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담은 전통예술, 달라진 옛 예술의 미학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6월 14일 9:00 오전

“SPECIAL
‘오늘’을 담은 전통예술,
달라진 옛 예술의 미학”

 

‘오늘’을 담은 전통예술, 달라진 옛 예술의 미학

 

한식을 먹고, 한옥 나들이를 즐기지만, 공연예술의 한 장르를 이루는 전통예술은 한국인에게 멀고 먼 장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알고보면 새 예술이 태어나는 곳에는 우리가 잘 모르던 전통예술의 숨과 피가 흐르고 있다.

코로나로 위축된 공연예술계지만, 봄부터 전통예술의 다양한 무대가 제 자리를 찾고 있다. 변치 않는 가치를 품되 격변하는 시대와 발 맞추려는 호흡은 여전하다.

이번 특집은 이러한 전통예술이 우리 곁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그 거리를 재어보고, 살펴보고자 마련했다.

무엇보다 전통예술은 ‘오늘의 시간’과 함께 변하고 있으며, 다른 장르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변화의 기운이 되고 있다. 그 쓰임새도 미학도 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여전히 전통예술을 과거의 시선으로만 바라본다.

기사마다 적어 넣은 키워드는 오늘날 변화하고 있는 전통예술을 대변하는 단어이자, 이를 이해하기 위한 최적의 키워드이다.

이제 ‘객석’이 새롭게 정의내리는 전통예술의 키워드들인 ‘보고’ ‘반응’ ‘위로’ ‘풍자’ ‘해학’ ‘중도’ ‘공존’ ‘소통’을 지렛대 삼아, 우리가 잘 모르던 전통예술의 지대로 들어가 보자. 이러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전통예술공연을 위한 캘린더도 준비했다.

 

돌아보기

보고(寶庫) | 서울돈화문국악당 ‘산조대전’ _송현민

반응(反應) | 유홍의 전시·공연 ‘REFLECTION’ _송현민

위로(慰勞)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대동춤Ⅱ’ _송현민

해학(諧謔) | 창작오페라 ‘춘향탈옥’ _강지영

소통(疏通) | 국립극단 ‘당클매다’ _장혜선

미리보기

공존(共存) | 국립국악원 정악단 ‘정악, 천년의 결이 숨쉬는 음악’ _박서정

풍자(諷刺) | 국립창극단 ‘ 귀토-토끼의 팔란’ _김옥란

중도(中道) | 국립무용단 ‘산조’ _박찬미

공연 일정

6~7월 전통예술 모음zip _임원빈

 

돌아보기 | 44인이 46곡 산조를 선보인, 30일간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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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귀중한 물건을 간수해 두는 창고

 

서울돈화문국악당 ‘산조대전散調大全’

전통을 먹고 자란 소리생명체

 

이지영제 가야금산조(4.22/가야금 이지영·장구 김웅식)

산조는 ‘조(調)의 음악’이다. 연주자는 평조·우조·계면조 등의 조를 조이고 풀며, 듣는 이를 웃음과 울음의 경계에 세운다. 형태들은 다르지만, 세상의 음악들은 이러한 양극을 오간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전혀 다른 기원에서 태어난 서양음악도 마찬가지다. 장조와 단조가 있다. 산조는 이러한 조의 감각을 어떻게 조율, 조정하는냐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조(調)의 음악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오늘날 창작국악의 젖줄이 된다는 점에서, 산조는 ‘조(助)의 음악’이기도 하다. 잘 만들어진 창작곡에는 산조의 수분이 가득하다. 산조의 심박과 습성도 뼈와 살을 이룬다. 그래서 창작자에게 도움(助)을 주는 산조는, 조(助)의 음악이다.

 

산조의 뿌리와 미래를 한자리에

서울돈화문국악당(예술감독 강은일)은 3월 17일부터 4월 25일까지 ‘산조대전’(散調大全)을 선보였다. 원래는 작년 5월에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로 인해 올해 상반기로 늦춰졌다.

2020년, 서울돈화문국악당은 비대면 공연으로 ‘미리 듣는 산조대전’(7.3)를 통해 산조대전을 예고했고, 11월부터 유튜브를 통해 산조 감상법을 담은 ‘산조의 정석’을 올렸다. 그리고 2021년 3월 17일 오경자의 신쾌동류 거문고산조를 시작으로, 44명의 예인이 46곡의 산조를 선보였다.

산조대전의 의미는 남다르다. 산조와 예인이 대거 참여한 물량공세(物量攻勢)로 오늘날 산조의 현주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거시적 안목으로 본다면 21세기인 2000년 초반의 산조대전은 이번 세기를 책임질 산조를 미리 만나보는 미래 체험이기도 했다.

산조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세기 말엽이다. 이 땅에 서양음악이 느리고 여리게 유입되던 때였다. 하지만 산조는 이러한 흐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시작점을 찍은 음악이며, 전통음악의 역사에서 보면 맨 끝에서 마침표를 찍은 음악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와 가장 가까운 시대에 형성된, 마지막 전통음악인 셈이다.

1990년대 말에 등장한 ‘뿌리깊은나무 산조전집’과 ‘젊은 산조’ 음반은 산조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두루 살피는 20세기 역작이었다. 특히 1989년 LP로 출반한 ‘뿌리깊은나무 산조전집’이 20세기 중반을 지나며 다져지고 정립된 산조들을 담아 중심을 잡아주었다면, 1993년 CD로 그 모습을 드러낸 ‘젊은 산조’는 산조 역사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나갈 ‘젊음’의 행진을 보여준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산조의 뿌리 찾기와 열매 맺기가 몇 년 사이에 진행된 것이었다. 특히 ‘젊은 산조’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CD를 통해 국악 음반계의 첨단화를 보여주었고, 이는 ‘뿌리깊은나무 산조전집’이 1996년 LP에서 CD로 새 옷을 입고 나오는 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산조대전은 20세기 후반에 ‘뿌리깊은나무 산조전집’를 통한 뿌리 찾기와, ‘젊은 산조’를 통한 ‘미래 찾기’가 21세기 초반에 서울돈화문국악당을 통해 한데 포개지고 녹아든 시간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산조대전은 산조 역사에 안착한 악기와 주 유파가 무엇이었는지를 말해주었고, “새로울 산조는 무엇인가”라는 음악적 질문 앞에 해답을 들려주었다.

‘전승의 의무’와 함께, ‘창작과 변형의 임무’를 지닌 것이 산조 연주자들의 운명이다. 연주자들은 이를 겸비한 자세로 산조를 선보였고(전승), 동시대적 감성을 불어 넣었다(창작).

 

산조의 복원과 정립, 그리고 창작

산조대전은 산조 역사의 중심에 포진한 산조가 더욱더 빛을 보고, 사각지대의 산조는 빛과 공기를 쐰 시간이었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은 서용석의 산조였다. 서용석류 대금산조의 창시자인 그는 여러 악기에도 능통했다. 산조대전에서는 그의 해금산조(3.21/강은일), 대금산조(4.1/오경수), 아쟁산조(4.9/서수진)가 자리잡아 그의 산조를 악기별로 만날 수 있었다. 서용석제 한세현류 피리산조(3.24/이호진), 서용석제 김상연가락 대금산조(4.25/김상연)까지 포함하면 서용석의 음악적 흐름과 역사가 상당히 넓고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조대전은 사각지대에 있는 산조를 발굴하여, 새 정립기로 이끄는 시간이기도 했다. 서공철류 가야금산조(3.18/이지영), 백인영류 아쟁산조(3.19/김영길), 강백천류 대금산조(3.21/이건석), 김동진류 대금산조(3.26/배명민), 정대석제 거문고산조(3.28/정누리), 황병기류 가야금산조(3.31/안나래), 유대봉류 가야금산조(4.4/이민영), 김영재류 해금산조(4.10/이승희) 등이다.

산조 역사에서 변방에 위치한 악기들의 산조도 만날 수 있었다. 김영철류 철현금산조(3.19/유경화), 전용선류 단소산조(4.11/이용구), 서공철류 양금산조(4.15/김경희), 김효영 생황산조(4.21/김효영), 원완철류 소금산조(4.22)이다. 1996년 ‘뿌리깊은나무 산조전집’의 CD 복각을 선두지휘한 백대웅(작곡·이론)은 “단소, 철현금, 태평소 산조가 빠진 점이 아쉽다”(조선일보 1.15)라고 말했는데, 20세기에 이면에서 숨 쉬던 악기들의 산조가 산조대전을 통해 본격적인 역사를 시작한 것이었다. 특히 4월 21일부터 25일까지 진행된 후반부의 공연들은 산조 창작의 현주소와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늘날 산조라는 소리생명체는 그 특유의 즉흥성과 현장성보다, 구성과 정돈의 틀 속에 기거하고 있다. 따라서 산조를 학습하고 연주한다는 것이 어느 때부턴가 산조에 내재한 즉흥성과 현장성의 감각을 배우고 체득하는 게 아니라, 대부분 형식화된 음률과 선율을 배워 연주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산조가 손에 손을 거쳐 다듬어지며 양식의 발전은 진행되고 있지만, ‘산조적인 것’(정신)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산조의 현실을 아는 이들은, 전승과 함께 새 산조 탄생을 위한 창작적 욕망을 갖고 있다. 다행히 산조대전 후반부에선 이러한 기운과 이를 통해 빚은 새 산조를 접할 수 있었다. 이재하·박다울·(거문고), 김효영(생황), 원완철(소금), 이지영(가야금), 김용성·이태백(아쟁), 김준영(거문고), 김상연·이영섭(대금)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산조를 선보였다.

산조대전은 20세기에 음원으로만 담긴 산조들이 21세기를 맞아 영상에 담긴 시간이기도 하다. 산조대전은 뜻깊은 대전(大全)으로 ‘기억’될 시간을, ‘기록’으로 남기기에도 여념이 없었다. 공연마다 녹화와 녹음을 진행했고, 재빠른 업로드를 통해 인터넷 공간으로 기록물이 진입했다. 화질은 맑고, 음질은 뚜렷했다. 과거에 산조를 배운 이들은 카세트테이프를 수차례 반복·청취하며 소음과 함께 감겨있는 선조의 선율들을 발라내어 채보하고 손끝으로 옮겼다. 그래서 그들은 테이프를 ‘테 선생’이라고도 불렀다. 이제는 영상과 유튜브 시대이다. 아마도 후학들은 산조대전의 영상을 보며, 그들을 ‘유 선생’이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산조대전 공연은 끝났지만, 산조대전은 온라인에서 이어질 예정이다. 영생을 얻은 기록물이다. 그래서 과제도 남는다. 전집이나 시리즈물에서 중요한 것은 콘텐츠가 쌓인 드넓은 지형을 안내하는 지도이다. 공연들이 모인 ‘인터넷-산조대전’ 속에서 이 지도는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 하지만 중요하다. 그 기록물들의 미로 사이에서, 산조를 어떻게 안내하고, 무엇을 강조할지가 오늘날 우리가 산조라는 소리생명체를 바라보는 안목과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 사진 서울돈화문국악당

 

돌아보기 | 현대음악과 만난 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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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

자극에 대응하여 일어나는 어떤 현상과 상태의 변화

 

대금연주자 유홍 전시·공연 ‘REFLECTION’

즉흥과 반응의 예술

 

대금 연주자 유홍의 연주력과 기교는 현대음악에 최적화되어 있다. 정악과 민속악, 혹은 이로부터의 피를 수혈하여 만든 창작곡보다, 그가 연주하는 곡들은 ‘현대음악’의 진한 문법들을 담고 있다.

유홍의 음악적 여정은 적응-대응-반응의 시간이다. 그는 국립국악고와 서울대에서 대금을 전공하며 국내 음악계에 ‘적응’하며 살았다. 그러던 중 런던대(SOAS)에서 공부를 마친 2009년, 베를린에 정착하며 한국 음악계와 ‘대응’하는 진영을 구축한다. 이를 통해 세계 각국에서 온 여러 작곡가와 인연을 맺었고, 그들은 대금이 아니라, 유홍을 바라보며 곡을 썼다. 이를 통해 유홍은 자신만의 목록을 쌓았고, 그들의 소리 세계에 ‘반응’하며 자기만의 세계를 더욱 공고히 다지고 있다.

이번 전시·공연 ‘REFLECTION(4.21~28/보안여관 신관)’은 이러한 그가 쌓아온 음악들을 한 자리에서 선보인 시간이다. 강지은이 예술감독으로, 우상희가 비주얼 디렉터로 함께 했다.

케이코 하라다(2013), 세바스티안 클라렌(2016), 톰 로요 폴라(2017), 양승원(2017), 박선영(2018), 제러드 레드몬드(2018), 정일련(2018) 등의 작품을 연주한 영상들이 텔레비전에 담겨 보안여관 전시장(신관 B2)에 ‘전시’되었다(괄호 속 연도는 작품 생산연도). 그가 연주한 여러 작품을 한곳에서 보여주는 ‘전시’(展示)이자, 그가 만들어온 음악의 시간(時)들을 한 자리에 펼쳐놓은 ‘전시’(展時)의 시간이었다. 첨단의 화질을 자랑하는 LCD TV가 아닌, 이젠 시중에서 구할 수도 없고 구경하기도 힘든 브라운관 TV 앞에서 관객은 헤드셋을 쓰고, 듣고 보며 유홍이 쌓아 올린 음악의 시간을 느꼈다. 흘러간 추억의 TV 속 영상은, 시간의 먼지가 쌓인 듯 살짝 흐렸지만,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대금의 소리는 쨍쨍하고 미래적 음향이었다.

전시 기간 중 24·25·28일에는 전시회장에서 약 50분의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대금독주로 선보인 ‘REFLECTION’은 그의 음악적 핵심이 ‘즉흥성’과 ‘반응성’에 있음을 선포한 곡이었다. 대금을 타고 흘러나온 소리는 마이크를 타고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타고 활공했다. 유홍은 스피커를 통해 되돌아오는 소리를 맞받아치는 타자(打者)의 소리를 연출하는가 하면, 길게 울리며 허공을 맴도는 소리 위에 또 다른 소리를 입히는 상생의 주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케이코 하라다가 작곡한 대금과 샤미센을 위한 ‘BAI’에선 영상을 통해 흘러나오는 샤미센과 공존하는, 그러면서도 낯선 대금 소리를 들려주었다.

이번 전시·공연을 아우르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Reflection’, 즉 ‘반응’은 그의 음악적 핵심이다. 그는 이러한 반응의 심장을 통해 서양음악과 한국음악, 과거의 음악과 동시대 음악 사이로 소리의 피를 순환시킨다. 그래서 그는 “다른 이의 음악(이야기)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집중하는 순간이 좋다”며, 연주하는 곡들은 “대부분 나의 ‘즉흥성’을 응용하여 쌓은 레퍼토리들”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여, 그의 음악들이 생명력을 얻을 때는 단순히 악보대로 ‘연주’될 때가 아니라, 유홍이 지닌 반응의 운동성 안에서 유희하고 횡단할 때이다.

많은 이들이 적응의 음악을 일삼는 지금이다. 대중의 취향에 적응해야 하고, 쉽고 재밌는 음악적 어법에 적응해야 한다. 국악 진영에서의 창작과 실험이 한때 이러한 나태한 죔쇠와 막을 뚫고 나아가려 했지만, 다시 주저앉은 지금. 유홍의 ‘반응’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반응’은 오늘날 전통음악이 잊고 있는 즉흥의 감수성을 복원할 연료이기도 하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 사진 왓와이 아트

 

돌아보기 | 역사 속 아픔을 치유하는 전통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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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대동춤Ⅱ’

돌아보다, 위로를 건네다

 

‘TIMELINE’ (작곡 정송희, 안무 조재혁, 무용 이주리·알티밋 무용단)

‘전통’과 ‘진통’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전통예술의 ‘전통’은 시대의 ‘진통’에 닿아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지곤 했다. 한 예로 지난 5월 10일에 타계한 이애주는 한국춤과 그가 만든 ‘시국춤’으로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이한열의 죽음과 넋을 위로하는 춤이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해마다 선보이고 있는 ‘대동(大同)’ 시리즈는 이러한 믿음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전통예술공연물이다. 해마다 5월 18일을 전후로 하여, 2018년 ‘대동천년’, 2019년 ‘대동해원’을 선보였다. 민주·인권·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대동춤’은 작년에 비대면 콘텐츠로 제작되어 영상으로 1탄을 발표했고, 올해는 2탄을 무대에 올렸다.

‘대동춤Ⅱ(5·16/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 극장1)’는 ‘다랑쉬’ ‘벽과 벽 사이에서’ ‘오름’ ‘TIMELINE’ ‘광주여 영원하라’ 순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다랑쉬’는 높은 봉우리를 뜻하는 제주도 말이다. 5·18을 기념하는 공연의 첫 무대를 제주의 이야기로 꾸민 이유는 광주와 제주에 스며있는 아픔의 기억 때문이다. ‘4·3사건’으로 기록된 비극적인 역사로부터 영감을 받은 김대성은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을 위해 해금곡 ‘다랑쉬’를 작곡했고, 이번 무대를 위해 동·서양 악기가 어우러지도록 재편곡했다. 여기에 ‘대동춤Ⅱ’의 총감독 및 예술감독을 맡은 김상연(전남대 국악학과 교수)이 공동구성으로 참여했다. 김 총감독은 이번 작품을 위해 제주 4·3평화공원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웅크린 채로 죽어가는 한 여인의 동상과 마주했을 적에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여인은 아이를 품고 웅크리고 죽은 모습이었다. 사료를 찾아보니 4·3사건의 희생자로 죽은 수많은 여인의 유골은 대부분 이처럼 웅크린 자세라고 한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역사의 아픔 앞에 이러한 모습으로 죽어갔던 것이다. ‘다랑쉬’에서 안무와 독무를 맡은 유선후가 취한 첫 동작도 그 동상의 모습이었다. 무대 뒤편에선 해금의 독주(박솔지)가 펼쳐졌다. 해금 특유의 고음이 날카롭게 다가왔고, 배면의 조용한 소리가 아픔의 흐느낌처럼 다가왔다.

아픔(다랑쉬), 대립(벽과 벽 사이에서), 천도(오름), 해원(TIMELINE), 대동(광주여 영원하라)의 메시지를 춤과 음악에 담아 도시의 아픔을 위로하는 ‘대동춤Ⅱ’은, 그 제목처럼 작곡가 김대성·박영란, 안무가 유선후·안덕기·조재혁, 알티밋무용단, 광주시립발레단, 전남대 성악과 학생들이 대동의 소리와 움직임으로 하나가 된 자리였다.

전통예술의 여러 요소는 작품의 씨앗이 되었고, 시대와 역사의 진통을 보듬는 그 무엇이었다. ‘벽과 벽 사이에서’ 속 국악은 박영란에 의해 서양음악과 만났고, 안덕기에 의해 한국춤과 현대춤이 춤언어를 섞었다.

‘오름’에서 추다혜는 상여소리를 노래했다. 무대 바닥에 드리워진 가늘고 긴 조명은 죽음으로 들어가는 길목 같다. 그만큼 죽음으로 향하는 길은 좁고 길다. 어쩌면 세상을 떠나야 하는 망자들의 아쉬운 마음이 그러할지도 모른다. 무대 위에서 유선후는 독무를 추었다. 그 움직임은 떠나야 하는 망자의 아쉬움과, 그를 데려가야 하는 저승사자의 덤덤한 모습이었다.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 교차하는 인간의 만감을 읽을 수 있었다.

‘TIMELINE’은 죽은 영혼을 달래기 위한 진혼제였다. 굿음악의 장단과 소리, 무당의 움직임이 창작의 에너지에 깊숙이 스며 있었다. ‘광주여 영원하라’는 광주가 더이상 아픔으로만 얼룩진 도시가 아닌, 새 역사의 씨앗을 품은 도시임을 노래하고 춤추며 막을 내렸다.

이처럼 ‘대동춤Ⅱ’에서 전통예술의 여러 요소는 미감과 색감으로만 국한되거나 박제화된 예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와 역사와 호흡하는 예술로 ‘오늘의 광주’를 대변했다.

김상연 총감독은 “5월의 광주가 남긴 대동의 씨앗이 광주를 넘어 미얀마·태국·홍콩처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연대의 메시지로 다가가고, 평화의 나무로 자라길 염원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대동춤의 춤사위는 그 씨앗을 멀리 퍼뜨리기 위한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 사진 아시아문화원

 

돌아보기 | 춘향전과 서양 성악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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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

웃음으로 사회 꼬집기

 

예술의전당 창작오페라 ‘춘향탈옥’

전통예술과 로맨틱 코미디의 입맞춤

 

‘로맨틱 코미디’와 ‘오페라’, ‘춘향’이와 ‘탈옥’이라니···.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들의 요상한 조합이다. 그런데 공연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반전의 묘미와 박장대소를 부르는 재미.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지던 창작오페라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예술의전당이 기획·제작한 창작오페라 ‘춘향탈옥’(대본 윤미현·작곡 나실인·연출 김태웅)은 지난 4월 27일부터 5월 16일까지 장장 20일 동안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은 한편으로는 오페라의 장르적 법칙을 비교적 충실히 따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용과 형식의 양 측면에서 모두 신선한 시도를 하고 있는데, ‘춘향전’이라는 고전을 비틀어 새롭게 해석한 ‘로맨틱 코미디’의 외피를 입고 있다는 점과 소극장 전용으로 장기공연을 염두에 두고 기획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춘향이의 탈옥, 내 삶은 내가 기획한다!

‘춘향탈옥’의 주인공들은 고전 ‘춘향전’의 인물들과는 사뭇 다르다. 춘향이는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이몽룡의 약속을 얌전히 기다리는 지고지순한 여인이 아니라, 시험을 볼 때마다 떨어지는 몽룡을 보다 못해 스스로 감옥 문을 박차고 나오는 진취적인 인물로 변모한다. 원작과 달리 똑똑하지도 않고 세속적 성공과는 거리가 먼 몽룡이지만,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춘향의 눈빛 하나면 다 좋다.

오로지 출세를 위해 외길을 달려온 변사또는 의외로 순진하다.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이 되면 자연스레 아리따운 여인과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이 그를 ‘열공’의 길로 이끌었다. 끝끝내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춘향이에 대한 변사또의 마음을 과연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손에 잡히지 않은 것을 소유하고픈 인간의 본능적 욕망 아닌가? 대본과 음악, 연출은 이 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원작 ‘춘향전’은 희극이 아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신분 제도의 허점을 꼬집고 암행어사를 등장시켜 탐관오리를 벌하며 지방 정치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을 볼 때 ‘풍자’와 ‘해학’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춘향탈옥’은 ‘희극’으로 변모하면서, 당대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다. 즉 21세기 한국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본능적 욕망과 삶에 대한 태도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삶과 사랑을 스스로 개척해가려는 춘향이, 세속적이지만 사랑에 서툰 변사또, 선한 성정이지만 능력위주 금전만능의 사회에 부적응자인 몽룡이는 주위에서 흔히 볼 법한 인물들이다.

‘춘향탈옥’에서 바리톤 공병우(변사또)는 능청스러운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았으며, 단순한 성격의 카바티나(반복 없는 짧은 독창곡)에서 아리아와 2중창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음악을 잘 소화함으로써 변사또라는 인물의 다층적 성격을 보여주었다. 소프라노 김신혜(춘향)는 자신이 선택한 몽룡이를 끝까지 지켜내는 강단 있는 춘향이를 선보였고, 테너 서필(몽룡)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약하지만 선한 몽룡이로 분하였다. 서민층을 대변하는 바리톤 오대희(방자)와 소프라노 윤성회(향단)는 전라도 사투리로 된 레치타티보를 맛깔나게 구사하며 극의 신명과 유머를 불어넣었다. 메조소프라노 김선정(월매) 역시 우아한 외모에 가려진 코믹한 매력을 선보이면서 분위기를 주도하였다.

 

한국 소극장에 구현되는 오페라 부파 정신

18세기 중반 무렵, 기존에 유행하던 오페라 세리아 장르를 대신하여 희극 오페라인 오페라 부파가 생겨났다. 오페라 부파는 중간 계급이나 그 이하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을 법한 친숙한 상황을 다루었고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공연할 수 있었으며, 각 나라의 언어로 지역적 색채를 반영하였다.

200여석 규모의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한국어, 그것도 간간이 전라도 사투리로 구현되는 오페라 ‘춘향탈옥’은 당시 민중의 삶을 재미있게 그러나 현실적으로 반영하려는 오페라 부파의 정신을 떠올리게 했다.

‘춘향탈옥’은 장기공연, 나아가 상설공연을 염두에 두고 예술의전당이 야심차게 기획한 작품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우리 고전 소설을 바탕으로 하여 새롭게 재해석하였으므로, 한국성과 현대성 모두를 지니고 있다. 이는 한국형 오페라 상설공연의 취지에 딱 들어맞는 성격 아닐까. 오케스트라의 실연 대신 녹음(MR)을 사용한 반주는 라이브 연주의 묘미를 잘 알고 있는 오페라 청중에게 분명 낯설게 느껴질 테지만, 이 또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비용 절감의 측면에서 분명 장점이 있다. 윤미현 작가와 나실인 작곡가의 세 번째 협업의 결과물인 ‘춘향탈옥’ 고전을 웃음으로 재해석하는 김태웅의 연출까지 더해져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즐길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오페라가 되었다.

글 강지영(음악학자) 사진 예술의전당

 

소프라노 김신혜

창작오페라 ‘춘향탈옥’을 위해 특별히 공들인 것이 있다면?

이탈리아 오페라는 수없이 재해석되었기 때문에 작품 속 인물들의 틀이 고정되어 있다. 반면 한국 창작오페라는 초연작이 대부분이어서 인물 해석의 폭이 열려있다. 그래서 인물 해석에 공을 많이 들인다. ‘춘향탈옥’도 대본을 수없이 읽고 분석한 후에, 이를 바탕으로 대본가·연출가·작곡가·지휘자 등 제작진과 충분히 나누었다.

이탈리아 오페라와 달리, 한국 창작오페라에 임할 때 다른 점이 있는가?

언어가 가장 큰 차이다. 언어는 정서를 반영하기 때문에 한국 창작오페라를 할 때는 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하려 한다. 같은 내용이라도 언어에 따라 표현 방법이 달라진다. 걸음걸이, 몸짓, 표정 등 모두 다르게 와 닿는다. 이를 관객이 공감해주시기를 바라면서 준비한다.

소극장 오페라의 매력을 꼽는다면?

친밀감이다. 대극장 오페라에 비해 소극장 오페라는 무대가 관객과 가깝다 보니 동선과 표정, 발성을 다르게 한다. 무엇보다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오페라를 처음 접하는 분들이 비교적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게 소극장 오페라가 가진 장점이다.

소프라노 김신혜는 이탈리아 피아첸차 주세페 니콜리니 음악원을 졸업했다. 이스마엘레 보톨리니 콩쿠르 2위를 비롯해 치타 디 마젠타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 ‘일 트리티코’에서 라우레타 역으로 국내 데뷔했다.

 

돌아보기 | 연출가·음악감독이 말하는 굿의 매력

5
소통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

 

국립극단 ‘당클매다’

서울에 나타난 현대판 샤먼

 

지난 5월, 국립극단 서계동 야외마당에서 ‘굿판’이 펼쳐졌다. 작년 국립극단의 ‘우리연극 원형의 재발견-하지맞이 놀굿풀굿’ 쇼케이스를 통해 관객의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준 이스트허그의 ‘당클매다’가 올해 정식 공연으로 돌아온 것이다.

마당 중앙에는 한 그루의 나무 구조물이 반짝인다. 관객은 블루투스 헤드셋을 끼고 나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검은 의복을 입은 세 명의 연행자가 등장하자 잠시 암전. 이내 극단 마당에는 소리와 빛으로 채워진 굿판이 열린다.

다분야 아티스트가 모인 이스트허그는 그동안 ‘굿’을 소재로 여러 작품을 선보여 왔다. 전작 ‘굿, 트랜스 그리고 신명’은 굿의 특징인 신내림을 미디어아트로 표현한 작업이다. ‘당클매다’는 ‘신과 함께 논다’는 단순한 서사로 진행됐고, 원초적인 빛과 소리로만 무대를 꾸몄다.

이번 작품의 키워드는 ‘관객 참여’다. 굿에서의 ‘무감서기’(굿의 연행 중 청중이 무복을 입고 장단에 맞춰 춤을 추는 행위)를 보자. 굿을 보러 온 관객은 굿판에 뛰어들어 스스로 신명을 풀어낸다. 어쩌면 굿은 현대 공연의 화두인 ‘관객 참여형 공연(immersive theater)’의 원형일지도 모른다. ‘당클매다’의 연행자인 이스트허그의 멤버 고동욱(연출·VJ)과 심준보(음악·DJ)를 만났다.

 

‘당클매다’는 지난해 국립극단에서 ‘굿’을 주제로 한 ‘우리연극 원형의 재발견’ 쇼케이스로 초연됐다. 이번 공연에선 무엇이 더 보완됐나.

고동욱 가장 큰 차이는 실내에서 야외 공연으로 변경된 것이다. 스튜디오 안에서 공연했을 때는 사방에 거울 필름을 붙여서 반사되는 효과를 줬다. 트인 야외에서는 거울을 설치할 수 없었고, 조명 쓰는 방식을 다르게 해야 했다.

굿이라고 하면 마당에서 사람들이 모여 집단 제의를 벌이는 장면이 생각난다. 오히려 야외라는 공간이 더 적합한 느낌인데.

고동욱 지난해 실내 공연은 ‘비현실 공간으로 관객을 초대하자’는 의도가 있었다. 야외는 실내보다는 더 현실적인 공간이었기에 연출적인 고민이 많았다.

지난 작업에서 이스트허그는 주로 영상을 토대로 미디어아트 작업을 해왔다. 사실 전통 굿에서는 휘황찬란한 장신구가 먼저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와 빛으로만 공연을 구성한 점이 인상 깊었다.

고동욱 큰 굿은 보통 마당에 있는 나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당클’은 제주에서 굿을 할 때 집 안의 중심이 되는 마루 상단에 신을 모시기 위해 마련한 ‘신의 자리’이다. ‘당클매다’라는 제목은 이러한 ‘당클’에서 차용했다. 나무 구조물에서 빛이 들어오는 모습을 신의 형상이라고 생각했다. 관객이 연행자로 인해 메시지를 다르게 읽는 걸 원하지 않아서 연행자들은 관객을 등지고 앉았다. 오직 소리, 빛을 통해서만 ‘이 공간에 신이 왔구나’를 느꼈으면 했다.

이스트허그는 전통예술과 연관된 작업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지난 3월, 예술의전당에서 펼쳐진 ‘내일의 예술전’(3.31~4.18)에서는 ‘신명:풀림과 맺음’이라는 작업을 선보였다.

고동욱 황해도 굿 음악을 모티브로 하여, 한국 전통 색채와 현대 전자 음악을 결합했다. 신내림을 받을 때 뇌파가 달라진다고 하더라. 관객이 뇌파 데이터를 확인하는 기기를 착용한 후 작품으로 들어가도록 이끌었다.

‘굿’이라는 장르에 관심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심준보 페스티벌에서 DJ를 하다 보면 동시대 대중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와 이전 사람들이 굿을 대하는 태도가 닮아있다고 느낀다. 지금 내가 음악을 듣고, 음악회를 가는 행위를 옛날 사람들은 굿을 보면서 느꼈을 것 같다.

 

굿판이 펼쳐졌다, 신과 함께 놀아보자!

‘당클매다’는 제주의 무가와 민요가 주요 요소이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지 못해 덩달아 굿 현장을 접하기 힘든 상황인데, 원전에 대한 자료 조사는 어떻게 했나.

고동욱 제주 출신이어서 주변 지인을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아울러 다양한 문헌과 영상 자료를 살폈다. 특히 제주굿과 관련해 주세페 로시타노(1978~)가 남긴 기록물들을 흥미롭게 봤다. 미국 청년이 3년간 제주에 머물면서 촬영한 다큐멘터리인데, 그는 제주의 신당과 심방, 신화에 매료됐다고 한다.

‘당클매다’는 ‘신을 불러내고 그 신과 함께 즐겁게 놀아보자’는 단순한 서사가 엿보인다. 구체적인 스토리텔링을 덜어낸 이유는.

고동욱 굿과 관련된 작품은 이전부터 만들어왔다. 작년에는 ‘굿, 트랜스, 그리고 신명’(1.23/연희예술극장)을 선보였다. 전작에서 부족한 점을 이번 ‘당클매다’에서 보완하고 싶었다. 사실 굿은 연행자와 함께 즐기는 것이었는데, 이전 작품에선 너무 어렵게 접근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이번에는 관객이 어렵게 느끼는 지점을 모조리 들어냈다.

이스트허그 작업 방식도 궁금하다. 음악이 먼저인가? 영상이 먼저인가?

심준보 제일 먼저 콘셉트 회의를 진행한다. 우리가 다루는 주제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밑그림이 없는 상태에서는 곡이 안 나온다. 명확하게 그림이 그려지면 음악 전개가 잡힌다. 동일한 목적지로 가기 위해 많은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무조건 음악이 먼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원전 음악은 어느 정도로 변형된 건지.

심준보 굿을 자주 접한 세대가 아니어서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했다. 기본이 되는 굿 음악을 우리 공연에서 어떠한 맥락으로 쓰면 좋을지 상상한다. 과거에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던 것들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중간중간 재즈 피아노 선율 같은 이국적인 음악을 삽입한 의도는.

심준보 제주의 굿 음악을 들으면 이상하게 한국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타악기를 중심으로 흘러가기 때문인지, 아프리카 민속 음악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한 이국적인 느낌들을 살리고 싶었다.

‘관객이 노는 장’을 만든다고 했는데, 의도대로 됐나? 흥미롭게도 필자가 관람한 공연 당일에는 갑자기 비가 오더라.

고동욱 중간에 비가 와서 기우제 같았다고 피드백 주시는 분도 있었다.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런 날씨와 더 어울렸던 것 같다.

 

굿판은 신명나는 ‘소통’의 장

‘원형’에 집착하다 보면 새로운 실험이 불가능할 수도 있을 테다.

고동욱 사실 이스트허그에는 전통예술 전공자가 한 명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굿은 엉터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전통의 특성으로부터 자유롭게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원형’에 갇힌 적은 없다. 우리는 연행자 중심이 아니라 관객에 초점을 두려고 한다. 과거에 굿은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행해졌다. 그래서 이번 ‘당클매다’는 굿에서 관람자의 소통이 두드러지는 ‘무감서기’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무감서기’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머시브 시어터(관객 참여형 공연)가 굿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동욱 굿이든, 마당극이든, 전통예술의 미학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지점은 ‘관객과의 소통’이다. 전통 공연이 가진 관객과의 상호작용(interaction)이 재밌게 느껴진다.

심준보 굿을 통해 위로받은 경험, 그 경험이 지금도 사람들이 굿을 소비하게 만드는 것 같다. 결국 굿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소통과 교감’이다.

전통 굿은 조상들 삶 속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민중은 소망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간절한 염원을 담아 굿판을 벌였다. 이러한 굿은 관객과의 ‘소통’을 핵심으로 한다. 무당이 중심이 되어 신과 인간을 연결하고, 참여하는 민중 스스로가 능동적 주체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굿판은 신과 인간이 ‘소통’을 통해 하나가 되는 축제의 장이라 할 수 있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국립극단

 

미리보기 | 이상원 정악단 예술감독의 정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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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함

 

국립국악원 정악단 ‘정악, 천년의 결이 숨쉬는 음악’

천년의 생명력을 머금은 음악

 

천년의 역사를 잇는 정악을 두고 어떤 사람은 ‘박물관 음악’이라고 말한다. 오해다. 정악은 고증과 박제의 대상이 아니다. 현대에 와서 정악은 관객과 호흡해야 하는 숙명을 띤, 지금 이곳의 음악으로 자리해왔다. 그리하여 시대를 건너 연주되는 정악에는 과거와 현재, 전통과 창작, 엄격함과 자유로움이 층층이 공존한다. 이것이 정악이 살아 숨 쉬는 음악인 까닭이다.

국립국악원 정악단은 정악을 전승하고 있는 유일한 국립 예술단체다. 풍류음악과 궁중음악을 아우르는 정악의 정통성을 올곧게 전하고 있다. 지난 1월 취임한 이상원 정악단 예술감독은 처음 이끄는 정기공연을 야심 차게 준비했다. 3일에 걸쳐 전·현직 단원이 함께 ‘대취타’와 ‘수제천’, 가곡을 비롯해 정악 기악곡의 대표 악곡인 ‘영산회상’을 합주 형태별로 선보인다. 이 예술감독은 “정악의 진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정악이 지루하고 따분한 음악이라는 편견을 없애고 싶다. 악기 편성을 다양하게 시도하고 전통 건축물에서 연주하는 등 새롭고 신선한 공연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전했다.

 

정악(正樂)을 한자대로 풀이하면 ‘바른 음악’이라는 뜻이다. ‘좋은’ 음악도 아닌, ‘바른’ 음악이라니.

원래 정악은 조선왕조의 통치 수단이었다. ‘예(禮)와 악(樂)으로 나라를 바르게 다스린다’는 예악(禮樂)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은 정악 고유의 미학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절제된 표현 방식은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유교의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들뜨거나 흥분하지 않도록 음고를 낮고 느리게 구성했기 때문에 정악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차분해진다. ‘수제천’ ‘여민락’은 소수의 인원이 연주하더라도 곡 자체에서 특유의 강건함과 꼿꼿함이 느껴진다.

어찌 보면 정악의 출발점부터 현재까지 1천 년의 간극이 있는 셈이다. 지금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한 전략은 무엇인가?

다양성이다. 관객의 취향에 맞는 공연을 얼마든지 선보일 수 있을 만큼, 정악은 그 종류와 형태가 다양하다. 웅장하고 장엄한 대규모 궁중음악부터 소규모 형태의 아기자기한 풍류음악까지 전부 아우른다.

1902년 고종의 기로소(나이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한 기구) 입소를 축하하며 밤에 열었던 궁중잔치 ‘야진연’(4.9~14)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연을 최근에 선보였다. 이런 복원 공연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무엇인가?

남아있는 악보와 문헌을 근거로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기준점이 항상 명확하진 않다. ‘야진연’은 전해지는 기록물이 많지 않아서 ‘임인진연도병’이라는 병풍 속 그림을 기초로 삼았다. 국립국악원은 공연 단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대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콘텐츠로 만드는 작업은 필수다. 우리 선조들이 느꼈을 감동을 관객에게 잘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주관이 개입되지 않도록 연출자·연주자·연구자가 모여 회의를 거듭한다. 전통의 보존과 전승도 중요하지만, 현대에 맞게 보완하면서 창조적으로 계승해야 한다.

정악은 남겨진 기록과 연구에만 충실히 따를 것 같은데 의외다.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변화다. 1970~80년대 국립국악원의 기록 영상을 보면 차이가 확연하다. 요즘엔 서양 음악의 개념인 평균율과 시창·청음을 공부하지만, 예전 국악인들은 박자나 음정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다. 오죽하면 당시 외국의 음악학자들이 “국악은 서로 음을 다르게 해서 연주하는 것이냐” 물을 정도였다. 연주에 심취하면 빠른 곡은 더 빠르게, 느린 곡은 더 느리게 극과 극으로 연주했다. 반면, 지금은 무대예술이라는 점을 고려해 음량과 음폭이 객석에 잘 전달되도록 음은 정확하게, 악기 간 소리의 밸런스까지 맞춰서 연주한다. 더 세련되어진 것인데, 묘하게도 예전의 인간미 있는 연주가 마음에 더 와닿을 때도 있다.

 

모든 세월과 형태가 공존하는 음악

전승된 것이지만,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음악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일본의 음악과 비교해봐도 알 수 있다. 일본은 스승에게서 배운 음악을 녹음기처럼 똑같이 연주해야 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기본 줄기는 스승의 것을 따르지만, 그 옆의 잔가지는 자신이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 정악은 남겨진 기록과 연구에 따른 규범, 합주 음악을 이끌어가기 위한 약간의 엄격함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자유로운 표현이 허용된다.

엄격한 정악에서 자유로움이 허용되는 부분은 어디인가?

‘시김새’다. 비브라토·장식음을 뜻하는데, 연주자에 따라 전혀 쓰지 않기도 하고, 반대로 기본음에 잔가지를 많이 붙이기도 한다. 국악 연주단체도 저마다 시김새 특징이 있다. 지휘자가 있는 단체는 장식음도 굉장히 정확하게 나온다. 그에 비해 정악단은 흘러가는 물줄기는 같지만, 그 안에서 연주자의 각기 다른 시김새가 공존한다. 공연날 누가 합주를 이끄느냐에 따라 정악단 연주가 달라지기도 한다. 다른 거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게 아니다. 청자연적에 삐져나온 잎같이, 자연스러운 멋을 더한다.

이번 정기공연에서는 총 9곡을 3일에 걸쳐 선보인다. 정악의 모든 매력을 보여주겠다는 포부가 전해진다. 무대에는 전·현직 단원이 함께 오른다고.

개원 70주년을 기념하여 정악단을 대표할 만한 곡을 엄선했다. 합주 형태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 ‘영산회상’을 이번 공연에서 모두 만나볼 수 있다. 대규모 합주 편성의 ‘평조회상’(5.27)은 원곡을 낮은 음역으로 옮겨 중후하고 웅장하다. 거문고 독주로 시작하는 ‘현악영산회상’(5.28)은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고, 향피리가 중심이 되는 ‘관악영산회상’(5.29)은 호쾌한 멋을 뽐낸다. 정악의 아름다운 음색과 선율, 웅장함과 소소한 감동까지 다 전해주고자 기획했다.

앞으로 전통 건축물에서 야외 공연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싶다고 밝혔다.

고궁과 서원, 향교 같은 건축물에서 정악을 연주하고 감상할 때 정악이 가장 돋보인다. 오래된 건축물에서 나오는 음향, 주변 자연의 아름다움, 자연을 소재로 만든 국악기의 소리가 어우러져 삼위일체를 이룬다. 농현이 끝나고 들리는 가야금의 잔상이 산들바람 불어오듯이 귀를 감쌀 것이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온라인 공연도 활발하다. 현대곡의 빠르기에 익숙한 청중은 느릿한 정악곡을 배속을 높여서 듣기도 한다. 추천하고 싶은 온라인 감상법이 있을까?

해외에서 공연할 때, 이렇게 느린 음악을 지휘자 없이 연주자들이 마음을 합쳐서 만들어내는 것이 경이롭다는 평을 받은 적이 있다. 정악 연주는 마음과 마음이 맞아야 한다. 그 마음이 관객에게도 전달될 때 가장 잘 감상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영상물의 장점 중 하나는 객석보다 가까이에서 연주자를 보고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연주자와 호흡을 함께할 정도로 혼연일체가 되어 감상해보기를 추천한다. 빠르기로 따지면 정악에도 빠른 곡이 많으니 본래 속도대로 즐겨주시기를.

글 박서정 기자 사진 국립국악원

 

공연정보

국립국악원 정악단

‘정악, 천년의 결이 숨쉬는 음악’

5월 27~29일 국립국악원 예악당

5.27 대취타, 보허자·낙양춘(집박 정재국), 평조회상

5.28 수제천(1·3·4장), 가곡 ‘언락, 우락, 태평가’, 영산회상

5.29 별곡(정상지곡), 피리독주 ‘상령산’, 관악영산회상

정악단 전·현직 단원 / 해설 서인화(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

 

미리보기 | 고선웅 연출가가 말하는 창극과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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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

현실의 모순을 빗대어 비웃음

 

국립창극단 ‘귀토-토끼의 팔란’

‘웃프게’ 노래하고, 준엄하게 꾸짖는다

 

6월 재개관하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첫 공연으로, 국립창극단의 ‘귀토-토끼의 팔란’(이하 ‘귀토’)이 올라간다. 국립창극단 최고 흥행작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연출가 고선웅(1968~)과 음악감독 한승석(1968~)이 다시 뭉쳤다. 이번엔 판소리 ‘수궁가’다. 때마침 이날치 밴드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범 내려온다’가 전 세계를 어깨춤으로 들썩이게 하고 있다. ‘귀토’는 별주부의 부름에 달려 내려오는 ‘범 내려온다’를 포함해서, 61편의 노래를 15인 국악단의 라이브 연주로 선사한다. ‘고선웅 표 창극’은 ‘변강쇠 점 찍고 옹녀’(2014)와 ‘흥보씨’(2017)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고선웅은 “창극은 뮤지컬이나 오페라와 달리, 창자와 고수의 장단에 따라서 언제든 유연하게 빨리 가고 느리게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고선웅 특유의 유쾌한 감각이 유난히 창극이라는 장르와 잘 맞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토끼의 삼재팔란, 가련허다

제목 ‘귀토’는 ‘거북이와 토끼(龜兎)’, 혹은 ‘살던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歸土)’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부제는 ‘토끼의 팔란(八亂)’이다.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 사는 게 고단한 이 시대에 ‘수궁가’의 팔란 대목이야말로 지금을 대변하는 이야기다. 고선웅은 토끼가 육지에서 겪는 갖은 고난을 읊는 ‘삼재팔란(三災八亂)’ 대목에서 오늘날 다사다난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겹쳐 읽는다.

작품의 시작은 자라에게 속아 수궁에 끌려가서 멀쩡한 배를 가를 뻔했던 토끼가 간신히 뭍으로 살아 돌아온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원작의 맨 마지막에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무사히 뭍으로 돌아온 토끼는 “예끼 시러베 발기를 갈 녀석. 뱃속의 간을 어찌 내고 들인단 말이냐.” 한 말씀 내뱉고 도망가 버리고 자라는 놀라 등짝이 뒤집어져버렸다.

시뻘건 맨몸 드러내고 등장하는 홍동지처럼, 인물들을 다 발가벗기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라는 토끼를 놓치고, 꿈속에선 자라처가 남생이랑 바람이 났다. 자라는 분기탱천하여 텀블링으로 발딱 일어서고 다시 토끼를 찾아 나선다. 이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수궁에서 살아 돌아온 토끼 아들 ‘토자’이다.

아버지 토끼 ‘토부’는 다시 아내와 아들과 만나지만 서로 껴안으려 달려오는 찰나, 독수리가 토부를 공중으로 낚아챈다. 독수리는 쌍부채로 토부의 겨드랑이를 낚아채는 것으로 간단히 처리한다. 독수리에게 잡혀가는 토부는 마지막으로 토끼의 팔란살이를 유언으로 남긴다. 토끼의 팔란살이란, 동지섣달 엄동설한, 돌구멍 찬 자리, 삼복중의 산불, 춘풍이 화창하여 산중에 나선 길엔 독수리가 달려들고, 사냥개 왈왈 대고, 사냥꾼 총소리 탕탕 나고, 횃불 같은 두 눈깔과 톱날 같은 두 앞발을 휘굴리는 호랑이도 달려 내려오고, 들판으로 도망가면 나무 베는 목동과 소 먹이는 아해들이 작대기 들고 달려든다. 가련한 토끼의 삶이다. 가련한 팔란살이에 토끼 눈알만 붉어진다. 토부는 마지막 유언을 다 마치기도 전에 잡혀가고, 토끼 어머니 ‘토모’마저 사냥개에게 잡혀간다.

천애 고아로 남은 토자는 “천재 인재 지재 삼재 팔란 나는 싫고” 산중을 홀연 떠나고 싶다. 산중생활 다 그만두고 “사시장철 푸른 수초 백화만발 미지의 수궁” 찾아가고 싶다. 그러나 바닷물에 뛰어들지만 수궁가는 길을 몰라 낙심하는 순간, 운명처럼 자라를 만난다. 자라는 또다시 등짝이 뒤집어진다. 오매불망 찾아 헤매던 토끼가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용궁만 데려가 준다면 간인들 못 떼어주겠느냐, 토끼는 큰 소리를 친다.

 

‘수궁가’의 풍자와 해학, 준엄하다

창극은 초기 판소리를 연극 무대 위로 올린 연극 장르이다. 전통 판소리와 근대 연극 장르가 혼종된 예술 장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동안 동시대에게 가깝게 다가가려는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무대 장르로서 창극이 가지는 특징은 소리꾼의 소리라는 ‘음악적 요소’와 배우의 말, 곧 재담의 ‘언어적 요소’에 있다.

‘고선웅 창극’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희극적 언어 감각이다. 고선웅이 감각적으로 가지고 있는 ‘말을 가지고 노는 능력’이 어느 장르보다도 잘 맞는 것이 창극이기도 하다. 고선웅 또한 창극 공연에서 유난히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단순한 우연의 일치는 아닐 테다.

이번 공연에서도 “너랑 나랑은 그렇고 그런 사이”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등 가수 장기하의 ‘그렇고 그런 사이’,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의 노래들이 툭툭 던져져 있다. 오늘날 대중가요 가사와 창극의 소리는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쉽고 편안한 우리말의 감각은 가장 현실적인 태도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흔히 전통극의 세계는 ‘풍자와 해학의 세계’라고 말한다. 풍자는 비판이고, 해학은 연민이다. 풍자와 해학은 상반된 감정이지만 마치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말이다. 둘 모두 민중예술, 곧 ‘우리 편’의 민중의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를 가리킨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 ‘흥보씨’ ‘귀토’에 이르기까지 ‘고선웅 창극’에서 가장 잘 살아나고 있는 것도 이 ‘풍자와 해학’의 관점이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에서는 원작 ‘변강쇠전’의 주인공 대신 옹녀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장승 동티로 온갖 병을 나열하고 만병을 얻어 죽는 변강쇠와 서방 변강쇠를 구하기 위해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장승들과 일대 전쟁을 벌이는 웅녀의 이야기는 흡사 구약성서 욥기에서 온몸에 종기와 부스럼으로 고름이 흘러 죽는 욥의 처지를 생각나게 한다. 힘없는 서민들의 운명, 그동안 억눌렸던 ‘을(乙)의 설움’이 한꺼번에 종기 터지듯 터져 나온다.

‘흥보씨’의 초연은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선고되던 때였다. “우주의 기운”을 불러오는 UFO 스님의 존재, 고을 원님 동헌에 나란히 형틀 의자에 앉았던 흥보와 놀보에게 “너희 둘은 국정을 농단한 대역죄를 지었다” 일갈하던 말, 대박 신화에 맞서 보여준 쪽박 결말은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하다.

‘귀토’에서는 또 어떤가. ‘귀토’의 수궁 이야기는, 더 이상 단순한 자라와 토끼의 숨바꼭질, 가련한 존재들끼리 서로 속이고 속는 ‘을들의 전쟁’이 아니라 그 비판의 칼날을 곧바로 용왕에게 들이댄다. 이번 ‘귀토’ 공연에선 용왕을 비판하는 주꾸미라는 캐릭터를 새로 등장시켰다. 주꾸미를 통해 “주지육림 뛰어놀다 호사방탕 도를 넘어 뜻 모를 병에 걸렸”다며 용왕을 풍자한다. 용왕은 토부에게 이미 한번 속아 토자에게 더 잔인하게 대한다.

자라도 더 독해졌다. 이번만큼은 토끼를 놓치지 않겠다면 도끼를 들고 으름장이다. 토자의 상황은 아비 토끼의 상황보다 더 나빠졌다. 기가 찰 노릇이다. 주꾸미는 토자가 수궁에 들어온 내력을 듣고 토자의 팔란가를 용왕 앞에서 마지막 유언으로 다시 부르게 한다. 토자와 토녀의 토끼 삼재 팔란가가 다시 불려지고, 수중 생물들이 동요한다. 수중 생물들의 수중살이 또한 고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독수리가 토부를 채가던 대목에선 정어리가 정어리 아비가 가마우지에 채여 가던 설움으로 울고, 사냥꾼에게 잡혀간 토모 대목에선 넙치가 넙치 어미가 쇠꼬챙이 작살에 꽂혀 가던 때의 설움으로 운다. 노래가 끝나고 토자는 자신의 지친 간이나마 쓸모가 있다면 그 아니 보람찬 일이냐, 무릎 꿇고 목숨을 내놓는다. 토자의 성장이다.

용왕 또한 깨달음을 얻는다. 용왕은 민초들의 삶의 고단함을 살피지 못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토자 대신 목숨을 내놓고 형집행관 전기뱀장어를 뜨겁게 껴안는다. 그러자 큰 트림으로 용왕은 다시 살아나고, 토끼도 살아나고, 수국 백성들도 다시 살아난다. 토자는 ‘고고천변’ 높은 소리와 함께 자신이 진짜 살아갈 땅으로 되돌아온다.

‘귀토’에서는 토자의 성장뿐만 아니라 그동안 창극과 함께 해온 고선웅의 성장도 읽힌다. 희극의 완성은 해피엔딩이다. ‘적벽가’도 적장 조조를 살려주었다. 그만큼 희극의 세계는 품이 넓다. 이 세상은 함께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죽이는 것보다 깨닫게 하는 것이 희극의 힘이다. 그렇기에 희극의 세계는 품이 넓다. 풍자와 연민이 그 속에 함께 있을 수 있다. 그 넓은 품에서 각박한 세상살이의 위안과 힘을 얻는다.

다시 살아 돌아온 토끼는 다시 “간뎅이가 커졌다”며 너스레를 떤다. 동시에 ‘수궁가’ 자체가 서늘한 풍자극이었음을 다시 읽게 해준다. 해학은 기본 바탕이지만, 이야기 속에서 풍자를 읽는 것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의 눈이다.

글 김옥란(연극평론가) 사진 국립극장

 

공연정보

국립창극단 ‘귀토-토끼의 팔란’

6월 2~6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예술감독 유수정 / 극본·연출 고선웅 / 공동작창 유수정·한승석 / 음악감독 한승석 / 안무 지경민 외

 

미리보기 | 최진욱 안무가가 말하는 한국춤과 선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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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길

 

국립무용단 ‘산조’

극단의 가운데서 중도를 걷는 춤사위

 

‘산조’ 무대 콘셉트 이미지

산조는 ‘밀당(밀고 당기기)’의 음악이다. 느린 진양조로 시작해 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 등으로 급해지는 장단은 이완돼 있던 청자의 귀 근육을 금세 죄어온다. 장단 위로 펼쳐지는 즉흥적인 가락은 어떠한가. 예측할 수 없이 현을 당기고 튕기는 그 손놀림, 여러 가락이 모이고 흩어지는 전개에 감칠맛이 절로 난다.

국립무용단이 신작 ‘산조’로 돌아온다. 이 음악의 풀고 죄는 형상을 춤으로 그린다. 제작진을 살펴보니, 산조를 완성하는 각기 다른 가락 같다. 국립무용단원을 지내고 현재 경기도무용단 상임안무가로 활동 중인 최진욱이 안무를 총괄하고, 현대무용가 임진호가 협력안무가로 참여했다. 리코딩 엔지니어 황병준, 음악 하는 무용가로 불리는 김재덕이 산조 음악을 재해석했다. 연출은 정구호가 맡았다. 영화와 패션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한 그는 장단의 변화에 따라 감각적으로 변하는 무대를 구현할 예정이다.

작품 개발이 한창이던 지난 5월 초, 안무가 최진욱을 만났다. 그는 “한국무용과 현대무용, 영화와 패션 등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 그야말로 ‘밀당’ 중이다.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 불협화음을 이루기도 하지만, 결국 조화로운 하나의 창작물이 되어 가는 과정은 산조의 미학과 결을 같이 한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은 과정에서부터 결과물에 이르기까지 산조 그 자체다.

 

국립무용단의 전작인 ‘묵향’(초연 2013년)과 ‘향연’(초연 2015년)은 전통춤을 현대화시키는 작업이었다. 신작 ‘산조’는 그와 접근 방식이 다르다.

작품 구상에 앞서 20세기에 정립된 산조춤을 연구하고, 산조 장단과 맞아 떨어지는 춤사위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산조의 묘미는 결국 즉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 산조춤의 언어를 차용하기보다, 이 시대의 산조를 새로이 창조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산조 음악에서 무엇을 가져왔나?

평온하게 시작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산조의 전개를 가져왔다. 이러한 흐름을 3막 구성으로 소화한다. 각각 ‘중용’ ‘극단’ ‘중도’다. 1막에는 무용수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중용의 상태를 표현했다. 2막에서는 이들이 한데 모이면서 엄청난 기운으로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3막에서는 그 혼돈 속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길, 중도를 찾아간다. 세상의 모습이 이러하다. 개개인으로 존재하던 사람들이 한데 모이면 어지러운 듯 보이지 않나. 그러나 늘 그 안에서 타협의 지점을 찾아 최선의 길로 나아간다.

여러 가락이 흩어지고 모이는 산조의 또 다른 음악적 특징도 시각화 될 것 같다.

그렇다. 무용수들이 무대 위에서 모이고 흩어지는 형상으로 승화될 것이다. 또, 작품 전반에 다양한 춤의 언어가 더해지고 빠진다.

다양한 춤의 언어를 위해 현대무용가 임진호와 ‘밀당’ 중인 건가.

그는 몸의 언어뿐만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발상이 독특하다. 예를 들어, 임진호가 함께하고 있는 현대무용단 고블린파티의 ‘오물놀이’에 그 면모가 그대로 담겨 있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물건을 뜻하는 ‘오물’과, 사물놀이의 네 개 악기는 사람이 함께여야 비로소 소리를 낸다고 하여 다섯 오(五)를 쓴 ‘오물놀이’의 중의적 의미를 제시한 것이다. ‘산조’에서 임진호의 재치와 한국무용의 깊이를 아우를 예정이다.

한편, 음악프로듀서 황병준과 무용가이자 음악가인 김재덕이 음악을 맡는다. 춤과 어떻게 어우러질까?

1막에서는 황병준이 산조의 전통 요소를 살린 음악을 선보인다. 김재덕이 맡은 2막에서는 산조가 전자음악으로 변형된다. 마지막엔 두 음악가가 협업해 서로 다른 두 음악을 한데 아우른다. 다시, ‘중용’ ‘극단’ ‘중도’다.

 

전통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

안무 연습 중인 모습을 보니, 비녀를 안무에 참신하게 활용했더라.

전통 악기나 소품에서 기존과 다른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데 관심이 많다. 이전에 발표한 한 작품에서는 양쪽 피를 떼어낸 장구를 머리에 쓰고 춤을 췄다. ‘산조’에서는 비녀를 머리에서 빼내, 피리를 불거나 해금을 연주하는 듯한 춤사위를 넣었다.

이런 요소가 한국적 정서를 자아낼 것으로 기대된다.

현대무용계에서 전통을 감각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전통을 새로이 보는 눈이 필요하다. 한 예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입었던 색동 의상은 한국적 정서를 담아내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힙’한 것이 되었다. 한국무용가들은 오히려 전통 의상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어서, 이를 활용하는 데 앞서 자칫 촌스러워질까 걱정부터 하게 되더라.

‘산조’에서 여성 무용수의 치마도 전통 한복보다 봉긋하게 볼륨감이 살아 있던데, 여기에도 새로운 시선이 반영된 걸까?

‘묵향’에서도 치마를 입은 무용수들이 등장했다. 치마가 춤추는 다리를 가린다는 의견과 한복의 선과 색감을 춤과 함께 즐길 수 있었다는 의견이 상충했는데, 이로부터 타협점을 찾고자 했다. 치마 안에 큰 패치를 붙여 허리 쪽이 봉긋하게 솟도록 했다. 그렇게 하면 기울기가 생겨 치마 끝이 발목 위로 살짝 올라온다. 춤추는 발의 모양새를 통해 치마 뒤에 가려진 다리의 춤 선을 상상할 수 있게끔 했다. 안무를 구상하면서도 치마를 여러 방법으로 움직여봤다.

의상의 작은 요소가 춤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재미있다.

무대 전체로도 이어진다. 예를 들어 ‘향연’에서는 한복의 화려한 금장식을 다 배제하고 미니멀하게 의상을 완성했는데, 무대에는 한복 장신구인 노리개를 크게 확대해 기둥처럼 세웠다. 알고 있던 대상을 크게 부풀림으로써 새롭게 보도록 하는 것은 정구호만의 특기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치마의 볼륨에 상응하는 것이 무대에 들어올 예정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비밀이다.(웃음)

이번 작품이 무엇으로 남길 바라나.

몸으로 그려지는 그림 한 폭이 되어, 관객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았으면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이는 복합예술이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이런 작업을 통해 관객층도 다양해진다. 영화, 패션계 전문가와 협업하면 그 분야 관계자나 애호가들이 공연장에 모인다. 그렇게 한국무용도 이 시대의 ‘중도’를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글 박찬미 기자 사진 국립극장

 

공연정보

국립무용단 ‘산조’

6월 24~26일 국립극장 해오름

연출 정구호 / 안무 최진욱 / 협력안무 임진호/음악 황병준·김재덕 외

 

6~7월 전통공연 일정

 

전통예술 모음ZIP

 

전통예술은 꾸준히 다양한 면모로 관객을 만나왔다. 이 공연들은 전통을 유지할 뿐 아니라 오늘날의 예술가들에 의해 새로 태어나고 있다. 태어남으로 그 전통은 계승된다. 6월과 7월 전국 각지에서 개인 및 단체들의 전통예술 공연이 펼쳐진다. 각 시립국악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를 포함해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기획 시리즈도 풍성하다. 올 하반기에는 영동난계국악축제와 서울국악축제 등 각종 국악 무대도 만나볼 수 있다.

정리 임원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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