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LUXURY
예술과 브랜드의 만남
예술(가)의 이미지를 통해 브랜드는 상품적 정체성을 변화시키려 하고, 예술가들은 브랜드와의 선잇기를 통해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려 한다. ‘작품’과 ‘상품’이 감각적 협업을 통해 이루고 있는 만남의 현장을 살펴본다.
하이엔드 브랜드는 왜 공연 예술가를 지원하는가
하이엔드 브랜드의 예술가 지원은 창업자의 취향에 따른 미술품 구입과 브랜드의 마케팅 전략 두 가지 경로로 행해진다. 전자는 미술의 영역이고, 후자에 공연 예술이 매개된다. 2024년 기준, 세계 럭셔리 브랜드 시장의 지배적 사업자는 LVMH, 리치몬트(Richemont), 케링(Kering)의 스와치 계열 브랜드와 에르메스, 프라다, 버버리를 꼽을 수 있다. 시계·보석·의류·피혁·향수·샴페인 브랜드는 저마다의 역사와 장인정신, 고유한 디자인의 가치를 계승하고, 소비자에 인정받기 위해 무한 경쟁한다. 이에 소비자의 브랜드 충성도를 유지하면서, 브랜드가 권유하는 물리적 경험을 따르도록 하는, 비교적 손쉬운 차원의 고객관리 활동(Clienteling)에 공연 예술가 지원이 등장한다.
까르띠에(Cartier)는 피아니스트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1987~)를 글로벌 앰버서더로 임명해 그의 투어 시 현지 법인 주최로 별도의 공연을 갖곤 한다. 롤렉스(ROLEX) 앰버서더인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1969~)이 해외 공연을 가면, 현지 법인에선 자사 고객이 좋은 좌석에서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한국에선 자동차·금융·금속 그룹도 ‘전관 공연’의 형태로 해외 단체의 내한 공연 권리를 구매해, 자사 고객 전용 행사를 열기도 한다. 단, 국산 승용차나 신용카드를 명품으로 분류하지 않는 건, 장인정신 부족과 함께 브랜드 역사가 유럽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하이엔드 브랜드는 대체로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밀라노, 스위스 제네바 등에서 시작됐다. 르네상스가 태동한 이탈리아, 베르사유 궁전 완성 이후 명품 수도로 자리 잡은 프랑스, 시계 산업에서 독보적 위치에 오른 스위스 모두 각 지역이 지닌 장인문화의 후광을 럭셔리 브랜드의 활황으로 이어갔다. 현지 부르주아들은 과거 귀족이 누린 생활양식을 모방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할 계기가 필요해졌고, 이때 브랜드는 공연으로 그 장을 마련했다. 2014년 파리에 개장한 루이비통 재단(Fondation Louis Vuitton) 미술관이 그 대표적 사례다. 파리지앵이 조성진과 임윤찬의 공연을 색다르게 즐긴 공간은 한적한 불로뉴 공원의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이었다. 루이비통은 이곳에서 말 그대로 ‘예술과 명품의 가교’를 이뤘다. 앞으로 55년간 루이비통의 운영이 끝나면 파리시가 그 건물과 부지를 이양받게 된다.
루이비통과 까르띠에가 별도의 부동산에서 행사를 개최하는데 반해, 별도의 음악상을 제정한 펜디(FENDI), 거장과 신진 예술가 간 1:1 멘토링을 주선하는 롤렉스, 차세대 예술가 프로그램인 ‘샤넬 넥스트 프라이즈’를 시작한 샤넬(CHANEL)은 미래 인재에 초점을 뒀다. 이들 브랜드가 ‘차세대’에 힘을 주는 건, 코로나를 전후해 변화한 럭셔리 브랜드의 시장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브랜드는 명품 소비 인구의 연령층이 낮아짐에 따라 메종이 가진 헤리티지에 새로움을 더할 젊은 크리에이터의 등장이 필요해졌다. 다만, 신상품 출시에 맞춰 공연 예술가와 브랜드 간 협력이 무리하게 진행되면 오래된 고객은 브랜드를 불안정한 상황으로 인식할 위험이 있다.
‘예술은 취향을 주도하고, 취향은 소비를 견인한다’는 경구는 2020년대에도 유효할 것인가. 럭셔리 브랜드의 각종 지침을 무난히 이행하는 공연 예술가들만이 살아남을 것으로 보인다.
글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예술과 럭셔리 브랜드의 다양한 협업
이 특별한 협업의 역사는 20세기 유럽, 초창기 럭셔리 브랜드 창립자들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3년 ‘봄의 제전’ 초연을 보고 스트라빈스키와 발레 뤼스를 후원하게 된 가브리엘 샤넬(1883~1971)과 1920년대 장 콕토, 살바도르 달리와 교류하며 예술적 깊이를 쌓은 크리스챤 디올(1905~1957) 등 브랜드 설립자와 예술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예술과 럭셔리 브랜드의 협업은 오늘날에 이르러 브랜드 정체성 확립 및 마케팅, 이미지 개선 등에 활용되고 있다. 그중 클래식 음악계와의 협업은 아티스트의 앰버서더 활동, 브랜드 고유의 색을 표현하는 무대와 공연, 재능있는 젊은 음악가를 지원하는 음악상과 멘토링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1. 글로벌 앰버서더 선정
브랜드의 철학과 정체성을 담다
붉은색 드레스와 빛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피아니스트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 그녀는 지난 2022년 4월 20일 롯데콘서홀에서 열린 피아노 독주회에서 까르띠에(Cartier)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착용한 채 무대에 올랐다.
2020년 10월부터 ‘Love is all’이라는 슬로건 아래 까르띠에의 글로벌 앰버서더(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는 연주를 통해 러시아의 인권 침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UN) 70주년 기념 공연에 참여하는 등 꾸준한 인도주의적 행보를 보여왔다. 그녀의 연주 활동에 대해 까르띠에 CEO 시릴 비그네론은 “탁월한 재능과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를 까르띠에의 앰버서더로 이끌었다”고 밝혔다.
최근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는 여성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까르띠에의 팟캐스트 ‘여성의 관점’에 참여해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고정관념과 부딪히며 젊은 여성 피아니스트로 성장해 온 자신의 성장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디올(DIOR)의 중국 앰버서더인 피아니스트 랑랑(1982~)이 올해부터 글로벌 앰버서더로 활동한다. 그는 2015년부터 스위스 시계 브랜드 위블로(HUBLOT)의 브랜드 앰버서더를 맡고 있다. 랑랑의 아내인 피아니스트 지나 앨리스(1994~)도 올해부터 뷰티 브랜드 겔랑(GUERLAIN)의 글로벌 앰버서더로 활동하며, 예술과 아름다움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나갈 예정이다.
2. 특별한 무대 만들기
공연에 브랜드의 감각을 더하다
까르띠에
지난 3월, 샌프란시스코의 데이비스 심포니홀이 향기로 가득 채워졌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는 음악감독 에사 페카 살로넨(1958~)의 지휘, 피아니스트 장 이브 티보데(1961~)의 연주로 3월 1일부터 3일까지 스크랴빈 교향곡 5번 ‘프로메테우스’를 선보였는데, 특별히 까르띠에(Cartier)의 조향사 마틸드 로랑이 제조한 향이 연주 내내 공연장에 감돌았다.
1910년 스크랴빈은 ‘프로메테우스’ 초연 당시 음악의 시각화를 통해 특별한 공감각적 미학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에 에사 페카 살로넨, 장 이브 티보데, 그리고 마틸드 로랑이 원 작곡가의 뜻을 살려 작품에 향기를 더하는 연주를 선보이고자 아이디어를 냈고, 까르띠에는 이러한 향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겼다. 이들은 공연 당일, 무대를 비추는 조명과 함께 향이 주입된 캡슐로 향기를 퍼뜨리는 건식 공기 확산 장치를 홀 곳곳에 배치해 관객의 시각·청각·후각을 총동원하는 음악을 선보였다. 2005년부터 까르띠에와 함께 한 조향사 마틸드 로랑은 외신을 통해 “이번 공연에 사용한 향은 작품에 담긴 메시지 그대로, 보편적이면서도 원초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루이비통 재단
2014년 10월 개관 이래 다양한 공연을 꾸준히 기획해 온 루이비통 재단(Fondation Louis Vuitton)은 산하 미술관에서 매년 젊고 재능 있는 차세대 유망주를 선정해 ‘뉴 제너레이션(NEW GENERATION) 피아노 리사이틀’을 선보이고 있다.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은 캐나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설계로, 예술가들을 위해 설립되었으며, 미술관 중심부에 들어선 대강당은 음악가를 위한 공연장으로 활용된다. 2017년 10월에 피아니스트 조성진(1994~)이, 지난해 2월에는 임윤찬(2004~)이 이 무대에 오른 바 있다.
3. 음악상 제정
예술적 성취와 기회의 장으로 활용
샤넬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일부가 되어라”라는 말을 남기며 당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후원한 가브리엘 샤넬과 예술가들의 대한 일화는 수없이 많다. 샤넬(CHANEL)이 그러한 설립자의 뜻을 이어 예술·문화계 혁신을 촉진하기 위해 ‘샤넬 넥스트 프라이즈’를 신설했다.
샤넬은 지난 2021년 열린 첫 시상식에서 디자인·영화·공연 예술·비주얼 아트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10인을 선정했으며,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을 맡은 작곡가 정재일(1982~)이 한국인 최초로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샤넬 넥스트 프라이즈’ 수상자 자격으로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프리뷰 행사에 참가하기도 했다.
샤넬의 아트 앤 컬쳐 글로벌 총괄인 야나 필은 외신을 통해 “‘샤넬 넥스트 프라이즈’는 샤넬의 오랜 예술 지원의 역사를 이어 그들의 아이디어에 힘을 싣고, 신진 예술가들에게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자 한다”고 밝혔다.
펜디
2023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첼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첼리스트 최하영(1998~)이 지난해 4월 신설된 ‘펜디 음악상(FENDI Music Award)’의 첫 수상자로 선정됐다. 펜디 음악상은 글로벌 패션 브랜드 펜디(FENDI)와 세종솔로이스츠가 공동 주관하는 프로젝트로, 2023년부터 한국의 젊고 재능 있는 음악가를 매년 한 명씩 선정해 지원한다. 심사위원장으로는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이 참여했으며, 최하영은 “음악을 통해 탐구하고자 하는 인내의 미학을 보여줌으로써 나의 열정을 전하고, 모두에게 동기를 부여하고자 한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4. 교육 기회 제공
세대와 국경을 초월한 예술 협업
롤렉스
어느 분야에서든 스승과 제자, 사제관계의 필요성은 절실하다. 설립자 한스 빌스도르프(1881~1960)의 뜻을 이어 꾸준히 예술 및 음악 분야를 지원하고 있는 시계 브랜드 롤렉스(ROLEX)는 멘토 & 프로테제 아트 이니셔티브(Rolex Mentor and Protégé Arts Initiative) 프로그램으로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젊은 예술가를 발굴하고, 각 분야의 명망 있는 거장들과 2년간 협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2002년부터 시작된 멘토 & 프로테제 아트 이니셔티브 프로그램의 멘토로는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1937~),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스(1949~), 영화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1963~)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참여했으며,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는 지휘자 콜린 데이비스(1927~2013), 소프라노 제시 노먼(1945~2019), 바이올리니스트 핀커스 주커만(1948~), 작곡가 필립 글래스(1937~), 가이야 사리아호(1952~2023) 등이 참여했다.
2023/24 시즌의 멘토 & 프로테제 아트 이니셔티브에는 조각가 엘 아나추이(1944~)와 비주얼 아티스트 브론윈 카츠(1993~),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1959~)와 아예샤 하루나 아타(1983~), 영화감독 지아장커(1970~)와 라파엘 마누엘(1990~), 건축가 앤 라카톤(1955~)과 아린 아프라하미안, 재즈 가수 다이앤 리브스(1956)와 가수 겸 작곡가 전송이(1970~)가 선정됐다.
루이비통 재단
첼리스트 고티에 카퓌송(1981~)은 2014년부터 파리 루이비통 재단(Fondation Louis Vuitton)에서 마스터클래스 ‘첼로 엑설런스 클래스’를 이어 오고 있다. 이와 더불어 2021년 1월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고티에 카퓌송 재단’을 설립해 젊은 연주자들에게 꾸준히 데뷔 기회를 마련했다.
고티에 카퓌송은 ‘첼로 엑설런스 클래스’에 참여한 학생 6명과 함께 첼로 앙상블 ‘카퓌첼리(Capucelli, ‘카퓌송’과 ‘첼로’를 이탈리아어로 재구성한 이름)’를 만들었다. 이들이 루이비통 재단의 콘서트에서 연주했던 곡들은 지난 2022년 가을에 녹음되어(Warner Classics) 현재 애플뮤직의 클래시컬 세션(Classical Session)에서 들을 수 있다. 카퓌첼리는 영화음악부터 비디오 게임의 사운드트랙, 오페라 아리아, 그리고 재즈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첼로 연주로 선보이고 있다.
글 홍예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