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 | 내 삶을 관통한 음악들, 바·쇼·차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3월 23일 9:00 오전

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26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첼리스트 박상민

내 삶을 관통한 음악들, 바·쇼·차

 

 

박상민 줄리아드 음악원을 졸업하고, 메네스 음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최연소 종신단원으로 입단했으며, 로완 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서울스트링콰르텟과 첼리스타 첼로앙상블 리더로 활동 중이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 01

기억 속의 첫 화음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 #기억 속 첫 클래식 음악

감상 포인트 힘차게 울려 퍼지는 관현악의 서두, 극적인 전개,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고양감의 강렬한 인상

 

어린 시절, 클래식 음악 애호가인 아버지 덕분에 집 안에는 언제나 음악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조용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벽이 울릴 만큼 큰 소리로 말이지요. 어린 시절의 저는 그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시끄럽다고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버지께서 집에 계시지 않는 날이면, 그 소란스럽던 음악이 문득 그리워지곤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무렵 이미 음악은 제 삶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억 속 첫 클래식 음악은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입니다. 힘차게 울려 퍼지는 관현악의 서두와 극적인 전개,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고양감은 어린 시절의 제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곡을 특히 좋아하셨고, 마치 집 전체를 콘서트홀로 만들겠다는 듯 볼륨을 높이시곤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음악을 단순히 ‘듣는’ 분이 아니라, 온몸으로 ‘살아내는’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여섯 살에 첼로를 시작했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음악은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클래식 음악은 특별한 날에만 접하는 장르가 아니라, 일상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음악을 업으로 삼은 것 또한 제게는 어떤 결단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가까웠습니다.

지금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이 곡의 첫 화음이 머릿속에 울려 퍼집니다. 이 곡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자, 클래식 음악과 처음으로 맺은 정서적 연결 고리로, 지금까지도 제 삶의 가장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음악입니다.

 

 

# 02

오케스트라를 알게 된 순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삶의 방향을 결정지은 음악

레너드 번스타인/뉴욕 필하모닉

감상 포인트 음악 속에 담긴 쇼스타코비치의 긴장과 분노, 그리고 절제된 절망

 

열 살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저의 음악 교육을 위해 미국 이민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열한 살에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열네 살 무렵, 줄리아드 예비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연주하기 위한 연습을 시작했을 때, 저는 이 곡에 단번에 빠져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쇼스타코비치가 처해 있던 정치적·역사적 맥락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음악 속에 담긴 긴장과 분노, 그리고 절제된 절망은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이 곡을 반복해서 들었고, 매우 자주 들어 거의 외울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악보를 따라가며 각 성부를 듣는 경험, 그들이 만들어내는 집단적 에너지는 제게 오케스트라 음악의 본질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저는 오케스트라 음악에 깊은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 곡은 수많은 개인의 소리가 모여 하나의 서사를 완성해 가는 과정과 그 안에서 각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은 제게 단순한 레퍼토리를 넘어, 음악가로서의 방향을 정립하게 만든 결정적인 작품입니다.

 

 

# 03

무대 위, 음악가의 삶

#차이콥스키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연주자로서 첫 발을 내디딘 순간

유진 오르먼디/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감상 포인트 사랑과 비극, 열정과 운명이 교차하는 선율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저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오디션에 합격했습니다. 다행히 오케스트라 측에서 1년의 유예 기간을 허락해 주어 줄리아드 음악원 과정을 마칠 수 있었고, 열아홉 살에 정식 단원으로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입단 후 첫 연주곡은 차이콥스키의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이었습니다.

미국 오케스트라는 시즌 일정이 1년 전에 확정되기 때문에, 저는 첫 연주곡을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설렘과 긴장이 뒤섞인 마음으로 이 작품을 연습하던 시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오랫동안 이끌었던 유진 오르먼디(1899~1985)의 연주 영상을 찾아 반복해서 보았습니다. 음악은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다웠고,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는 제가 오랫동안 꿈꾸어 온 바로 그 소리였습니다.

차이콥스키의 이 서곡은 사랑과 비극, 열정과 운명이 교차하는 작품입니다. 제게 이 곡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처음 무대에 섰던 순간의 떨림과 책임감, 그리고 설렘이 모두 담긴 음악이기도 합니다. 이 곡을 연주하며 저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한 구성원으로서 음악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제가 무대 위 연주자로서 첫 발을 내디딘 순간이자, 음악가로서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 음악입니다.

‘탄호이저’ 서곡이 저를 음악으로 이끈 출발점이었다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은 제 삶의 방향을 결정지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은 음악가로서의 삶이 현실이 된 순간을 상징합니다. 이 세 곡은 각기 다른 시점에서 제 삶을 관통하며 지금의 저를 만들어왔습니다. 아마도 앞으로도 음악을 계속하는 한, 이 곡들은 언제까지나 저의 인생 음악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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