 가사를 강권순 선생님이 담담한 목소리로 녹여냈다. ‘첫마음을 잃지 말자. 한결같은 마음으로’라는 가사의 울림이 컸다. 마음의 정리가 됐고, 행복하게 노래하고 싶었다. 노래를 부른 분을 만나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전공했던 경기민요에서 정가로 전향하는 계기가 됐다.
② 더 뉴 패스
창작국악을 하면서 전통음악의 의미를 녹여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원술(베이스)·하임(사운드 디자인)과 함께 신노이로 활동하면서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은 음악을 경험하고 있다. 전통음악의 원형을 가지고 자기만의 해석으로 변주가 가능한 팀이다. 어떤 주제에 맞는 선율을 부르면, 전자 사운드와 더블 베이스를 덧입히는 식으로 곡을 만든다. 다섯 번째 트랙 ‘bird’ 역시 자연스럽게 작업했다. 구음 형식의 단어와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의 가사 일부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편안한 숲이 떠오르는 서정적인 곡이다. 무엇보다 부를 때 즐겁다.
아쟁연주자 김용성
① 엥글라뵈른 & 변주곡
유튜브에서 우연히 작곡가 요한 요한손(1969~2018)의 ‘Flight From The City’라는 곡을 알게 됐다. 이 작곡가에 흥미가 생겨 다른 곡을 찾아보다가 이 음반을 접했다. 일상 속 치유를 원할 때 우리는 가끔씩 마음속 한구석 조용한 방에 들어가 안정을 취한다. 그런데 살다 보면 가끔 그 방이 어디였는지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음반에 담긴 울림을 따라가다 보면 굳게 닫혀있던 마음속 방에 도착하게 된다. 특히 ‘엥글라뵈른’의 피아노 여음을 쫓다 보면 안정을 찾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 음반은 표지와 음악의 분위기가 정말 잘 어울린다.
② 메이플스토리 심포니 인 부다페스트
긍정은 치유에 있어서 중요한 마음인데 그게 참 어렵다. 항상 널찍한 부정 위에 힘겹게 작은 긍정을 올려놓는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어려움 속에 긍정을 떠오르게 하는 음반이다. ‘메이플스토리’라는 게임의 배경음악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했다. 이 게임에는 아기자기한 캐릭터와 귀여운 몬스터가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음악에 순수함이 가득 담겨있다. 그 순수함은 특별한 논리적 설명 없이 곧바로 마음의 긍정을 준다. 특히 ‘The Raindrop Flower’라는 곡을 들을 때 제일 그러하다. 마림바가 이끌어가는 물방울 같은 선율에 귀 기울여보자.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예술감독 원일
① 카르마 – DMZ 사운드스케이프
국악방송에서 진행하는 ‘여시아문’에 사운드스케이프(소리 풍경) 아티스트를 초대하고 싶어 조사하던 중 김창훈 씨를 알게 되었다. 작업실에서 그가 녹음한 소리를 듣다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상처와 자연이 뒤섞인 한국 근현대사를 환기시키고 감싸면서 소리를 초월한 울림을 전해준다. 소리의 파장은 귀와 마음을 관통하여 시간과 존재의 엄숙함에까지 닿게 한다. 김창훈이라는 사운드 아티스트의 존재를, 그리고 소리녹음이라는 숭고한 일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의 역할로만 각인된 이미지에서 예술적 단계로 사운드 아티스트의 세계를 격상시킨 멋진 앨범이다.
② 토루 타케미츠 플루트 작품집
시게노리 쿠도(1954~)의 연주는 침묵의 언어이기라도 한듯하다. 곡이 끝난 후 찾아드는 깊은 침묵의 황홀함은 침묵은 소리 없음이 아닌 고요한 깨어있음의 상태임을 알게 한다. 특히 마지막 트랙 ‘Air’가 그렇다. 현대작곡가 토루 타케미츠(1930~1996)의 탐미적이고 날카로운 아름다움은 같은 동양인 아니, 같은 일본 사람만이 이해하며 연주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 있다. 최악의 한일 관계에서 내가 도달하고픈 예술의 광맥을 캐고 넘어선 위대한 예술가의 음악을 통해 깨닫는다. 예술가에게 중요한 것은 국적이 아니라 자신을 더 극한까지 밀어붙여 스타일을 남기는 일임을.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 이영
① 예악연구회 창단기념음반
정악은 궁중의례에 사용된 음악과 선비들이 향유한 음악을 말한다.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중용의 미를 중시한다. 좌로 치우치면 경망스럽고, 우로 치우치면 경직되니, 좌우를 오가며 중앙을 지향하는 음악이 정악이다. 자극적이지 않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중 하나가 ‘수제천’이다. 고려 시대 ‘정읍’에서 유래되어 지금은 가사 없이 관악 합주곡으로 연주된다. ‘목숨이 하늘처럼 영원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선율을 연주하는 피리와 다른 악기의 합, 독특한 연음(連音) 형식, 일필휘지로 뻗어 나가는 구성이 정악곡의 백미로, 그 아름다움은 천상의 음악이라 할 만하다.
② 국립국악원이 추천하는 한국의 전통음악
종묘제례악은 조상의 문덕을 칭송하는 ‘보태평’과 무공을 찬양하는 ‘정대업’ 각 15곡씩으로 구성된다. ‘희문’은 보태평 중 첫 곡인데, 이를 변주해 하나의 독립된 악곡으로 만들어진 음악이 ‘전폐희문’이다. 가사가 있어 악기간은 물론 노래와 악기 사이의 호흡을 요하는 곡이다. 특히 악기군과 노래가 4도 화음으로 진행되다가 한 호흡 안에서 같은 음으로 만날 때 연주자 입장에서 느끼는 희열이 굉장하다. 과거 종묘제례는 왕실에서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안위를 위하며 행해졌다. 지금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불안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곡이 조금이나마 평안을 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