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박스 극장의 시대가 온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8월 8일 9:00 오전

THEATER REPORT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극장1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무대·객석 위치를 자유롭게 바꾸는

블랙박스 극장 시대가 온다!

인터뷰에 응한 이현정 LG아트센터장은 블랙박스 극장이 “실험적인 문화 충돌로 에너지 넘치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변화와 새 바람을 일으키는 ‘검은 공간’의 현주소와 장·단점을 살펴본다.

 

블랙박스 극장(Black box Theater)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4면이 검은색으로 칠해진 박스 형태의 공연장이다. 눈을 감고, 텅 빈 까만 공간에 서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어떤 모양의 무대를 만들고 싶은가? 네모도 좋고, 세모도 좋다. 별 모양이거나 꼬불꼬불한 S자도 가능하다. 창작을 위한 무한한 상상력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곳, ‘블랙박스’는 예술가들에게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하얀’ 도화지와 같은 곳이다.

유래와 유행의 시작은 어떻게?

블랙박스 극장의 유행은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했다. 처음에는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공연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었다. 리허설이나 실험적인 형태의 공연을 소규모 장소에서 실행해봄으로써 효율을 추구하기도 했다. 극단이나 대학에서 블랙박스 극장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현재는 전 세계 다양한 공연장에서 블랙박스 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블랙박스 극장의 특징은 객석의 자유로운 배치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형태의 무대를 만들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인 액자형의 프로시니엄 극장부터 원형극장, 객석이 무대의 3면을 둘러싼 돌출형, 패션쇼를 하는 듯한 로드형까지도 연출 가능하다. 이동식 음향 반사판을 구비해 연극, 무용, 국악, 음악 등이 모두 오를 수 있는 다목적 공연장의 역할도 수행한다.
국내에서는 1988년에 개관한 예술의전당 내 자유소극장(1993년 개관)이 최초의 블랙박스 극장이다. 그 이후로 현재까지 국립극장 별오름,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 극장 1, 통영국제음악당 블랙박스,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 등이 블랙박스 극장으로 운영 중이다. 지난 7월에는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 지하의 동숭홀을 리모델링한 블랙박스 극장 ‘쿼드(QUAD)’가 개관했다.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창작 초연 중심의 1차 제작·유통극장”이라고 밝혔다. “무대와 객석이라는 물리적 제약을 벗어나, 동시대적 가치를 구현하고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을 지향한다”는 것. 이처럼 실험적 공연 제작에 대한 열망은 비단 새로운 극장만의 포부는 아니다. 최근, 블랙박스 극장을 둘러싼 공연장들의 야심이 뜨겁다.

 

블랙박스 극장만의 특징과 역할

세종문화회관은 지난 4월, 동시대를 선도하는 작품들로 구성된 ‘싱크 넥스트 22’의 라인업을 발표하며 블랙박스 극장인 S씨어터를 전면에 내세웠다. 실험적 공연에 용이한 블랙박스 극장에 동시대적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덧입힌 것이다. 이로써 세종문화회관은 ‘제작 극장화’라는 목표에 걸맞은 동시대적 공연장 이미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지난 6월 30일, ‘싱크 넥스트 22’ 시리즈의 개막작 ‘은미와 영규와 현진’ 공연 프로그램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게 바로 오리지널 컨템포러리다”.
공연은 객석 뒤쪽에서 등장한 안은미가 관객에게 다가가 젤리 형태의 소품을 직접 주고 먹어보라 권하며 시작됐다. 이어 7월, ‘사우나 세미나’를 제목으로 공연을 올린 앰비규어스컴퍼니는 스탠딩 객석으로 구성, 관객과 무용수가 함께 섞여 춤을 추는 형태를 선보이기도했다.
여러 극장을 소유한 공연장의 경우, 각 극장이 가진 용도의 차이를 고민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대부분의 공연장이 자신들의 블랙박스 극장에 대해서는 ‘창작’과 ‘실험’으로 방점을 찍고 있다. 2015년 건립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의 ‘극장 1’은 형태에 따라 944석까지 가능한 국내에서 꽤 큰 규모의 블랙박스 극장이다. 건립 당시부터 ACC는 ‘실험을 통한 동시대 공연예술을 위한 창·제작’을 구상했다. ACC 관계자는 “극장 2는 프로시니엄 극장, 극장 3은 전용 영사막을 갖춘 영화관, 어린이 극장은 관객의 신체조건에 맞춘 전용극장으로 운영한다”라며, “극장 1은 건립 목적대로 창·제작을 진행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무대 문법에 머무르지 않고 실험한다는 정체성을 지금도 적절하게 유지 중”이라고 전했다.
이태은과 유길준의 ‘한국 현대 공연장의 이용특성에 관한 연구’(대한건축학회 논문집, 2000)에 의하면 소극장의 장르별 상연 빈도는 음악이 가장 높으며, 그다음으로 연극·행사·기타·무용·뮤지컬·오페라 순이다. 그러나 대공연장의 장르별 상연 빈도와 비교해보았을 때 음악 공연의 빈도는 낮아지며, 연극의 비중이 높아진다. 블랙박스 극장의 경우는 일반적인 소극장과 달리 연극의 비중이 매우 높지만, 음악, 무용, 그리고 전통 예술에서도 블랙박스 극장에서 새로운 연출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객석 교체 전과 후 ©예술의전당

 

 

 

 

 

 

조심스레 품어보는 기대!

국내 블랙박스 극장의 좌석 수는 주로 300석에서 400석 사이, 공사비는 어림잡아 40억 원에서 70억 원 사이다. 극장 조성에 들어가는 비용에는 일반 소극장과 큰 차이는 없으나, 운용비용을 계산하면 결과는 다르다. 장르와 연출에 따라 객석을 이동해야 하고, 다양한 장르를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조명과 음향 장비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통영국제음악당의 경우, 이동식 음향 반사판을 사용해 오페라나 현대음악에도 적합한 공연장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우란문화재단의 ‘우란2경’에는 상부 전체에 와이어텐션 그리드를 적용, 조명과 음향, 영상의 작업 구현 가능 범위를 넓혔다. ACC 관계자는 “ACC ‘극장 1’은 객석 모듈 1개의 무게가 3톤이다. 이동 시에 10명 이상이 필요하다. 대관 공연일 경우에는 시간과 비용을 추가로 부담하는 경우도 생긴다”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 비슷한 객석 형태의 공연이 이어지도록 일정을 조정하며 서로의 부담을 줄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프로시니엄 공연 다음으로 3면 무대, 4면 무대 등의 순서로 공연 일정을 조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블랙박스 극장의 방점을 ‘공연 콘텐츠 제작’에 찍었을 때 생기는 문제도 있다. 블랙박스 극장의 유연한 무대 연출에 맞춰서 공연이 제작될 경우, 객석 이동이 불가능한 다른 장소에서의 재공연은 어렵다는 점이다. 객석의 안전 기준 측정이 어렵다는 것도 블랙박스 극장이 극복해야 할 부분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15년에 발표한 ‘객석 설계 안전 기준’에 따르면 “블랙박스 같은 개방형 객석 배치 구역에서 이동 거리(관객이 건물 층의 비상구로 이동하는 실제 거리)를 예상하는 것은 더 어려운 작업일 수 있다. (…) 임시 무대 구조나 조명 등이 관객과 피난 경로의 직선거리를 방해할 수 있는 경우 등이 있다. (…) 공연장 설계팀은 이러한 예상되는 공연의 예들과 관련 사례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러한 문제들을 미리 파악하여야 한다”라고 언급했다.
그럼에도 블랙박스 극장이 가진 다양성과 실험성은 현대 공연장이 놓칠 수 없는 장점이다. 제4의 벽을 뚫고 관객을 무대로, 무대를 관객에게로 이끄는 경험적 극장, 즉 ‘이머시브 극장’이 될 수 있다. 오는 10월, 서울시 마곡에 재개관을 예정하고 있는 LG아트센터 또한 ‘U+스테이지’라는 365석의 블랙박스 소극장을 갖췄다. 개관 페스티벌 공연작 중 ‘다크필드 3부작’은 폐쇄된 공간에서의 소리를 통해 진행되는 체험형 공연이다. 암전 속에서 관객들은 헤드폰을 쓴 채 직접 사건이 일어나는 비행기, 병원, 배의 승객이 된다. 12월에 선보일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 또한 관객참여형 1인극이다.
그렇다면 이제 올 하반기 국내 블랙박스 극장들에서 선보일 라인업에 주목해보는 것은 어떤가. 무대와 객석, 그 관습의 틀을 깨고 나와 관객에게 손을 내미는 새로운 예술의 얼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불쑥 나온 손이 ‘블랙 핸즈’일 수 있으니, 놀라지 않을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허서현 기자

 

ACC 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

ACC 연극 ‘소’

2020-05-11-공연-나는 광주에 없었다ⓒACI BHT00

2021 여우락 페스티벌 ‘두부의 달음’ © 국립극장별오름

2018 통영국제음악제 뮤직 시어터 ‘귀향’ © SihoonKim-TIMF

 

 

 

 

 

 

©우란문화재단

뮤지컬 ‘디어 마들렌’
오랜 기간 텍스트 중심의 개발 과정을 마치고 2021년에 트라이아웃 공연 형태로 선보이는 ‘우란이상 공연예술개발’ 프로그램의 작품이다. 작품이 가진 특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무대 콘셉트와 형식을 시도했다. 동그랗고 검은 객석이 무대의 일부가 되어 마치 소품 중 하나처럼 보인다.

 

 

©예술의전당

연극 ‘레이디 맥베스’
무대를 깊게 사용해 극 중 인물의 심리를 몰입도 있게 감상하도록 연출했다. 이 작품은 2002년 공연 후 예술의전당 개관 20주년에 관객이 손꼽은 잊을 수 없는 작품으로도 선정되어 CJ토월극장에서 재공연했으며, 블랙박스 극장에서의 연출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무대 위에 객석을 올려서 공연했다.

 

 

©임재영/국립현대무용단

국립현대무용단 ‘루돌프’
객석을 세 부분으로 나눴다. 가장 가까이는 어린이 전용, 중간은 어린이와 어른 동반, 뒤쪽은 어른 전용 객석이었다. 공연 후반에는 어린이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와 참여했다. 어린이 공연에 최적화된 관람 환경을 조성한 2019년 무대.

 

 

 

 

 


INTERVIEW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 © BaeJihun, LG Arts Cente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 © BaeJihun, LG Arts Cente

 

 

 

 

 

 

 

LG아트센터장 이현정

이전의 LG아트센터는 단일 공연장으로 소극장이 없었다. 오랜 시간 LG아트센터와 함께하며 소극장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나.
창작에 대한 제한은 늘 아쉬웠다. 역삼동 LG아트센터는 1천 석 규모의 극장이니, 검증된 대작 공연은 가능하나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적 작품 창작을 시도하기에는 리스크가 컸다. 창작 초연으로 대극장을 채울 작품을 만들기에는 부담도 되고, 제작비가 아무래도 많이 든다. 그러다보니 대극장 작업에 익숙한 창작진을 찾기 마련이라 제한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재개관을 앞둔 LG아트센터에는 소극장이 블랙박스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블랙박스 극장인 U+스테이지에 대한 기대가 크다. 다양한 형태 및 장르 간의 융합으로 재밌는 작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블랙박스 극장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무대 예술은 영화처럼 편집이 불가능하기에 더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공간은 마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백지 같아서, 제약이 없는 상태일 때 더 많은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블랙박스 극장은 예술가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고, 활용성도 크다.

공연장들이 블랙박스 극장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그 속에서 LG아트센터가 가진 차별점은.
극장의 유연함 때문에 점점 더 선호하는 것 같다. LG아트센터는 객석 설치가 가장 용이하다. 가장 최근에 지어진 극장이고, 해외 전문 무대 설계 업체와 LG아트센터 22년의 노하우를 합쳤기 때문에 우수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차별점 아닐까 생각한다.

LG아트센터의 정체성과 블랙박스 극장의 장점이 만났을 때, 어떤 형태의 시너지가 나타날지 궁금하다.
그간 실험성이 높고,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우수한 해외 작품들을 많이 소개해왔다. 다만 창작 작품, 특히 한국 창작진들과의 제작은 어려웠다. 블랙박스 극장은 앞으로 한국 창작진들과의 다양한 협업으로 LG아트센터의 도전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줄 기회다. 블랙박스 극장에서 좋은 작품을 개발해, 대극장 작품으로 키워가는 것도 향후 해야 할 일이다. 물론, 블랙박스 극장만의 역할이 있고 인큐베이팅 공간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지만, 작품 창작 과정에서 쓰임이 넓으리라 생각한다.

좌석 수가 적기 때문에 창작에 들일 수 있는 비용에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이를 극복할 노하우가 있나.
무대가 작기 때문에 그만큼 제작비가 적게 들기도 한다. 객석이 적은 대신 장기 공연 시도해볼 수 있고, 타 극장들과의 협업을 통해 제작비를 분담할 수도 있다. 작품이 완성된 후에는 대극장보다 공연료와 관객 동원에 부담이 없기 때문에 순회 공연에도 용이하다. 따라서 잘 만든 작품이라면 제작 이후에 수익을 낼 수 있는 가능성은 클 것이다.

앞으로 U+스테이지에서 어떤 자체 제작 공연이 있을 예정인가.
아티스트들의 아이디어가 다양한 협업으로 공연될 구조를 생각하고 있다. 우선 ‘Creator’s Box’라는 이름으로 아티스트, 프로듀서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을 제작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할 생각이다. 아트센터는 극장과 기술적 부분, 홍보를 지원하고 작품 제작은 크라우드 펀딩이나 지원금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마련하여 건전한 구조 안에서의 시작을 지향하고 있다. 실험적인 문화 충돌로 에너지 넘치는 공간, 아티스트의 자발적 창조가 있는 공간이었으면 한다.

허서현 기자 사진 LG아트센터

 

이현정(1971~) 2021년에 LG아트센터 5대 대표(센터장)로 취임했다. 1996년 입사한 뒤 공연기획팀장, 공연사업국장을 지냈으며 LG아트센터 기획공연(CoMPAS) 선정부터 시즌제 및 패키지 등 기획 관련 성과를 인정받았다. 2012년 한국공연예술경영인협회가 주최하는 젊은 기획자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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