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 COLUMN
음반에 담긴 이야기
탄생 110주년을 맞이한 세르주 첼리비다케
느리게 걷는 풍경 속 그의 시선을 따라
올해 탄생 110주년을 맞이하는 지휘자 세르주 첼리비다케(1912~1996)를 추억하며 그의 음반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것은 참으로 모순적인 일이다. 그는 데뷔 초기를 제외하고는 녹음 스튜디오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회피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음반과 이를 통한 감상 행위 자체를 온몸으로 거부한 예술가였다. 음악을 통한 ‘초월적 경험’은 오로지 콘서트홀 안에서 연주자와 청중이 서로 만날 때에만 가능하다고 믿었던 그이기 때문에 사실 그의 사후 유족들의 동의하에 발매된 그의 수많은 리코딩은 첼리비다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통조림 음악’, 그것도 심하게 부패하여 지휘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본질과는 관련이 없는 엉뚱한 부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실황 녹음을 가지고 그의 예술 세계를 조망하는 것은 소설가가 불태워버린 원고의 잿더미를 뒤져 그가 원치 않았던 새로운 소설을 재구성하는 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첼리비다케의 예술 세계를 살펴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그의 실황 녹음을 다시 꺼내 들을 수밖에 없다. 20세기를 장식했던 위대한 지휘자 중 가장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의 편린은 결국 음반으로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1912년 루마니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이아시(Iaşi)에서 태어난 첼리비다케는 부쿠레슈티와 프랑스 파리에서 철학과 수학, 그리고 음악을 공부했다. 루마니아의 공무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정치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기대와 달리 그는 1936년 베를린 음대에 입학해 전문 음악가가 되기로 진로를 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혼란한 베를린의 상황과 비나치화 재판 등으로 인한 지휘자 부족으로 베를린 필의 임시 상임지휘자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그가 푸르트뱅글러(1886~1954)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이 초보 지휘자에게 커다란 후광으로 작용했다. 그의 베를린 시대는 1954년 베를린 필과 결별하게 됨으로써 끝을 맺게 된다. 이 시기의 기록들은 여러 실황 녹음뿐만 아니라 스튜디오 녹음들도 일부 남아 있긴 하지만, 열악한 당시 녹음 수준 때문에 감상용으로 추천할 정도라 보기는 어렵다.
대신 베를린 시대에 무대에 올린 작품 중에선 그가 이후에는 전혀 다루지 않았던 곡들이 여럿 포함된 것이 눈길을 끈다. 첼리비다케가 지휘하는 거슈윈(1898~1937)의 ‘랩소디 인 블루’와 코플런드(1900~1990)의 ‘애팔래치아의 봄’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이런 의외의 곡 선정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당시 전승국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연주해야만 했던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겠지만, 경위가 어찌 되었든 그가 연주하는 거슈윈과 코플랜드, 브리튼 등을 들을 특별한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아우디테에서 발매한 두 개의 세트(AUDITE)❶❷에 대부분의 방송 녹음이 수록되어 있다. 이 녹음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해석은 지극히 표준적이며 훗날의 광활한 스케일과 긴 호흡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모색하는 젊은 지휘자의 고군분투가 느껴진다. 그중에서 특히 젊은이의 싱그러움이 매력적인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1번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9번을 추천한다.
스웨덴·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의 포디엄에서
베를린을 떠난 첼리비다케는 한동안 자리를 잡지 못하고 유럽의 중소 오케스트라들을 객원 지휘하며 지내게 된다. 그러다가 1965년 스웨덴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여 정착에 성공하게 되고, 1971년 스톡홀름을 떠나 1977년까지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로서 활동하였다.
방송교향악단들과 작업했기 때문에 방송용으로 녹음된 괜찮은 음질의 실황 녹음을 여럿 남겼는데, 이 중에서 최고의 유산은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1945~1987)와 함께 한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이다. 1967년 스웨덴 방송교향악단과의 이 녹음은 첼리비다케의 후기 스타일을 떠올리게 하는 장중한 느린 템포와 뒤 프레의 강렬하지만 애절한 사운드가 어우러져 개성 넘치는 열연을 펼친다. 그의 고질적인 약점인 ‘강한 악센트의 부족’ 때문에 박력이 떨어지는 3악장이 약점이긴 하지만, 이를 상쇄하는 듯한 1·2악장의 호방한 연주는 이런 스타일로는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초기 스테레오 실황 녹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녹음 상태도 아주 빼어난 편이다.(DG)❸
이 시기의 또 다른 중요한 녹음으로는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과의 브람스 교향곡 전집(DG)❹이 있다. 그가 위대한 브루크너 지휘자였을 뿐만 아니라 브람스 해석가이기도 했음을 잘 보여주는 연주는 뮌헨 필과의 브람스 교향곡 녹음이 있는데, 그것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빼어난 해석을 보여준다. 브루크너의 경우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과의 실황 녹음들이 뮌헨 필과의 그것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매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뮌헨 필과 연주한 브람스가 깊은 울림을 강조하는 첼리비다케의 후기 스타일을 대표하는 연주들이라면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과 연주한 브람스는 훨씬 더 날렵하고 템포 변화와 그 흐름도 더 자연스러운 편이다.
녹음 연도상의 차이가 몇 년 나지 않는 교향곡 3번의 경우 해석상의 차이가 거의 없는 편이지만, 교향곡 2번과 4번은 완전히 다른 지휘자의 연주처럼 차이가 크다. 개인적으로는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과 녹음한 브람스를 선호하지만, 4번 교향곡만큼은 그 파격적인 스타일 때문에 뮌헨 필과의 연주를 더 자주 듣게 된다.(Warner Classics)❺
부르크너의 광활함이 그의 손에서 빚어지다
루돌프 켐페(1910~1976) 사후, 후임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뮌헨 필은 1979년 첼리비다케를 새로운 음악감독으로 세우게 된다. 명성에 비해 일류 오케스트라와의 접점이 적었던 그는 뮌헨 필과 함께 전성기를 열게 되고, 일본 등지로의 활발한 연주 여행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도 얻게 된다. 이와 더불어 이른바 첼리비다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그의 브루크너 해석이 완성된 것도 바로 이 ‘뮌헨 필 시대’에 이르러서부터이다. 이전과 비교해 극단적으로 느려진 템포와 거대한 스케일, 음악을 통한 ‘초월적 경험’을 청중에게 선사한다는 첼리비다케의 해석관이 이 시기에 이르러 드디어 완성되었다.
당시를 대표하는 녹음 역시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이며 이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첼리비다케의 브루크너 해석은 뮌헨 필과 함께 후기 교향곡들을 집중적으로 연주하면서 다른 이들이 결코 따라 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1980년대 이후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을 이전보다 더 자주 연주회 프로그램으로 채택했기 때문에 상당한 숫자의 실황 녹음들이 남아 있다.
그중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EMI 세트(EMI)❻이다. 이 세트에는 3~9번까지의 교향곡과 미사 3번, 테 데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중 후기 3대 교향곡 연주들은 첼리비다케의 대표작이라 부를 수 있는 기념비적인 기록이다. 극단적으로 길어진 호흡과 갈고 닦은 각 성부의 아름다움, 광활한 스케일 등 그의 개성이 가득 담겨있는 연주들이다.
EMI 세트에 포함되지 못한 뮌헨 필과의 브루크너 교향곡 실황 중에서 5·8번 교향곡은 일본 실황을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녹음 환경의 차이 때문인지 일본 실황 쪽이 좀 더 날카로운 느낌을 주긴 하지만, 해석상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Altus)❼❽ 정규 음반으로는 아직 발매되지 않았지만 리스본에서 연주한 8번 교향곡 실황도 첼리비다케의 열성적인 팬들 사이에선 유명한 연주이다.
느림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러시안 레퍼토리
브루크너·브람스·베토벤으로 대표되는 독일 작곡가들을 제외하고 첼리비다케가 반복적으로 연주회 프로그램으로 채택한 작곡가들은 주로 러시아와 프랑스 출신 작곡가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중 그의 연주 스타일과는 그다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 차이콥스키와 프로코피예프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한 것이어서, 젊은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주 연주회 프로그램에 채택했다.
이 실황 녹음 중에서 해석의 독특함 때문에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뮌헨 필과의 80년대 이후 녹음들이다. 예를 들어 1992년 실황 녹음인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 연주(EMI)❾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17분에서 19분 정도의 연주 시간을 가지는 1악장을 무려 25분에 걸려 연주하고 보통 8분대에서 끊는 3악장을 11분에 주파한다. 4악장의 경우 번스타인(DG)이라는 비정상적인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주 예외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아주 느린 연주에 속한다.
이런 첼리비다케의 극단적으로 느린 템포는 브루크너 교향곡에는 잘 어울릴지 몰라도 통속적인 선율과 발랄한 춤곡 등이 어우러져야만 하는 차이콥스키의 후기 교향곡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그러나 이 걸작들을 여러 표준적인 연주를 통해 이미 접해본 음악 애호가들에게 그의 후기 스타일이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첼리비다케의 이런 스타일을 오랫동안 받아들였던 이 시기 뮌헨 필의 연주력은 일류의 그것이며 음색 역시 천박함과는 거리가 먼 정제된 세련됨을 갖춘다. 뮌헨 필이 아니었다면 이런 스타일의 연주를 장시간 듣는 것은 오히려 피곤한 고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이외에 추천하고 싶은 첼리비다케의 러시아 레퍼토리로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셰에라자드’가 있다. 정규 발매된 음원으로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과의 실황 연주(DG)❿, 뮌헨 필과의 녹음(Warner Classics)⓫이 있는데 두 연주 사이엔 2년의 간격밖엔 없지만, 연주 시간도 좀 더 길어지고 연주 스타일도 꽤 많이 차이 난다. 그는 ‘셰에라자드’를 진중한 교향악으로 다루고자 하며 뮌헨 필과의 연주에서 이런 의도를 더 강하게 드러낸다. 그 특유의 넉넉한 템포는 여기에도 물론 적용되지만, 중간에 길을 잃을 정도로 느리기만 한 것은 아니며 뮌헨 필 목·금관 주자들의 눈물겨운 사투 덕분에 맥이 풀리는 일도 없다. 첼리비다케의 템포에만 적응한다면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던 ‘셰에라자드’의 전혀 다른 매력을 새롭게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영적 영역으로의 이행
첼리비다케는 정교회를 모태신앙으로 가졌었지만, 베를린에서 수학할 무렵 선불교를 접하였고,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선불교의 선(禪)에서 찾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선불교에 빠져들었으며 특히 윤회사상에 매료되었다. 심지어 음악은 윤회의 원칙이 구체화한 것뿐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불교도가 지휘하는 서양 종교 음악이라는 독특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그의 종교 음악 공연 실황들은 뮌헨 필 시절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의 후기 스타일이 아주 강하게 배어 있는 연주들이다. 바흐의 ‘b단조 미사’, 모차르트·베르디·포레의 ‘레퀴엠’,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그리고 스트라빈스키의 ‘시편 교향곡’ 등을 담고 있는 종교 음악 세트(Warner Classics)⓬는 그 독특한 스타일 때문에라도 한 번은 들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한 음반이다. 너무나 느릿한 발걸음 때문에 음악의 논리적인 구조조차도 초월해버린 듯한 그의 종교 음악 해석은 그런 전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비슷한 연배였던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1914~2005)도 말년에 비슷한 해석을 선보인 바가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첼리비다케가 탐구하는 종교 음악의 세계는 그들보다 더 정적이며 ‘비오페라적’이다.
특히 그중 1993년에 녹음된 베르디의 ‘레퀴엠’은 평생 오페라를 멀리했던 그의 몇 안 되는 베르디 녹음으로도 이색적일 뿐만 아니라 1시간 40분을 훌쩍 넘어가는 연주 시간으로도 흥미를 끌게 만든다. 느리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느려진 것이 아니라 음악의 흐름에 따라 속도를 조절하기 때문에 무작정 느리다는 느낌을 주진 않으며 긴 연주 시간을 참아낸다면 첼리비다케가 만들어내는 정적인 세계에 감동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송준규(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