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LOGUE
한국의 창작 오페라,
드디어 성장기일까?
코로나19로 연기된 창작 오페라 ‘빨간 바지’ ‘춘향 2020’ ‘레드 슈즈’가 연이어 무대에 오르게 됐다. 오페라를 둘러싼 음악적 미학을, 보다 젊어진 창작·연주진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기획·글 장혜선 기자
참석 김성혜(소프라노), 김승직(테너), 나실인(작곡가),
윤미현(극작가), 전예은(작곡가), 지중배(지휘자),
표현진(연출가)
사진 황필주(studio79)
국내 첫 창작 오페라는 언제 처음 발표됐을까요? 1950년 국립극장에 올린 현제명(1902~1960) 작곡의 ‘춘향전’이 그 시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70년간 한국 창작 오페라의 역사가 지속되었습니다. 그동안 음악계는 창작 오페라에 관한 뜨거운 비평을 지속적으로 이어왔습니다. 특히 ‘한국 오페라’이기에 발생하는 음악 양식에 대한 문제 제기는 지난하게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많은 창작 오페라가 배출됐지만 긴 생명력을 가진 작품이 없다는 사실은 조금 허탈합니다.
한국 창작 오페라의 성장기를 언제로 잡아야 될까요? 성장기가 있기는 했을까요? 그동안의 움직임은 태동기였고, 2020년 여름이 본격 성장기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코로나19 여파로 공연 일자가 조정된 면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국립 단체 주도’로 창작 오페라가 연이어 공연됩니다. 그동안 창작 오페라에 대한 관심은 사실 국립 기관보다는 민간 오페라단이 더 뜨거웠습니다. 그래서인지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연이어 공연되는 국립오페라단의 ‘빨간 바지’ ‘레드 슈즈’, 예술의전당의 ‘춘향 2020’이 참 반갑습니다. 장마가 지속되고 있는 여름, 공연 제작에 힘을 쏟고 있는 일곱 명의 예술가를 만났습니다.
좌담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문득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동시대 작곡가들이 쓴 오페라에 참여할 때는 마음가짐이 좀 다른가요?
지중배 작곡가가 살아있는 초연 작품을 할 때는 지휘자로서 하나의 역할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작곡가와 성악가, 작곡가와 연출가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한국 작곡가 작품을 할 때는 재연에 대한 사명감도 들고요.
김성혜 성악가에게 한국의 현대 오페라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벨칸토 창법으로 끊임없이 공부해온 기존 오페라들에 비해 전달력에 있어서 늘 어려움을 느낍니다.
오페라는 클래식 음악 중에도 대중에게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대에는 오페라, 특히 창작 오페라를 찾는 관객층이 그리 많지 않죠. 동시대 대중이 오페라를 찾지 않게 되는 장애요소는 무엇일까요?
김성혜 오페라가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야는 아닌 것 같아요. 요즘 대세인 트로트처럼 쉽게 즐기기엔 어렵죠. 대중이 창작 오페라에 관심을 갖도록 하려면 음악적인 부분에서는 보다 가볍게, 내용적인 면에서는 동시대 이슈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을 담아야 해요. 그리고 기억에 남는 선율과 노래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전예은 비단 창작 오페라뿐만 아니라, 현대음악계가 겪고 있는 문제죠. 창작 오페라를 포함해 대중은 현대음악이 ‘어렵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난해한 음악도 있겠지만, 익숙하지 않기에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도 큽니다. 작곡가는 작품에 자신의 철학을 담되, 청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항상 고민해야 돼요. 창작 작품들은 아직 시대의 검증을 거치진 않았지만, 이중 여러 곡은 다음 시대의 ‘클래식’으로 분류될 것입니다. 대중 역시 이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후대에게 좋은 작품을 전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합니다.
윤미현 대중은 무엇이든지 재미가 있다면 그것을 즐길 준비가 되어있다고 봅니다. 한 끼의 맛있는 식사를 위해 맛집 앞에서 몇 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하잖아요. 작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만큼 재미있는 작품을 대중에게 주지 못 했던 것 같네요.
나실인 맞습니다. 아직까지 정말 재미있는 작품이 등장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겠죠. 그동안 창작 오페라에 좋은 작품이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국의 오페라는 꾸준히 발전을 거듭했어요. 이영조(1943~)·이건용(1947~)·임준희(1961~)·최우정(1968~) 등 훌륭한 작곡가들에 의해 우수한 작품이 지속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축적된 결실을 바탕으로 더욱 재미있는 작품이 나오기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지중배 저는 ‘창작 오페라’라는 단어 사용을 피하고 싶어요. 우리는 흔히 베르디·푸치니의 창작 작품을 ‘이탈리아 오페라’, 베버·바그너 작품을 ‘독일 오페라’라고 부르죠. 혹은 시대에 따라 ‘바로크 오페라’ ‘고전시대 오페라’ 등으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왜 유독 한국에서는 ‘창작 오페라’라는 구분을 둘까요? 그냥 ‘한국 오페라’라고 부르면 안 될까요? 근본 없는 장르 구분으로 만들어진 단어가 대중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오페라의 ‘소재’
오늘날의 오페라는
무엇을 담아야 할까?
앞서 지중배 지휘자가 지적한 것처럼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는 ‘창작 오페라’라는, 쉽게 말하자면 ‘한국의 현대 오페라’입니다. 오페라가 서양의 음악 양식이라고 할지라도, 한국 오페라는 ‘한국적 음악 언어’를 통해 자국의 문화를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선 각자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들이 궁금한데요.
지중배 지난해 ‘빨간 바지’ 섭외가 들어왔을 때, 때마침 네덜란드에서 마스카니의 오페라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함께한 독일 연출가에게 한국 작곡가들의 새로운 작품이 연이어 공연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며 기뻐하더군요. 그리고 한국도 이제 ‘오페라 본연의 길’로 나아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오페라 본연의 길’이 뭘까 고민해보니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말하는 듯합니다. 한국에서 이전에 발표된 여러 오페라 중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지역의 위인들에 관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삶과 내용을 잘 모르는 대중과 창작 오페라의 간극이 멀어진 경우가 있어요. 또한 제작 기간이 충분치 않으니 작품의 질이 기대에 못 미쳐 외면당하게 됐죠.
김승직 저 역시 한국을 배경으로 하되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활용하거나,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을 소재로 하거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한국의 문화를 넣은 작품이 많이 나온다면 좀 더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실인 지금 우리의 사회문화적인 특징이 작품에 드러나야겠죠. 이는 무대 위에서 언어를 통해 나타나기도 하고, 의상이나 소품을 통해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음악에서 국악적인 요소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작곡가 고유의 음악언어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어야 하겠죠.
표현진 나의 경험과 감정이 결국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고, 이게 곧 ‘세계적인 것’ 같습니다. 언어는 다르지만 느끼는 감정들이 크게 다르진 않을 거예요. 언어로 모든 걸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성악가들의 감정 표현만으로 모든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거든요. 한국적인 것에 얽매여 고민하기보다는 나에 대한 고민이 잘 표현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한국적인 것이 될 겁니다.
전예은 한국적인 것을 강요하다 보면 항상 비슷한 소재·연출·음악 스타일이 나와요. 이로 인해 한국 오페라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질 수도 있고요.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또한 한국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자연스럽게 오페라 소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네요. 특히 대중은 한국의 오페라 소재가 유독 고루하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오르는 세 작품은 한국 오페라의 소재적 방향성을 잘 보여주고 있고요. 첫째, ‘춘향 2020’(나실인·윤미현)과 같이 한국 고전문학에서 착안하는 경우가 있죠. 둘째, ‘레드 슈즈’(전예은)처럼 해외 원작을 변용하는 경우도 있고요. 셋째, ‘빨간 바지’(나실인·윤미현) 같은 경우는 한국 시대상을 담았습니다.
전예은 실제로 창작 오페라 작업을 시작할 때 처음 직면했던 과제는 좋은 스토리를 찾는 것이었어요. 창작 오페라는 대중에게 다소 생소할 수밖에 없기에, 익숙한 소재로부터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원작을 그대로 오페라로 만들어보려는 의도로 시작했지만, 직접 대본을 쓰면서 이 이야기를 통해 현대 사회를 연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을 느꼈습니다. 동화 속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자 노력한 거죠.
윤미현 ‘춘향 2020’은 원전의 주인공을 그대로 차용했지만, 그밖의 인물은 지금 우리가 호흡할 수 있는 인물로 바꿨습니다. 몇 백 년 전의 인물이 지닌 성격은 지금 우리와 맞지 않아요. 이번 작품 속 춘향은 배포가 크면서 주체적인 인간입니다. 그 성격 때문에 탈옥을 감행하고 한양으로 직접 몽룡을 찾으러 가죠. 원전에 나오는 인물들이 사실 매우 친숙하지만, 그 인물들이 다른 사건을 일으키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반면 ‘빨간 바지’는 한국의 시대상을 담았지만, 어떻게 하면 좀 더 독창적으로 이야기를 꾸릴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자칫 진부함으로 빠져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대사를 쓸 때 흥미진진하면서도 함축적으로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나실인 공연예술의 중요한 역할은 관객에게 화두를 던지는 거예요. 작품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든, 새로운 이야기이든 작품을 통해 다양한 환상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탄탄한 대본과 좋은 음악은 관객이 극에 계속 몰입하도록 하는데 최선의 역할을 하죠.
‘한국어 가사’와 ‘자막’
언어 사용에 관한
지속적인 고민
한국어가 주는 특유의 언어 미학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은 한국어로 된 오페라를 보고난 뒤에 “어색하다”는 평부터 시쳇말로 “오글거린다”고 하기도 합니다. 오페라에서의 한국어 사용 문제, 현재 어디까지 논의된 상태일까요?
지중배 한국 오페라는 한국어로 쓰여야 합니다. 가사가 붙은 음악의 색깔은 곧 언어에서 오게 됩니다. 언어가 달라지면 작곡 과정에서 색깔이 달라지죠.
나실인 한국어가 잘 표현되는 오페라를 만들기 위해 많은 작곡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우정 작곡가의 경우 작품을 쓸 때 ‘한국어 발음 사전’을 참고해 우리가 평소에 잘 느끼지 못하는 한국어의 장음과 단음을 올바르게 음악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 역시 최우정 작곡가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장르에 따라 판소리나 창극에서의 한국어 활용법을 적용하기도 하고, 한국어 표현에 맞는 강세와 리듬을 활용해 레치타티보를 구성합니다. ‘빨간 바지’는 연극과 같은 대화체의 대사 없이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만으로 오페라를 만들었습니다. 반면 ‘춘향 2020’은 전라도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표현되도록 하기 위해 레치타티보 없이 아리아와 대사로만 작품을 구성했습니다.
전예은 한국어는 어순·강세·고저 등 외국어와 상당히 다른 구조를 지닌 언어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선율을 붙이는 데 있어서 발음이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말에 많이 사용되는 ‘의’와 같은 발음, 그리고 받침이 있는 단어들 중 ‘을·를’ 같은 것입니다. 또한 ‘마음’이라는 단어가 있을 때 긴 음가의 선율에 이 단어를 붙이면 “마으——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까다로운 부분 중 하나입니다. 한국어 대본에 선율을 붙일 때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작곡가인 저 역시 모국어인 한국어보다 영어·불어 등의 외국어를 가사로 하여 성악곡을 만드는 것이 더 수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꼭 서양 오페라의 전통 창법에서만 해결 방안을 찾지 말고, 판소리·뮤지컬·가요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서 한국어가 사용되는 방법을 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김승직 사실 성악가들이 창작 오페라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는 일일 겁니다. 많은 모음과 자음을 가진 한국어는 노래 부르기에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또 오페라에서 한국어로 대사를 하는 것이 아직 어색하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한국어로 된 작품이 더욱 늘어나서 한국 대중은 물론, 서양인에게도 한국어로 된 오페라를 알리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한국어로 된 오페라임에도 불구하고 자막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사의 내용을 보다 뚜렷하게 전하기 위한 방편이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전제한 움직임이기도 합니다.
전예은 작곡가로서 저는 자막 사용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오페라 아리아의 벨칸토 창법은 성악가의 화려한 기교를 보여주는 수단이기도 해요. 한국어를 이에 대입하여 사용했을 때 이질감이 생기는 부분들이 있는데요. 벨칸토 창법에 섞여 대사의 전달력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는 수단으로 자막의 사용은 불가피할 겁니다. 하지만 자막의 도움이 있더라도 근본적으로는 한국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대본과 음악을 만드는 것, 그리고 성악가들의 명확한 발음에 대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진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자막은 활용해야겠지요. 하지만 전적으로 자막에만 의지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가수들의 소리만을 듣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관객은 더 정확한 발음을 원합니다. 더 이상 그들의 감정을 자막을 통해 전달받고 싶지 않고 직접적으로 전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연출적인 입장에서 가수들이 음향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명확한 발음과 가사 전달을 위해 음향 기술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는 시대가 됐어요.
지중배 가사의 내용은 음향적인 면에서도 잘 전달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관객은 자막의 도움으로 극의 흐름을 알게 됩니다. 자막 기술이 없었던 시절의 음향과 연출의 방향이 지금과는 많이 다릅니다. 연출 효과도 더욱 다양해지고 있어서 노래를 들으며 내용을 따라가는 일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기에 자막의 사용은 중요합니다.
나실인 가사를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문제는 비단 한국어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오페라뿐 아니라 대중가요도 가사 전달을 위해 자막을 활용하고요. 공연을 즐기는 관객에게 작품의 전달력을 높이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자막이 극의 흐름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어요. 자막의 타이밍이 너무 빠르거나 느린 경우가 있는데요. 자막 사용에 더욱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히려 작품의 세계화를 위해 영문 자막을 만들어 제공하는 등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연출’도 작품의 하나
동시대 연출의
바람직한 방향성은?
대중은 미디어로 인해 자극적인 시각문화에 익숙해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오페라 연출에 대한 방향성도 고민입니다. 동시대 예술에서는 첨단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공연이 나오고 있는데요.
전예은 작품 본래의 의도를 깨지 않는 선에서, 다양한 기술의 활용은 현대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요.
표현진 세계적인 추세를 무시할 순 없겠죠. 시각 미디어는 우리 삶에 너무 깊숙이 깔려있습니다. 자극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자극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작품을 그리라고 한다면 역시 대중은 창작 오페라는 고루하다고 할 테고요. 결국 중요한 건 작품을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하고 이를 시각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요하다면 작품의 명확한 의미를 위해 뚜렷한 색채로 과감하게 장면을 묘사해야 하고요. 시각성만 강조한 작품은 ‘쇼’일 뿐 작품으로 남진 않습니다. 최근 저에겐 고민이 있습니다. 요즘 오페라 공연은 보통 8세 이상 관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인들의 유흥문화로 즐겼던 고전 오페라는 굉장히 자극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이를 8세가 관람하게끔 만들어야 하니 연출가에겐 어려운 숙제입니다.
유럽에서는 연출가 해석이 가미된 ‘레지테아터 연출’이 주요 오페라 극장과 음악 페스티벌을 통해 확산되고 있습니다.
표현진 레지테아터 연출은 비단 유럽뿐 아니라 이미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연출가가 상당 부분 작품 해석에 개입하고, 대중 역시 새로운 볼거리를 연출가에게 요구하는 분위기로 자리 잡고 있는데요. 현대 오페라에서 연출의 요소는 아마도 작품의 본질을 제대로 해석하고, 제대로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 과감한 상상력 아닐까요?
김승직 사실 대중이 오페라에 흥미를 잃어가는 이유는 현실에 맞지 않는 연출이나 고전적인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레지테아터 연출이 확산되고 있어서 기쁩니다. 관객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연출을 한다면 오페라도 어렵지 않은 장르가 될 것 같습니다.
나실인 그래도 연출은 작품보다 우선시될 순 없습니다. 창작 오페라의 경우 다양한 방식의 연출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가능성 있는 창작 오페라를 지속적으로 재공연하여 여러 연출을 시도해본다면 연출가에게도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봅니다.
지중배 사람들이 계속 보길 원하고, 기억하는 연출은 세월이 지나도 계속되는 재공연으로 남습니다. 작품 속 연출가의 해석은 오페라 발전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하나의 예로 ‘장희빈’을 소재로 한 드라마도 시대와 연출가에 따라 인물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니까요. 모쪼록 작품의 맛을 잘 살리는 연출이 중요합니다.
작곡가, 극작가, 연출가, 지휘자, 성악가가 다 모인 자리입니다. 각각 오늘날 새로 태어나는 오페라에서 가장 결정적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전예은 오페라는 총체적 예술인만큼 어느 한 요소로 작품성이 결정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뼈대가 되는 대본과 음악의 완성도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직 저 역시 대본과 음악의 완성도가 결정적인 것 같아요. 듣는 이들에게 친숙한 이야기나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음악 등이 충족돼야 높은 작품성으로 평가받지 않을까요?
표현진 결국은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이 중요한 거죠. 대중이 찾지 않는 작품은 결국 작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인데요. 대중이 보고 또 보고, 작품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을 때 비로소 작품성이 결정됩니다.
김성혜 성악가로서 전달하는 메시지를 음악적인 요소에 잘 덧입혀 표현하는 것이 가장 가져야 할 역량인 것 같네요. 오페라가 끝나고 기억에 남는 캐릭터가 있다면 성공한 오페라가 될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나실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좋은 대본입니다. 오페라도 이야기가 주는 힘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야기를 음악으로 조화롭게 만들어내는 건 작곡가의 역량이겠고요. 그래서 오페라 작곡가는 대본 제작 과정에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 작곡가가 극작가를 존중하고 그 이야기를 소중히 다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윤미현 극작가 입장에서 보면 결국은 작품성을 결정짓는 요소는 작곡가와 극작가, 연출가, 성악가 모두에게 달린 것 같아요. 그 조화로움이 어그러지면 뭔가 어색한 작품이 탄생하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오페라를 종합예술이라고 하는 거겠죠.
마지막 질문입니다. 동시대 한국 오페라 발전을 위해 앞으로 논의됐으면 하는 부분들을 알려주세요. 창작 오페라에 관한 여러 담론을 지속적으로 끌어내기 위해 ‘객석’도 참고하겠습니다.
전예은 오페라는 재정 지원 없이는 제작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창작 오페라를 위한 어떤 종류의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지 논의됐으면 합니다.
표현진 한국은 오페라 불모지였지만 많은 선배 예술가들이 창작 오페라를 위해 길을 닦아 주셨습니다. 이제는 다음 세대를 이끌 젊은 예술가들이 작품을 많이 올릴 수 있도록 창작 지원에 힘써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후원 방법도 다양한 방향에서 논의해보고, 개인 후원가들의 참여도 모색해보면 좋겠습니다.
지중배 대학에서 오페라 전문 대본가와 연출가를 양성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작곡가와 극작가에게 주어지는 충분한 시간과 제작 지원이 필요하고요. 제작 지원은 예산뿐 아니라 작곡가가 주요 캐릭터에 대한 캐스팅 권한을 갖도록 하고, 역할을 맡은 성악가들과 협업할 수 있는 과정을 주어야 합니다.
이번 좌담은 한국 창작 오페라가 지닌 미학적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눴습니다. 다음에는 오페라 재정 지원에 관한 깊은 토론을 나눠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작품 준비로 바쁜 와중에 오페라 발전을 위해 귀한 시간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국립오페라단 ‘빨간 바지’
8월 28일 19:30 네이버 생중계
(국립오페라단 네이버 TV 채널)
8월 29일 15:00 녹화 방송
(KBS1 TV ‘KBS 중계석’)
나실인(작곡), 윤미현(대본), 최용훈(연출), 지중배(지휘), 김성혜(목수정 역)
1970~80년대 서울 강남을 배경으로 일명 ‘빨간 바지’라 불리는 진화숙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내용이 흘러간다. 당대 강남 일대에 활발했던 부동산 개발을 배경으로 한다. 진화숙은 부동산계의 큰손이다. 빨간 바지처럼 복부인이 되고 싶은 목수정은 진화숙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그렇게 진화숙과 그녀의 고등학교 동창인 유채꽃과 함께 어울리게 된 목수정은 개포동 일대의 부동산이 개발될 것이라는 정보를 얻는다. 그러나 어딘가 수상한 유채꽃은 사실 빨간 바지를 체포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작가 윤미현은 각각의 캐릭터를 생동감 있게 살려 당대의 사회 문제를 그들에게 투영했다.
예술의전당 ‘춘향 2020’
8월 29일~9월 2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나실인(작곡), 윤미현(대본), 김태웅(연출), 공병우(변사또 역), 박하나(춘향 역)
1950년 5월 현제명 작곡으로 초연된 ‘춘향전’은 한국 창작 오페라의 효시이다. 예술의전당은 2020년, 창작 오페라 탄생 70주년을 맞아 젊고 유능한 아티스트와 함께 새로운 오페라 ‘춘향’을 선보인다. 한국 고유의 전통 소재를 재발굴해 오페라 초심자도 즐길 수 있는 레퍼토리를 만들려는 의도다. 이번 신작 오페라에서 춘향은 주체적인 여성이다. 몽룡이 오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지 않고, 직접 몽룡을 찾아 나선다. 몽룡이가 과거급제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날의 춘향은 본인이 선택한 사랑은, 본인이 적극적으로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인다.
국립오페라단 ‘레드 슈즈’
9월 4~5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전예은(작곡), 전예은·김연미(대본), 표현진(연출), 김주현(지휘), 김승직(어린 목사 역)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를 각색한 오페라. 개성 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어느 마을에 화려한 옷차림을 한 마담 슈즈라는 인물이 돌아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린 시절 레드 슈즈를 신고 사람들을 홀리고 다닌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쫓겨났던 마담 슈즈는 중년의 여성으로 성장하여 원한을 품고 마을로 돌아와 순수한 목사의 딸 카렌에게 접근한다. 과거 마담 슈즈를 사랑했지만 그녀를 배신하고 목사가 되어 딸 카렌에게 정숙한 여인으로 자랄 것을 강요하는 목사와 카렌, 그리고 마담 슈즈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고 결국 마담 슈즈는 목사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레드 슈즈를 신은 카렌은 재판에 회부되고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춤을 추는 그녀의 다리를 잘라야 한다며 또다시 한 소녀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
2010~2019 창작 오페라 공연 목록
국립오페라단 · 서울시오페라단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창작산실
국내 첫 창작 오페라에 대한 기록으로는 1950년 국립극장에 올린 현제명 작곡의 ‘춘향전’이 있다. 국내 창작 오페라는 그야말로 ‘한국의 특수성’을 담아내야 하기에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문제점이 제기됐다. 201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기존의 스토리를 오페라로 개작해 올리는 흐름이었다. 새로운 방법론을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은 서울시오페라단 세종카메라타를 통해 이뤄졌다. 2012년 서울시오페라단 전 이건용 단장은 오페라 개발을 위해 국내 극작가·작곡가들과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에 서울시오페라단은 2013년부터 오페라 리딩 공연을 올렸고, 그중 한 작품을 선정해 무대화했다.
이번 좌담을 계기로 근래 2010년부터 10년 동안 진행된 창작 오페라 진영을 살펴 도표화해보았다. 지원의 지속성은 있지만, 재연보다는 초연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도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품은 다종다양하지만 참여한 연출가들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창작 오페라가 나아갈 방향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상황은 이러하지만, 2020년은 창작 오페라사에서 조금 특별한 해로 기억될 듯하다. 지난해 ‘1945’를 올리며 호평을 받은 국립오페라단이 이번 시즌에는 창작 오페라를 두 작품이나 선보인다. 최근 10년간 국립오페라단이 한 해에 두 창작 오페라를 발표한 건 처음이다. 8월에는 ‘빨간 바지’, 9월에는 ‘레드 슈즈’를 초연한다. 국립오페라단의 잔잔한 파동이 더 큰 파장으로 이어지기를. 이 물결이 번지는 무늬를 숨죽여 지켜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