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기시감과 기대감, 그 사이의 균형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3월 3일 9:00 오전

CINESSAY

영화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

 

감독 서유민

음악 김준성, 김지애

출연 도경수, 원진아, 신예은 외

 

‘말할 수 없는 비밀’

기시감과 기대감, 그 사이의 균형

 

문득 멈춰 서게 만드는 그리운 시간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따가운 햇살처럼 나를 콕 찔렀던 눈빛, 책 냄새 가득한 도서실 창문으로 흘러들어온 바람에 살랑살랑 날리던 그 사람의 머리카락, 같이 듣던 음악과 함께 마음에 꾹꾹 눌러쓴 오밀조밀한 사랑의 감각. 그날의 날씨, 그날의 감정, 그리고 그날의 냄새가 하나의 주머니에 담겨 휙 날아온다. 그렇게 문득 잊고 있다가 귀를 기울이면 어느새 메아리처럼 되돌아와 내 곁에 서 있는, 그런 그리운 감정이 있다. 우리가 첫사랑이라 부르는, 처음이 지닌 그 느낌이다.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피아니스트 유준(도경수 분)은 손목 치료를 위해 한국에 교환 학생으로 오게 된다. 학교에 간 첫날, 유준은 신비로운 피아노 선율에 이끌려 도착한 연습실에서 정아(원진아 분)와 마주치고, 두 사람은 운명처럼 가까워진다. 하지만 비밀이 많은 정아와의 만남은 계속 엇갈리고, 유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다고 오해한 인희(신예은 분)는 갑작스럽게 고백한다. 그 순간을 목격한 정아는 돌연 자취를 감춘다. 사라진 정아를 찾던 유준은 정아의 비밀과 마주한다.

이미 ‘비밀’을 알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익숙한 줄거리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주걸륜(1979~)이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대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2007)의 한국 리메이크작이다.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심지어 영화의 가장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반전 장면도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 우리는 왜 한국 배우가 등장하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봐야 하는지, 영화는 태생부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작품의 배경은 예술고등학교에서 예술대학 캠퍼스로 수정됐다. 원작과 비교 감상하는 재미를 위해 모두 밝히지는 않지만, 2025년의 한국 감성에 맞게 섬세한 설정과 분위기를 넣어 유연하게 한국적 감수성을 녹여냈다. 인물들의 성격도 조금 더 로맨틱해졌다. 아이돌의 느낌보다는 음악적 감수성이 뛰어난 배우처럼 보이는 도경수(1993~)가 낭만적인 느낌을 주고, 현대적이면서도 복고적인 느낌이 나는 원진아(1991~)는 시대를 초월한 타임 루프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잘 어울린다.

원작의 줄거리는 아버지의 시선에서 보면 지독한 비극이지만, 한국판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줄곧 절대 비극적인 결말이 나지 않으리란 자세를 취하고 진행되기 때문에 암울한 정서 없이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간다. 두 사람의 비밀을 드러나게 하는 정아의 엄마와 유준의 아빠도 역할이 좀 더 뚜렷해졌다. 이들은 ‘운명적인 사랑은 가장 적절한 순간에 모든 것을 걸어야 기적이 된다’라는 결말로 나아가는 주인공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원작에는 이제까지 익숙하게 봐왔던 로맨틱 영화의 장점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렇기에 이 익숙함을 지루하지 않도록 새롭게 풀어내는 일이 서유민(1974~) 감독과 배우들이 마주한 가장 큰 숙제였을 것이다.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하이틴 로맨스에서 격렬한 판타지로 변하는 원작과 달리, 한국의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격한 판타지와 반전을 밝히는 대신 두 사람의 마음이 오가는 로맨틱한 정서를 더욱 강조해 보여준다. 이미 결말을 모두 알고 있어서 더 이상 깜짝 놀라게 할 수 없는 반전 대신 판타지 로맨스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춰 신경 쓴 느낌이다.

많은 관객이 가장 기대하는 영화의 시그니처 장면인 ‘피아노 배틀’ 장면은 원작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꽤 많은 공을 들인 티가 난다. 원작이 두 대의 피아노를 오가는 앵글과 연출로 음악을 바탕으로 한 영화적 스펙터클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리메이크에서는 영화적 기교보다 음악 그 자체를 잘 들려주고자 노력했다. 원작에서 주걸륜이 직접 연주를 선보였던 것과 달리 도경수는 직접 연주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핸드싱크(Hand Synchronize) 연습에 심혈을 기울였다.

음악과 첫사랑, 그 순수한 감각

음악대학을 배경으로 한 작품답게 오케스트라가 등장하는 장면은 이 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피아노와 함께 다양한 악기들과 어우러지는 음악은 마치 공연장에 온 듯한 스펙터클과 아름다운 감성을 드러낸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첫사랑의 감각을 시각적인 기호와 함께 청각적인 요소들로 되새기는 영화다. 액자로 박제하고 싶은 아름다운 순간보다는 문득 들려오는 음악에 모든 시간이 과거를 향하는 듯한 정서를 담는다.

역사적으로 혼란스럽고 소동과도 같은 이 시대 속에서도, 영화에는 여전히 믿어보고 싶은 사랑, 여전히 기대하는 순수한 감정, 첫사랑의 설렘과 순수함을 그저 예쁘게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떠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보다 뭉툭해지지 않는 사랑의 환희를 향해 내달리는 청춘의 선택이 더 중요하게 담겼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깊이 파고들기보다 넓게 펼쳐놓는 전략을 택했다. 이미 익숙한 이야기, 반전이 더 이상 반전이 될 수 없는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되는 이유는 여전히 순수한 감정과 사랑만이 나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영화의 순진한 마음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랑이, 언젠가 나에게도 깃들었을 순수한 마음이, 이 시대 청춘들의 마음에도 여전히 살아있기를 응원하게 된다.

 

[OST] 음악감독 김준성·김지애 |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원작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대표곡 ‘시크릿’ 이외에 모든 곡을 새롭게 구성해 마치 ‘한국형 음악영화’처럼 재탄생시켰다. 한국적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익숙한 클래식 곡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피아노 배틀 장면에서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의 편곡이 인상적이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음악으로 이어주는 장면들과 함께 음악적 완성도도 뛰어나다. 두 사람의 감정을 이어주는 레코드숍 장면에서는 들국화의 ‘매일 그대와’가 흐르는데, 이 곡의 가사와 두 사람의 로맨스가 잘 어울린다.

 

 

| | | set-list

01 Arutur Vinder 02 만날 수 없는 너 03 말할 수 없는 비밀 04 첫 만남1 05 마술쇼 05 오래된 연습실 07 데이트 08 첫 만남2 09 고양이 춤 for 4 hands Piano 10 I Really Want you 11 너랑 나랑, 그리고 피아노 12 피아노 배틀 13 사랑을 느끼다 14 핸드폰 없는 여자 15 저녁 초대 16 매일 그대와 17 기다림 18 초대장 19 오해 20 처음 본 사람 21 힘든 정아 22 마지막 연주 23 사랑을 찾아서 24 사랑의 인사 25 Secret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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