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 이진상 피아노 독주회 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4월 4일 9:00 오전

EDITOR’S NOTE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경건함과 낭만성의 회복

이진상 피아노 독주회

3월 17일 금호아트홀 연세

 

이진상은 올해 ‘이진상 예술의 발견’ 시리즈를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대단한 곡이 우리가 모른 채로 숨어 있었고, 그것을 우리는 발견하는 과정에 있다”라며 기획 의도를 밝혔다. 이번 공연을 포함해 세 번(6.16/9.1(금호아트홀 연세))에 나누어 그가 탐구했던 작품들로 구성해 선보인다. 그 시리즈의 첫 번째로, 바흐의 작품을 편곡한 작곡가들, 리스트가 편곡한 작곡가들을 주제로 펼쳐졌다.

1부에서는 바흐의 ‘건반을 위한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BWV903을 시작으로 헤스 편곡의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 되시니’ BWV147, 켐프 편곡의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 BWV645, 부소니 편곡의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샤콘’을 선보였다. 무대에는 한 대의 피아노뿐이었다. 하지만 하프시코드의 아르페지오가 만드는 듯한 정직한 음색이, 혹은 성당에서 울렸을 오르간의 신비한 음색이, 그리고 합창단의 투명한 음성이 무대에 흘렀다. 이따금 피아노의 묵직한 저음이 바닥을 짓누를 때 이 모든 환상은 피아노가 만들어낸 것임을 환기했다. 이진상은 바흐 ‘샤콘’에서 폭넓은 음향으로 작품의 깊이를 더욱 넓혀갔다. 네 줄의 현에서는 발현되지 못했던 세계를 부소니는 88개 건반으로 확장시켰고, 이진상은 뚜렷하고 명료한 연주로 음악의 숨겨진 면을 들추었다. 들춰진 음악 앞에서 삶의 희로애락은 참으로 보잘것없이 작은 것이었다.

2부에서는 리스트가 편곡한 성악 작품이었다.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중 ‘보리수’, ‘송어’를 포함해 베르디 ‘리골레토 주제에 의한 콘서트 패러프레이즈’, 구노 오페라 ‘파우스트’의 ‘왈츠’를 연주했고, 리스트의 ‘B-A-C-H 주제에 의한 환상곡과 푸가’로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진상은 정돈된 기교는 물론, 리스트가 풀어놓은 피아노의 기교와 성악의 ‘노래하는’ 선율의 유연함도 함께 선보이며 피아노 작품이 된 가곡의 난감함을 어루만졌다.

이번 연주는 피아노의 음색에 기대어 다른 세계를 엿보는 기쁨이 있었다. 바흐의 음악을 통해 일상의 ‘경건함’이 상기되었고, 리스트의 작품을 통해 잊고 있던 삶의 ‘낭만성’이 회복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글 임원빈 기자 사진 금호문화재단

 


신선한 서사는 가라!

연극 ‘회란기’

3.5~20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오래된 서재에서 누런 갱지에 쓰인 극본 하나를 꺼내 들었다 생각해보자. 먼지도 풀풀 날리고 퀴퀴한 냄새도 배어 있다. 반전이랄 것 없는 권선징악의 이야기. 이 극을 낄낄대며 120여 분간 읽었다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연극 ‘회란기’가 제시한 방법은 이렇다. 책을 아주 능글맞은 톤으로 읽어주는 것이다. 적혀있지 않은 상상력과 애드리브도 더했다. “이 악독한 본처의 말투는 1980년대 성우처럼 이렇게”, “포청천이 위엄 있게 걸어 나와. 근데 갓이 가로로 너무 길어서 나오다가 갑자기 세로로 걸어야 함.” 합이 척척 맞는 배우들의 연기가 이 역할을 수행해준다. 오래 함께한 극단의 탄탄한 내공이 긍정적 에너지로까지 느껴진다. ‘지금 우리는 연기 중이야!’가 물씬 풍기는 연기의 톤은 관객이 다른 극이나 미디어에서 접한 것과 이질적이었지만, 납득하고 극에 빠져들 수 있는 몰입도가 있다. 비었다시피 한 무대 세트에서 배우의 몸짓 한 번으로 장소와 시간이 자유자재로 바뀐다.

그런데 잠깐, 애초에 오래된 서재를 찾은 이유가 뭐였나. 13세기 중국 원나라까지 거슬러 가 이잠부가 지은 잡극을 들춰본 이유. 내 짧은 역사 속에서는 깨닫지 못한 깊은 울림을, 그 무게감을 얻고 싶다는 기대 아니었나. 촌스러운 문체에 킥킥거리며 웃다가, 어쩐지 오래 한 대사가 기억에 남는 것. 예를 들면 아들을 잃고 죽을 위기에 처한 주인공 앞에 나타난 어머니의 환영. 그리고 주인공의 대사. “어머니, 이렇게 가면 저는 이 세상에 있었던 건가요? 제가 있기는 했을까요?”

치밀한 복선을 노리는 스토리는 연극이 아니어도 세상에 많다. 어느새 습관처럼 연극이나 영화를 볼 때면 이야기가 던질 메시지를 찾느라 잔뜩 곤두서있다. 심장은 쫄깃하지만 어쩐지 머리가 조금 지끈거린다. 연극 ‘회란기’가 갖는 ‘콘텐츠로서의 가치’는 여기서 차이를 보인다. 마음이 한바탕 웃고 갈 수 있는 마당극의 높은 완성도. 서사의 신선함보다 더 큰 만족감을 선사하는 극단과 연출의 짜임새. 이래서 ‘연극’이란 걸 그토록 오래 봐왔고, 앞으로도 오래 보게 될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극중 인상적인 대사톤을 따라 나도 모르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게 된다. “글쓴이의 성은 허(許)가요, 이름은 서현(恕顯). 하는 일은 기자라”

글 허서현 기자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연극 ‘회란기’ 이잠부(작)/고선웅(각색·연출)/이서현(장해당 역)·박주연(마부인 역)·조영규(마원외 역)·호산(포대제 역) 외

 

 

 

 

 

 

 


진심이 능사는 아니지만

뮤지컬 ‘프리다’

3월 1일~5월 29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이 사람 진심이구나’ 지난 3월호를 준비할 때다. 뮤지컬 ‘프리다’에서 극작과 연출을 맡은 추정화의 인터뷰 답변을 받아들고 생각했다. 그의 답변지는 한 편의 대본 같았다.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에 대한 절절한 애정과 존경이 묻어나왔다.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행복한지, 여성 배우로만 채운 무대를 볼 때 얼마나 가슴 뛰는지 이야기했다. 작품을 보기 전이었지만 무대가 생생히 그려졌고 그만큼 기대도 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쉽다. 작품은 창작자가 프리다 칼로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그 진심의 무게에 압도된 것처럼 보였다. 사고로 인한 장애, 유산, 배우자의 여성 편력 등 생의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한 프리다 칼로의 삶은 분명 숭고하다. 추정화는 그의 삶이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로 소비되는 걸 경계하면서 비극적인 사건을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그러나 작품에서 그의 삶을 왜곡 없이 전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관객을 끌어들이는 작중 인물의 매력이다. 뮤지컬 ‘프리다’가 들려준 이야기는 진실에 가까울지언정 프리다에게 귀를 기울이게 하는 힘은 부족했다.

프리다 칼로의 실종된 매력은 무대 위 네 여성 배우에게서 대신 찾을 수 있었다. 작품 내내 열연과 열창이 쉴 틈 없이 이어진다. 프리다 칼로(김소향)를 제외한 세 명의 쇼 프로그램 크루(전수미·임정희·황우림)는 일인다역을 바삐 오간다. 쇼에 출연한 프리다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극중극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다. 추정화는 이번 콘셉트를 떠올리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프리다가 하이힐을 신고 신나게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나는 그녀에게 하이힐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아마 아픈 발로는 평생 구두를 신지 못했을 테니까. 내 이야기에서는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렇다. 어쩌면 이 뮤지컬은 처음부터 단 한 명의 관객을 상정한 작품일지 모른다. 바로 프리다 칼로다. 그런데 무대 위에서 폭발적으로 노래하며 즐기는 배우들을 보다 보니 바로 이들을 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영상으로 투사한 무대미술 외에도 춤이라는 시각적 표현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는데, 프리다의 독백과 함께 핏빛 꽃잎 위에서 펼쳐진 독무 장면에서 현대무용가 피나 바우슈부터 최근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스트리트 댄스 크루 프라우드먼 같은 여성 예술가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추정화의 진심은 프리다 칼로뿐만 아니라 당당히 자기 예술 세계를 펼치는 여성 예술가에 향해 있었다.

글 박서정 기자 사진 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 ‘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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