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CLASS
세상에 남을 스승의 뜻
마스터클래스 현장 취재 & 사무엘 윤 인터뷰
당장의 열매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을 통해 누군가는 훗날 열매 맺는 나무가 되는 법을 배운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자신을 글쓰기의 세계로 이끈 스승을 기억한다. 프랑스 태생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그르니에다. 그의 산문 ‘섬’은 창작에 대한 카뮈의 열망에 불을 지폈다. 훗날 세계적 문인이 된 카뮈는 이 책을 위한 추천사를 썼다. 여기서 그는 사제 관계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오랫동안에 걸친 교류는 예속이나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장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모방을 야기시킨다. 이로써 여러 세대에 걸쳐 정신이 정신을 낳는 것이며 인간의 역사는 다행스럽게도 증오 못지않게 찬미의 바탕 위에도 건설된 것이다.”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은 쾰른 오퍼 소속가수로 활동하며 유럽 각지의 러브콜을 받으면서도, 음악 인생의 절반은 학생들과 함께 보낸다. 공연을 위해 간 도시에서 그곳 유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해 이들을 이끌어온 지도 10년이 넘었다. 2015년부터는 일신문화재단의 후원으로 공식적인 마스터클래스를 개최해오고 있다. 이 시간은 젊은 성악도들이 사무엘 윤과 교류하는 자리이자, 쾰른 오퍼 오펀스튜디오에서 한 시즌 동안 활동할 성악가 1인을 선발하는 경연의 장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 지난 7월 말, 서울 한남동 일신홀에서 열린 사무엘 윤의 다섯 번째 마스터클래스를 찾았다. 사무엘 윤과 25명의 참가자는 카뮈가 찬미했던 참된 사제 간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들의 소리를 기억하는 것부터
“소리가 좀 변했는데? 선생님이 바뀌었니?” 준비해온 곡을 막 완창한 젊은 바리톤에게 사무엘 윤은 질문과 피드백을 쏟아냈다. 이는 꽤 많은 것을 드러냈다. 그가 이 참가자를 이미 만나본 적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시의 소리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심지어 그의 화살은 명중했다. 이 바리톤은 학부와 대학원의 울타리를 벗어나 최근 국내 민간 오페라단에서 여러 단역을 맡으며 음악 코치로부터 소리를 배우고 있다고 답했다. 이로써 변화를 포착하는 예민한 청각의 소유자라는 것까지, 그는 증명해 보였다.
사무엘 윤의 날카로우면서도 애정이 깃든 피드백은 스물다섯 참가자에 전해졌다. 그의 조언은 각각의 나이와 경력, 삶의 모습과 개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고난도의 작품들을 준비해왔지만 긴장과 부담을 이겨내지 못한 최연소 참가자 소프라노에게는 레퍼토리 순서를 조절해 먼저 목을 풀 수 있게 했다. 능청스러운 연기로 ‘세비야의 이발사’의 피가로 역을 맛깔나게 소화한 바리톤에게는 “독창회를 본 듯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보이지 않는 알 속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 물었다. 앞으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선 자신을 깨부술 정도의 유연한 사고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참가자별 맞춤 코칭 사이를, 일관된 가르침이 관통했다. “노래가 시작되기 전, 어떤 호흡으로 준비를 하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목이나 입, 코나 미간 등 자신의 소리 포인트에 관심을 갖고 소리 낼 준비를 해야 한다. 그 호흡에 내 소리를 실을 때 라인이 만들어진다. 건강한 라인을 바탕으로 캐릭터마다의 다양한 색깔에 접근해야 한다.” 2015년, 일신홀에서 첫 마스터클래스를 시작하며 ‘객석’에 나눈 이야기가 오늘의 현장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그의 한결같음에 감명한 순간.
가장 ‘사무엘 윤’다운 가르침은 다른 지점에 가닿았다.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음악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 돌아보니 음악을 통해 얻은 것들을 다른 누군가와 나눌 때 비로소 더 값진 의미가 돌아오곤 했단다. 객석의 뒤쪽에는 그와 오래 알고 지낸 홍석원 지휘자가 앉아 있었다. 묵묵히 현장을 지켜본 그는 기자에게 “사무엘 윤은 노래를 하고자 하는 ‘그 어떤 조건의 학생’에게도 한결같은 온도로 조언한다”고 넌지시 증언했다. 사무엘 윤의 이름은 유럽 땅에서 활약한 한국의 성악가로 이미 널리 기억된다. 그보다 오래 세상에 남을 것은, 수많은 후배 음악가에 의해 기억될 그의 정신이 아닐까.
글 박찬미 기자 사진 아트앤아티스트
INTERVIEW
다섯 번째 마스터클래스를 마친 소감은.
코로나 사태로 유학을 가 있던 학생들이 귀국했고, 유학을 앞두고 있던 학생들도 국내에 발이 묶였다. 여기에 국내 재학생까지 지원이 몰려 참가자들의 전반적인 수준이 아주 높았다. 대부분이 이미 국내외 콩쿠르에서 수상경력을 여럿 쌓은 인재들이었다.
참가자들과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인 듯 보였는데.
지난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한 적이 있거나, 유럽에서 개인적으로 마련한 자리를 통해 만난 인연도 있었다. 선화예고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했던 학생도 왔더라. 앳된 모습을 벗은 것을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경북·경남예고, 부산예고 등으로 어린 학생들을 만나러 자주 다닌다. 실력 위주가 아니라 어떤 음악가로 살아가야 하는지 어렸을 때부터 길을 잡아주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쾰른 오퍼 오펀스튜디오로 활동할 최종 선발자가 예정보다 늦게 발표됐다. 무엇이 심사위원들을 가장 고민하게 했는가?
마스터클래스와 오펀스튜디오가 가장 효과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을 선정해야 한다. 또, 선발자는 오펀스튜디오에서 훈련을 받기도 할 테지만, 현지 공연에 참여해야 한다. 당장 쾰른 오퍼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는 성악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뿐 아니라 선한 인성을 갖추었냐는 것이다. 내가 콩쿠르가 아니라 마스터클래스를 여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인성과 음악을 대하는 태도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테너 김승직이 쾰른행 티켓을 따냈다. 선정 이유가 궁금하다.
김승직은 이미 제네바 콩쿠르에서 1위 없는 3위를 수상(2016)했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리스트(2014)에 올랐다. KBS 한전 음악콩쿠르, 제53회 동아 콩쿠르, 세일 한국가곡콩쿠르 등 국내 유수의 콩쿠르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이미 국립오페라단 등과 공연한 경험자이기도 하다. 마스터클래스에서 노래하는 그의 모습에서 확신을 얻었다. 더욱이, 듣는 이의 호불호를 최소화해야 하는데 그는 여러 면에 있어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소리의 색깔을 얼마든지 다채롭게 소화할 수 있는 잠재성도 지녔다.
오펀스튜디오 이후 선발자들은 어떤 행보를 이어가고 있나. 1회 최종선발자였던 바리톤 최인식은 오펀스튜디오 기간이 끝나고도 여전히 쾰른 오퍼에서 활약하고 있는데.
1회 선발자 바리톤 최인식, 2회 선발자 테너 김영우는 쾰른 오퍼 정단원이 돼서 자주 만나고 있다. 최인식은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왕립극장으로도 진출해 주역을 맡고 있다. 내년에는 ‘라 트라비아타’의 제르몽 역을 맡을 예정이다. 김영우와는 쾰른 오퍼 ‘카르멘’ 무대에 함께 올라 노래하기도 했다.
마스터클래스에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 있다면.
이렇게 좋은 성악가가 많은데 단 한 명밖에 선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가장 안타깝다. 그래도 더 많은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최종 선발되지는 않았지만,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던 참가자를 시카고 오페라 하우스의 오디션에 보내기도 했다. 유럽에서 유학 중인 성악도를 대상으로 쾰른 오퍼에서 단기적으로라도 활동할 수 있는 오디션을 개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유럽의 다른 극장들에도 한국의 젊은 성악가를 보내기 위해 알아보고 있다. 곧 마드리드 왕립 극장에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학생들과 지속적으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이 ‘사무엘 윤’에게서 궁극적으로 얻었으면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공식적인 마스터클래스를 연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크고 작게 학생들과 소통하는 자리를 마련해온 것은 10년이 넘었다. 유럽의 도시 곳곳을 방문할 때마다 학생들을 만나 이들이 가진 어려움에 대해 위로와 조언해주곤 했다. 돌아보면 스스로를 위해 투자한 것보다 남을 위했던 일들로부터 얻은 결실이 훨씬 크다. 많은 학생을 만날수록 더 값진 의미가 내게 돌아왔다. 나와의 시간이 ‘선한 영향력’이라는 기본기를 채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오늘도 사무엘 윤은 참가자들의 노래를 넘어 아픔과 꿈을 듣는다. 이에 전략이나 ‘꿀팁’이 아닌, 삶의 지혜와 음악에 깃든 정신을 돌려준다. 그리고 그는 꿈꾼다. 이 세대가 성장하여 그다음 세대에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