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들의 아버지, 정명훈의 이야기

정명훈 피아노 독주 소품집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월 1일 12:00 오전


▲ 정명훈(피아노) | ECM New Series 2342 ★★★★☆

자식을 키워본 아버지들은 다 안다. 자녀가 커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갈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은 심정을. 자신이 평소에 꺼리던 일도 아들이 부탁할 때 거절할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자식 앞에 장사 없다.

지휘자 정명훈은 아들 셋을 두었다. 막내 정민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휘자로 활동 중이고, 둘째 정선은 재즈 기타리스트이자 ECM의 음반 프로듀서다. ECM은 재즈·클래식 음악 녹음에 권위를 자랑하는 독일 음반 레이블로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 기타리스트 팻 메스니 등의 명반을 냈다. 정민이 지휘자로 데뷔하기까지 아버지의 도움이 컸던 게 사실이고, 이번에는 둘째 아들 차례다. 정명훈은 ECM 레이블에서 피아노 소품집을 내자는 아들의 간청을 마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명훈 피아노 소품집이라는 타이틀은 아무래도 이상했을까.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녹음한 이번 앨범의 표지에는 그늘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나무 사진 외에는 ‘정명훈’과 피아노’의 영문 표기밖에 없다. 드뷔시의 ‘달빛’, 쇼팽의 녹턴 D장조와 C# 단조,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차이콥스키의 ‘가을 노래’,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아라베스크’, 모차르트의 ‘아, 어머니께 말씀드릴게요 변주곡’…. 차이콥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 3위 입상자 출신의 지휘자 정명훈이 처음 내놓은 피아노 독주곡집에 실린 작품들이다. 지휘자에게 피아노 연습이란 일상적인 기본기 훈련인데다 그는 요즘에도 가끔씩 가곡 반주를 하거나 실내악 멤버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보다는 지휘자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생애 첫 피아노 독주곡 앨범이란 어떤 의미일까.

이번 음반은 ‘가족’이라는 키워드가 없다면 정말 의아스럽고 본인에게도 쑥스러울 일일지도 모르겠다. 생애 첫 독주 음반이 베토벤 소나타도 아닌 소품집이니 말이다. 이 음반의 프로듀싱을 재즈 기타리스트 출신인 둘째 아들 정민이 맡았다. 음반의 콘셉트도 ‘손주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다. 둘째 손녀의 이름 ‘루아’는 포르투갈어로 ‘달’이니까 드뷔시의 ‘달빛’을 고르는 식이다. 슈베르트의 즉흥곡 E단조는 큰 아들의 결혼식 때 마에스트로가 직접 연주한 곡이란다. 차이콥스키의 ‘가을 노래’는 차이콥스키 콩쿠르 예선 때 연주했던 곡이다. 피아노 소품으로 꾸미는 ‘음악적 자서전’이랄까. 군데군데 차이콥스키 콩쿠르 입상 당시 청년 피아니스트 정명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동안 정명훈은 정트리오의 멤버로,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와 베이스 연광철 등의 반주자로 무대에 서거나 음반을 녹음한 일은 있어도 피아노 독주로 무대에 선 적은 거의 없다. 평소 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싶어 했던 팬들에겐 이번 앨범이 매우 반가운 선물이 될 것이다.

첫 피아노 독주 음반에다 가족애를 듬뿍 담아낸 의미는 각별하지만 연주 자체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드뷔시나 슈베르트, 차이콥스키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고 하지만 나머지 소품에 대한 선곡 배경이 궁금하다. 음반 수록곡도 독주회의 프로그램처럼 당연히 앞뒤 문맥과 논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소품집은 현역 피아니스트에게도 부담스러운 앨범이다. 너무나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연주하면 당연한 일이고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앨범도 ‘지휘자 정명훈’이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으리라.

가장 인상 깊은 곡은 모차르트의 변주곡이다. 전체적인 구성력과 디테일의 조화, 피아노 음색의 특성을 잘 살려낸 연주가 돋보였다. 하지만 왼손과 오른손 사이 힘의 불균형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높은 음역의 소리가 너무 날카롭고 왼손이 오른손의 템포를 못 따라갈 때가 있다. ‘엘리제를 위하여’의 왼손 루바토는 듣는 이로 하여금 박자 감각을 잃게 할 정도로 지나친 느낌이다. 음악이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는데 곡에 따라서는 악보를 무미건조하게 읽어 내려가는 것 같은 대목도 자주 눈에 띈다.

관현악곡이 컬러 영화라면 피아노곡은 흑백 사진이다. 평소 정명훈이 지휘하는 관현악을 들으며 그의 음악세계에 공감한 음악팬들이라면 피아노 소품에서도 그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피아니스트 정명훈’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가지고 이번 앨범을 듣는다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지휘자 정명훈의 깜짝 선물 정도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글 이장직 객원전문기자(lu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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