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1세를 일기로 타계한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최근 그의 지휘 인생을 회고하는 다양한 박스 세트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번에 워너 클래식스에서 내놓은 세 개의 세트 또한 그중 하나다. 이들 세트는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30년 동안 그가 내놓은 녹음들을 ‘런던 시절’(17장), ‘시카고 시절’(4장)로 나누어 정리하고, 여기에 ‘협주곡 녹음’(9장)을 추가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들 세트에 등장하는 오케스트라를 살펴보면, 런던 시절에서는 필하모니아·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시카고 시절에서는 시카고 심포니가 주역으로 나오는 반면, 협주곡 세트로 오면 이들 악단 외에 런던 심포니·런던 필하모닉·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등장한다. 그와 협연한 음악가들은 야노스 스타커·클라우디오 아라우·나탄 밀스타인·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이츠하크 펄먼 등인데, 이 세트는 이들의 전성기 시절 연주를 담고 있다.
총 30장에 달하는 음반을 집중 감상하는 것이 필자에게는 차라리 중노동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나 사투를 벌인 끝에 얻은 보람 또한 작지 않았다. 무엇보다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음반을 해석의 발전을 담은 기록물’로 생각했던 줄리니의 지휘 인생 전반기를 착실하게 추적할 수 있는 기회를 이들 세트가 제공했다는 점이다.
주로 1950~1960년대의 녹음들을 담고 있는 ‘런던’ 세트는 녹음에 따라 음향의 안정성이 다소 떨어지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지만, 스튜디오 환경에서도 라이브 연주의 감각을 유지하고자 했던 줄리니의 치열한 음악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이 세트에서 눈여겨볼 작품은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로시니의 서곡집·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브람스의 교향곡 전곡·차이콥스키의 교향곡 2번과 6번·드보르자크의 교향곡 8번·드뷔시와 라벨의 관현악 작품집 등이다.
다음으로 베토벤·브람스·말러·브루크너 등의 교향곡을 담고 있는 시카고 세트는 녹음 하나하나가 절편(絶篇)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해석을 담고 있다. 특히 말러 교향곡 1번과 브루크너 교향곡 9번에서 그는 어느 시대, 어떤 지휘자의 해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생동감 넘치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협주곡 세트로 오면 협연자들이 워낙 거장인 까닭에 애호가들의 이목이 쏠리지 않을 녹음이 거의 없지만, 스타커와 호흡을 맞춘 하이든·슈만·생상스의 첼로 협주곡과 로스트로포비치와 협연한 드보르자크와 생상스 첼로 협주곡, 아라우와 협연한 브람스 1·2번 협주곡, 밀스타인과 협연한 프로코피에프 협주곡 1번, 그리고 펄먼과 함께 한 브람스와 베토벤의 협주곡 녹음은 필수 감상 레퍼토리라고 해도 좋을 듯싶다.
그리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초창기에 그가 EMI 클래식스에서 케루비니의 레퀴엠을 녹음할 당시 일화가 있다. 첫 번째 녹음을 마치고 자신의 연주를 듣고 나서 그는 “좋군요. 그런데 정말 아름다운 해부용 시신 같군요”라고 말하며 단원들에게 “내일은 쉽시다. 그리고 모레 우리는 살아있는 연주를 할 것입니다”라고 외쳤다. 연주 당일이 되자 그는 단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이크가 있다는 걸 잊어버립시다. 그리고 음악을 만들어봅시다.” 살아있는 연주를 담은 녹음이라! 이 음반 세트는 그게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다.
글 박성수(음악 칼럼니스트)