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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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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굴레를 벗어나, 운명을 극복한 신
신화에서 예언이란 절대적인 선언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가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스러운 신탁을 피하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실현해 버린 것처럼 말이죠. 만약 자신에게 떨어진 예언이 죽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언을 벗어나려는 주인공 부자(父子)
‘갓 오브 워(God of War)’ 시리즈는 고대의 신화를 재해석한 게임으로, 전쟁의 신인 ‘크레토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 신들의 농간으로 삶이 망가진 크레토스는 분노에 사로잡혀 자신의 앞을 방해하는 대상을 모조리 살해합니다. 마침내 그리스의 주신(主神)인 제우스를 죽이며 그리스를 멸망시킨 그였지만, 복수를 달성한 후에 남은 것은 공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이후 크레토스가 선택한 길은 자신마저 죽이는 것이었죠. 그러나 그의 자살은 실패로 끝나고, 그리스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눈을 뜹니다. 바로 위그드라실(세계수)로 아홉 세계가 촘촘하게 엮인 북유럽 신화의 세계였죠.
크레토스는 그중에서도 혹독한 추위와 온갖 괴물들이 가득한 미드가르드에서 거인(신에 필적하는 능력으로 신들과 대립하는 북유럽 신화 속 존재) 라우페이와 결혼합니다. 둘은 아트레우스라는 아들을 낳아 평온한 가정을 꾸려나갔죠. 그러나 아내가 죽고, 가족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오딘과 토르를 비롯한 신들이 아트레우스의 혈통이 거인이라는 이유에서 위협을 가했고 끈질기게 부자를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북유럽 신들의 추적을 피하며 여정을 떠나다 한 예언을 보고야 맙니다. 크레토스는 자신의 죽음이 그려진 벽화를 보게 되었고, 아트레우스는 아버지의 죽음은 물론, 자신이 오딘을 도와서 아버지를 죽인다는 내용을 마주하게 됐죠. 그렇게 크레토스와 아트레우스는 다짐합니다. 신들의 종말인 라그나로크를 실현하여 오딘을 물리치고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기로 말이죠.
크레토스와 아트레우스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부자(父子)입니다. 크레토스는 과거 군사를 이끌던 장군으로서 엄격한 규율과 규칙을 중시하고, 대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희생하라는 태도를 가졌습니다. 반면 아트레우스는 보다 따뜻한 마음씨로 세상에 다가갑니다. 다만 아직 사춘기의 소년이기에 돌발적으로 감정이 변화하고, 실수를 저지르는 미숙한 모습을 보이죠. 그렇게 이 둘의 음악도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아버지 크레토스의 주제곡은 묵중한 저음으로 공기를 짓누르듯이 시작합니다. 남성 중창이 음악에 추가되고, 이는 자신의 운명의 굴레를 비장하게 직면하는 인상을 주죠. 아들 아트레우스의 주제곡은 현악기의 가벼운 스타카토와 재치 있는 악센트가 가득한 반주 위에 경쾌한 선율이 계속 이어져 사춘기 소년의 밝은 에너지와 생기를 표현하는 듯합니다. 재밌는 사실은 아트레우스 주제곡의 주요한 모티브가 크레토스의 주제 선율을 뒤집고 빠르게 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크레토스와는 대비되는 길을 추구하는 아트레우스의 성격을 암시하는 연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민속악기로 풀어낸 신화적 상상력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이하 ‘라그나로크’)에서 크레토스와 아트레우스는 북유럽 신화 속 세계인 에시르 신족이 거주하는 아스가르드, 거인들이 사는 요툰하임, 바니르 신족의 바나하임, 드워프의 스바르트알파헤임 등 곳곳을 탐험합니다. 이러한 신화적 공간을 구현하는 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음악이죠.
본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되는 악기는 ‘허디거디’입니다. ‘라그나로크’의 작곡가 베어 매크리리(1979~)가 허디거디 연주자이고, 그가 직접 모션 캡처 작업에 참여하여 게임 속에서 허디거디 연주자로 등장할 정도로, 허디거디는 이 작품의 음악에서 핵심적인 현악기입니다. 특유의 삐걱거리는 작동 소리와, 현악기면서도 백파이프를 연상시키는 이 중세 악기의 음색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신화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죠. 또한 북유럽의 전통 현악기인 노르웨이의 하르당에르 피들(Hardanger Fiddle)과 스웨덴의 니켈하르파(Nyckelharpa)는 신비로운 북유럽의 감성을 한껏 강화합니다. 이외에도 티베트 싱잉볼(Tibetan Singing Bowls)을 사용하여 명상적인 분위기를 더하거나, 퀘나(Quena)나 오카리나 등의 관악기를 사용하여 신비로운 자연을 그려냅니다.
좌절 속에서도 더 나은 삶을 좇다
아홉 세계를 고군분투하며 돌아다닌 끝에 둘은 라그나로크를 실현했고, 오딘에 대항하는 군대를 모아 아스가르드로 결집합니다. 그런데 격렬한 전투가 펼쳐지는 라그나로크로 아스가르드에 거주하고 있는 무고한 인간들까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아트레우스는 이 장면을 목도하지만 눈을 질끈 감고 대의를 위해서 이들의 희생을 무시하려 하죠. 그 순간 크레토스는 아들에게 그들을 구하라고 지시합니다. 크레토스가 아들과의 여행에서 배운 것은 ‘연민’, 그리고 ‘자비’였기 때문이죠.
이윽고 크레토스는 오딘의 아들, 토르를 마주하고 치열한 싸움 끝에 토르를 쓰러뜨립니다. 크레토스는 그에게도 자비를 베풀지만, 그 순간 오딘이 자신의 손으로 아들인 토르를 죽입니다. 토르가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말이죠. 크레토스와 아트레우스는 오딘을 처단하기 위해 마지막 결투를 벌이고, 오딘이 패하며 라그나로크가 완성됩니다. 크레토스와 아트레우스는 운명을 바꾼 셈이죠.
그들이 운명을 바꿀 수 있었던 이유는 ‘더 나은 삶’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크레토스는 이번 여정에서 적들에게 자비와 연민을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복수와 증오에 매몰되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죠.
‘라그나로크’, 그리고 북유럽 신화가 묘사하는 세계는 폭력적이고 잔혹합니다. 아마 혹독한 겨울이 찾아와 많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풍토에서 자라난 이야기이기 때문이겠죠. 이 작품의 마지막 곡 ‘눈 위에 흩뿌려진 피(Blood Upon the Snow)’에도 크레토스의 주제곡과 가수 호지어(Hozier)의 음성을 합쳐 우리가 마주하는 자연, 그리고 운명의 공포를 가사로 담았습니다. “내가 좌절하는 이유는 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주어진 것보다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상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릅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갈등, 그리고 폭력은 때때로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죠. 하지만 그러한 세계에서도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는 크레토스가 그랬던 것처럼 운명을 전복시킵니다. 복수와 증오가 아닌, 연민과 자비를 향한 삶은 자연조차 지울 수 없는 눈에 흩뿌려진 피처럼 선명할 테니까요.
글 이창성 서울대학교 작곡과 이론 전공을 졸업 후 동대학원 석사과정에서 게임과 음악의 관계에 관심을 두어 게임음악학 연구를 진행 중이다. 현재 KBS 1FM의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