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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발레 ‘아네모이’ 10.21·25, 11.1
섬세하고 강인한 몸짓으로 나아가다
로열 발레 입단 1년 차, ‘아네모이’ 주역으로 데뷔를 알린 무용수 박한나를 만나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서유럽과 동유럽 예술가들의 영국 이적, 체류 및 장기 활동에 제약이 생겼다. 영국 로열 발레도 그 여파를 받았다. 브렉시트 이전과 비교해 로열 발레로 상향 이적하는 서유럽 소속 중견 무용수의 수효가 급감했다. 영국이 더 이상 유럽의 중심이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비올레타 엘빈(1923~2021)을 시작으로 나탈리아 마카로바(1940~), 이렉 무하메도프(1960~)를 거쳐 세르게이 폴루닌(1989~), 나탈리아 오시포바(1986~)에 이르기까지 런던을 유럽 활동의 거점으로 활용한 볼쇼이, 마린스키 발레 출신 엘리트들의 로열 발레 진출이 전쟁으로 막혔다. 러시아 무용수가 주역에 오르면 최고가 티켓 사재기로 이들을 지원하던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 재벌 집단)’도 코번트가든에서 그 모습을 감췄다. 로열 발레는 브렉시트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북·남미와 로열 발레 스쿨에 속속 진입한 아시아계 주니어의 가치를 다시 살피고 있다.
일본은 요시다 미야코(1965~), 히라노 료이치(1983~), 다카다 아카네(1990~), 카네코 후미(1991~)처럼 로열 발레 수석 무용수를 다수 배출했지만, 우리로선 현재 재일교포 4세인 최유희(1984~)가 퍼스트 솔로이스트에 오른 게 가장 높은 성취다(편집자 주_로열 발레의 서열 체계는 프린시펄(수석)-프린시펄 캐릭터 아티스트-퍼스트 솔로이스트-솔로이스트-퍼스트 아티스트-아티스트 순이다). 어느 때보다 로열 발레가 단체의 정체성을 깊이 있게 탐색하고 있는 이 시점에, 한국의 젊은 무용수들이 로열 발레의 최고 등위를 꿈꾼다. 2014년부터 시행된 1년의 로열 발레 인턴십(The Aud Jebsen Young Dancer programme)을 통해 전준혁과 김보민이 각각 2017년과 2020년 로열 발레에 입성해 지금은 퍼스트 아티스트(김보민)와 솔로이스트(전준혁) 단계에 있다.
그리고 그 맨 아래 단계에 2018년, 15세의 나이로 로잔 콩쿠르 2위에 오른 무용수 박한나(2002~)가 있다. 박한나는 콩쿠르 입상 특전인 교육 연수를 로열 발레 스쿨로 택했고,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2020년 로열 발레에 합류했다. 코로나 기간 잠시 한국에서 훈련하며 차분히 심신을 단련한 그녀는 2022/23 시즌 정식 단원이 됐다.
준비된 무용수에게 찾아온 꿈의 무대
막내 박한나가 2023/24 시즌 로열 발레 ‘아네모이’(발렌티노 주케티 안무)의 주역으로 데뷔를 알렸다. 올 시즌 여타 배역 데뷔가 고전 ‘돈키호테’로 몰린 반면, 박한나는 가장 아래 단계에 있지만, ‘아네모이’를 경험한 바 있는 두 단계 위 솔리스트 사사키 마리코와 더블 캐스팅되면서 발레계 관계자와 런던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박한나의 영재성은 2010년대 중후반, 각종 국제 대회 입상으로 발레계에 널리 알려졌다. 2015년 코즐레바 발레 콩쿠르 1위, 2017년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 1위에 입상했으며, 지도자들은 그의 단단한 기본기와 강인한 체력 그리고 여유로운 음악성을 상찬했다. 로잔 콩쿠르 직후, “기초가 확고하고 발레리나의 덕목을 갖췄으며 감성으로 춤춘다”(테드 브란선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장), “정말 멋지고 유망하다. 표현력은 다소 부족하지만 이제 열다섯 살이다. 향후 활동이 이를 상쇄할 것”(올리버 마츠 취리히 댄스 아카데미 교장) 등의 극찬이 대회장을 맴돌았다.
정교하고 세련된 테크닉은 박한나에게 당연한 요소다. 연이은 입상에도 들뜨지 않고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가는, 또래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긴 호흡과 마음가짐이 박한나의 진가이자 경쟁력이다. 학창 시절부터 다양한 포지션과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연계하고, 운동 역학과 미학을 조화시키려는 일관된 자세가 프로 입문 후에도 이어졌다. 오랫동안 버밍엄 로열 발레에서 활동한 무용수 야마모토 야스케는 상체를 중시하고, 빠르게 방향을 트는 신체적 특질과 더불어 “섬세한 움직임을 통해 발레가 연기로 승화하고, 안무가의 정신과 만나는 순간”을 ‘로열 발레 스타일’로 정의했다. 박한나의 지식과 신체적, 정신적 특성은 ‘로열 발레다움’을 지향한다.
코로나 기간에 이미 리허설로 경험한 덕에 박한나의 ‘아네모이’는 퍼스트 캐스트인 사사키의 그것에 못지않았다. 같은 기간에 군무로 투입된 ‘돈키호테’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준비성이야말로 요즘 로열 발레가 강조하는 정신적 강인함과 상통한다. 런던에서 ‘돈키호테’의 리허설을 마친 박한나와 마주했다.
로잔 콩쿠르 입상 특전으로 로열 발레 스쿨을 택했고, 결국 로열 발레에 입단했다.
로열 발레는 무용수들에게 꿈의 종착지다. 어렸을 때는 막연히 동경하곤 했지만, 그 꿈에 다다르고자 영어 실력도 많이 키웠다. 지금은 영어로 내 입장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네모이’의 안무가인 발렌티노 주케티는 로열 발레에서 무용수로 뛰며 안무를 한다. 그와는 어떤 인연인가?
2년 전 이 작품 초연 때부터 봐왔다. 주케티가 젊은 무용수들에게 주역 경험을 주려는 취지에서 기회를 주고 싶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번 시즌의 배역을 받게 됐다.
아직 1년 차다. 시즌 작품의 정식 주역을 받기가 매우 어려울 텐데.
군무 역할이 주임무여서 늘 준비해야 한다. 전막 공연의 정식 캐스트에 들어가지 않아도 커버로 익힐 작품들에 집중하며 발레단의 분위기와 스타일을 익히고 있다.
로열 발레 스쿨 출신이 발레단에 입단하면 ‘몇 년 차에 어느 정도로 진급해야 주역으로 살아남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그만큼 경쟁이 일상일 텐데, 부담되지는 않는가.
아직 연차가 많지 않지만, 앞으로 다양한 무대 경험을 쌓다 보면 진급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으로 기대한다.
로열 발레에서 원하는 역량은 발레단 감독 겸 안무가였던 프레더릭 애슈턴(1904~1988)이나 케네스 맥밀런(1932~1989)의 전막 발레일 터, 이를 위해 현재 위치에서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가.
프로의 세계에 들어와 보니 그저 ‘잘할 수 있다’로는 부족했다. 결국, 무대 경험이 중요하다. 발레단의 스타 무용수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나만의 스타일을 먼저 찾는 게 중요하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로열 발레에서 내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코로나 기간에 한국에서 연습을 이어갔다.
연습 장소가 마땅치 않으니, 여건만 되면 학교와 집에서 연습하곤 했다. 아직 결과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연습 내내 공연을 열망하는 마음이 성공과 연결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자신만의 ‘로열 발레 스타일’을 정의해 본다면.
로열 발레 스쿨에서 같은 메소드를 배워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르고, 표현도 달랐다. 무릎의 쓰임이나 턴아웃의 각도에서 구별되는 특징이 있지만, 이러한 표현에 앞서 정제된 스타일을 로열 발레의 특징이자 장점으로 존중한다.
글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사진 로열 발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